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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1화 (21/121)
  • 21화

    ‘다행히 아직 에스텔은 오지 않은 모양이네.’

    너무 늦지 않았다는 뜻이니 다행이다.

    티스베는 연회장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소어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시간이 제법 지난 상태였다.

    사실 티스베가 도착한 시간에 바로 들어왔더라면 이렇게까지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무 문제 없이 바로 들어왔다면…….’

    티스베의 시선이 약간의 착잡함을 담고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당연히 소어가 서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빛을 발하는, 꿀처럼 찬란한 금발.

    길게 뻗은 금빛 속눈썹이 촘촘히 박힌 아래 벽안은 얼음 호수처럼 푸르렀고, 상냥한 미소를 담은 이목구비는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로웠다.

    이 얼굴에 익숙해진 티스베마저 조금 넋을 잃고 쳐다볼 만큼.

    ‘정말 잘생기긴 했다.’

    소어의 이목구비는 사실 선이 얇은 쪽에 속하지는 않았다.

    오랜 전장 생활로 인한, 특유의 딱 떨어지는 느낌이 곡선보다는 직선에 가까웠으니까.

    언뜻 보자면 사나운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렇게 순한걸.’

    티스베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소어가 사나운 얼굴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저 호의 가득한 얼굴과 소어의 심성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저 커다랗고 말랑한 무언가일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늘 좋지만은 않지만…….’

    연회장에 늦게 들어온 이유도 바로 그 말랑함 때문이었다.

    -소어!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세상에, 볼 언 것 좀 봐……!

    -괜찮습니다. 저는 티스베께서 한 달 내내 한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해도 기꺼이 따를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미친 소리예요?! 안 오면 가야죠!

    오늘은 날이 많이 추웠다. 그리고 연회복은 남녀를 불문하고 애초에 실내용을 상정하고 만든 것이라 그리 두껍지 않다.

    하여 코끝은 물론이거니와 두 뺨과 귀가 새빨갛게 얼어서는 티스베를 기다리고 있던 소어를 보자, 티스베의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럴까 봐 미리 연락도 넣었는데, 마차에라도 들어가 있지 않고……!

    -하지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티스베가 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차게 언 소어는 티스베의 손을 잡은 채 말갛게 웃을 따름이었다.

    -티스베는 절 버리지 않으실 테니까요.

    -…….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요. 안 버리죠.

    -절 버리지 마세요.

    뭔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소어가 오랜 애정 결핍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소어는 예전에도 종종 이렇게 굴곤 했다.

    ‘이번에는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도 같았지만.’

    그건 한 달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는 소어가 어쩐지 조금 처량해 보인 탓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티스베는 소어에게 몇 번이고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해 그를 안심시켜 주고 나서야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된 것이다.

    물론 버리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다고 망명 계획을 취소한 건 아니지만.

    ‘거짓말은 안 했어.’

    만약 파혼을 하더라도 그건 약혼을 깨는 거지, 티스베와 소어의 관계를 깨는 게 아니니까.

    파혼을 하고 망명을 한다고 한들 결코 소어를 버리는 게 아니다.

    ‘편지 꾸준히 쓰면 괜찮겠지.’

    사실 떠날 걸 생각하면 매정하게 끊어 내야 하는데, 소어한테는 그게 잘 안 됐다.

    그들이 어린 나이에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어쩌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순수하게 대해 주는 저 태도 때문일지도.

    ‘특히 저렇게…….’

    한없는 신뢰와 호의가 가득 담긴 낯으로 바라볼 때면 어쩐지 조금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그래, 마치 토끼를 쓰다듬을 때처럼.

    “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그냥, 새삼 잘생겼구나 싶어서요.”

    티스베의 말에 소어가 활짝 웃었다.

    “제 외형이 취향에 맞으신다니 기쁩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도 있었다.

    그것이 제법 귀여워, 티스베는 소어의 뺨을 몇 번 쓰다듬어 주며 생각했다.

    ‘역시 소어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더더욱 망명을 해야 한다.

