22화
왈츠에 맞추어 스텝을 옮긴 킬리안이 작게 속삭였다.
“티스베, 거기 턴.”
“나도 아니까 지적하지 마.”
콱! 티스베가 킬리안의 발을 가격한 뒤 매끄럽게 턴을 돌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너보다 잘 알아.”
“……성격은 여전하군.”
“춤 실력도 여전하지?”
“그 날카로운 말투도 여전하고.”
날 싫어하는 것도 여전하군.
킬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특유의 매혹적인 중저음으로 속삭였다.
겉으로만 보자면 대단히 달콤한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혹시 이 사람, 나한테 마음이 있나?’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유혹적이니까.
하지만 티스베는 알고 있다.
킬리안의 매혹적인 태도는 다 속임수라는 걸.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거지……?’
가장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은 상대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춰야 하는 상황이라니.
티스베는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다시 한번 킬리안의 발을 꾹 밟았다.
“……아무리 그래도 뒷굽으로 밟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너한테 너무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조용히 해.”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제 안쓰러운 상황을 복기했다.
이렇게 된 연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까,
“공녀님! 여기서 다 뵙네요!”
라는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에스텔이 티스베를 찾아왔던 때로.
* * *
연회장은 한창 소란스러웠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과도 같은 황제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였으니 당연했다.
물론 개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것은 킬리안과 에스텔.
“에스텔 양, 정말 아름다우세요!”
“사냥회에서 모두를 구해 주셨다지요? 그 용기를 모두가 칭송하고 있답니다!”
사냥회 이후 사교계에서는 어딜 가나 에스텔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실 사교계뿐만이 아니지.’
길거리만 나가도 진짜 성녀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전단지가 바닥을 뒹굴었으니까.
문제는 칼릭스트가 에스텔을 꽁꽁 싸매고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에스텔을 둘러싼 호기심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
모두가 에스텔을 만나 보기를 희망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찰나.
에스텔이 황태자인 킬리안의 손을 잡고 등장한 것이다.
‘정말 완벽한 성녀의 데뷔로군.’
동시에 완벽한 박탈.
에스텔에게 몰린 인파를 보며 티스베는 조금 쓰린 속을 느꼈다.
‘나도 이 정도인데.’
원작에서의 티스베는 얼마나 박탈감이 들었을까?
저 자리가 어째서 내 자리가 아닌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내 삶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해야 했던지.
가능하다면 누구에게라도 울며 따져 묻고 싶었을 것이다.
‘늘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니까.’
책 속에서 티스베가 왜 그렇게 패악을 부렸는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티스베가 먼발치에서 킬리안과 에스텔을 바라보고 있자, 소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티스베. 혹시 신경이 쓰이십니까?”
“……음? 뭐가요?”
“아까부터 줄곧 저쪽을 바라보고 계시기에.”
“아하.”
잠깐 상념에 잠기느라 에스텔을 바라보던 것이 조금 노골적이 된 모양이었다.
사실 이 연회는 티스베에게 결코 좋은 자리가 될 수 없었다.
이 연회는 새로운 성녀의 등장을 모두에게 알리고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고.
‘바꿔 말하자면 나한테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는 자리니까.’
에스텔의 이름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몰락하는 것이 티스베의 위치였다.
그 간단한 이치를 소어가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티스베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다정한 염려가 가득 배어 있었다.
“혹시 불편하시면 잠깐 산책을 가는 건 어떠십니까? 사람이 많아 그런지 한산한 바깥 공기가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이지, 다정한 배려였다.
티스베는 바깥 공기가 그립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티스베가 신경을 쓸까 봐 해 준 배려이리라.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소어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난 괜찮아요. 그보다 소어는 나하고만 있는 게 불편하지는 않나요?”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당신 곁은 늘 안온합니다, 티스베.”
소어가 맞잡은 손을 들어 어리광을 부리듯 티스베의 손에 낯을 기댔다.
온갖 찬란한 것들로 빚은 듯한 사내가 애정을 갈구하는 행위는 퍽 어렸다.
어리숙하고, 조금은 가여운 느낌이 날 만큼.