    자신이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소어에게 폐를 끼칠 뿐이니까.

    ‘그런데…….’

    티스베는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흘끔 손목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에 걸린 팔찌를.

    ‘이제 마흘론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팔찌에는 검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이 검은 펜던트는 지난 번 마흘론과 통화하는 데 썼던 결정을 가공한 것으로, 가볍게 두 번 건드려 주면 마흘론에게 신호가 가게끔 되어 있었다.

    물론, 마흘론 쪽에서도 티스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루넷 영식도 보이지 않고.’

    연회장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니.

    ‘조금 불안한걸.’

    따로 찾아봐야 하나?

    티스베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회장 안쪽의 문에서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 이후, 홀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행렬을 맞는 일종의 환영 행사였다.

    이런 인파 속에서는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을 만한 어린애까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홀 안으로 들어오는 무리가 있었다.

    그 선두에 선 이는 당연히 황제와 황후.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젊음을 유지시켜 준다는 마도구를 찬 탓에 여전히 젊은 나이로 보이는 황제와 황후가 걸어 나오고 그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하나는 에스텔.

    그리고 하나는 남주인공 킬리안이었다.

    남주인공이 왜 저기에 서 있냐고?

    당연하다.

    ‘황태자니까.’

    황태자 킬리안 레안드로스.

    현 황제가 정부에게서 얻은 아들로, 황후 태생이었던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황태자위를 얻게 된 행운의 청년.

    그리고…… 티스베가 유일하게 꺼리는 사람.

    킬리안을 바라보는 티스베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저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니.’

    사실 얼굴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킬리안은 그들 이전 세대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어머니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니까.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과 루비처럼 붉은 눈.

    저 매혹적인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티스베에게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 1위를 꼽으라면 바로 저 킬리안이었다.

    ‘이 인성파탄자…….’

    왜냐하면, 킬리안은 티스베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늘 웃고 있는 주제에 속은 제 머리색처럼 시커멓기 그지없다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왜 모르겠어.’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봤는데.

    심지어 어릴 때는 꽤 친하기도 했다.

    이유야 별것 없다.

    그냥 준공작 위로 그 나이대 애들이 티스베와 킬리안뿐이었던 탓이다.

    물론 소어도 또래긴 했지만, 소어는 주로 영지와 전장에 있었으니 논외로 치고.

    공식 석상이나 연회 등에서 필연적으로 얼굴을 부딪히곤 하니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친분이 쌓일 수밖에.

    게다가 황제는 티스베와 킬리안을 약혼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아주 남남인 편이 더 이상할 것이다.

    ‘정말 친할 때는 친남매처럼 느껴지기도 했었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한 성녀의 얼굴을 내보여야 했지만, 어릴 때부터 본 킬리안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기보다는…….

    -윽, 너 봤어? ……봤구나. 조용히 해야 해.

    ……처음부터 들켰다고 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킬리안은 티스베의 원래 성격이 마냥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일까.

    정을 붙이지 않으려 거리를 두었다고는 해도, 저도 모르게 조금씩 내보이게 되는 신뢰가 있었다.

    -킬리안이라면 내가 진짜 성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등을 돌리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도 했다.

    아주 잠깐.

    킬리안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때는.

    ‘다른 때였더라면 당장 멀리 피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티스베의 유일한 불행이었다.

    어쩔 수 없다.

    당장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녀는 팔찌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자리를 못 비울 것 같으니.’

    얼른 원작 진행만 얼추 확인하고 찾아봐야겠다.

    루넷 영식이든, 마흘론이든.

    * * *

    ……라고 생각했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연회장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맴돌고 있었다.

    궁중 악사들의 연주는 그야말로 완벽.

    여러 번 합을 맞춰 본 이들답게 그들은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감미롭기 그지없는 무곡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추어 둘씩 짝을 지은 사람들이 춤을 추는 상황.

    티스베 역시 논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익숙하다 못해 눈 감고도 출 수 있는 왈츠를 추는 중이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킬리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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