세상 사람들이 귀엽다는 말로 포장하는 모든 미숙이 그에 묻어났다.
그리고 티스베는 그런 소어에게서 늘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티스베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디든 좋습니다. 그러니-”
소어의 얇은 입술에서 다음 단어가 나오려는 찰나.
“공녀님! 여기서 다 뵙네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티스베는 화들짝 놀라 소어의 낯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와 함께 소어의 낯빛에 짙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티스베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에스텔과 킬리안에게로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에스텔 양?”
“네, 공녀님! 오늘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우세요!”
“칭찬 고마워요. 에스텔도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티스베의 시선이 에스텔의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킬리안에게로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늘 파트너는 에스텔 양이고, 내게는 파트너를 에스코트할 의무가 있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문제? 많지.
개중에서도 제일 큰 문제는 너랑 가까이 마주 보면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만.
두 번째로 제일 큰 문제는 네가 나랑 가까이 마주 보면서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다른 때 같았으면 평소 성격대로 했겠지만…….
티스베는 두 입꼬리를 끌어 올려 방긋 미소 지어 준 뒤, 손을 들었다.
“소어.”
“네, 티스베.”
“내가 목이 말라서 그런데, 저쪽에 가서 사과주 좀 가져다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소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떴다.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야, 킬리안이 느슨한 미소가 걸린 낯으로 입을 열었다.
“……티스베. 살바토르 공작은 부황께서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래. 너랑 나 정도는 돼야 알겠지.”
황제가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탓에 황궁에서는 사과 관련된 음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도.
소어가 사라지자마자 바뀐 그들의 말투에,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 전하와 공녀님, 두 분 가까운 사이셨나요?”
“친하지.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사이니까. 안 그래? 티스베.”
“전혀 안 그래.”
어릴 때 친하기는 했지만 과거형이다.
킬리안을 정말 가깝게 여겨도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그 또한 과거형이다.
킬리안의 진짜 속내를 알게 된 이후, 티스베는 줄곧 킬리안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왔다.
문제는 킬리안이 그걸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전혀 안 그렇다니. 서운한데. 우리가 같이 한 세월이 얼만데.”
“얼굴 본 기간만 보면 짧지. 따져 보면 몇 년 안 될 걸.”
“몇 년이면 성도 하나 쌓지. 충분하네.”
“그렇게 충분하면 가서 성이나 쌓아.”
“감독하는 건 네가 도와줄 거지?”
“그럴 리가.”
그때 되면 나는 세이즈에 있을 텐데 감독은 무슨.
대체 왜 이렇게 친한 척을 못 해서 안달일까.
‘어차피 진심도 아니면서…….’
<괴물꽃>에서 설명한 킬리안은 다음과 같다.
남들보다 높은 능력치 때문에 오만하기 그지없고 주변에 무관심한 사람.
지극히 계략적이고, 또 사람을 이용하는 데 능숙한.
-티스베 꽁무니를 왜 그렇게 따라다니냐고? 걔한테는 얻을 게 많거든. 나한테 필요한 걸 다 쥐고 있잖아. 결혼을 했더라면 딱 좋았을 텐데, 그건 아쉽게 실패했으니 별수 있나.
티스베의 머릿속, 과거 들었던 킬리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때는 정말 손끝부터 차게 식는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모든 기대를 버렸기 때문일까.
그런데 왜일까?
이 순간에 에스텔이 저렇게 눈을 빛내는 건…….
“공녀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격의 없이 대하는 건 처음 봐요! 두 분 정말 절친하시군요!”
“……대체 뭘 본 거예요?”
지금 여기 킬리안이랑 내가 절친하다고?
얘랑, 내가?
“전혀 아닌데요?”
“그래, 티스베는 날 싫어하거든.”
“음…… 그럼 화해의 의미로 춤 한 번 추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네?”
티스베가 말문을 잃은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오케스트라가 왈츠의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짝을 지어 댄스 플로어로 올라오라는 뜻이나 다름없는 신호.
“자, 어서 다녀오세요! 어서요!”
……대충 그렇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