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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0화 (20/121)

20화

그렇잖아도 불안한 마음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도 문제인데. 자꾸 그의 바람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니 불안이 가중되지 않을 수가.

감은 눈꺼풀 너머, 며칠 전 티스베를 집으로 바래다주었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늘 그렇듯 소어는 경청하고, 티스베가 주로 떠드는 식의 대화가 이어지다, 내릴 즈음에 티스베는 이렇게 스치듯 말했었다.

-소어는 늘 다정하네요. 당신과 만나게 될 사람은 참 좋을 것 같아요.

그건 아마도 저도 모르게 풀어진 마음 사이로 튀어나온 진심의 소리였으리라. 뱉고 나서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 내내 부드러웠던 표정이 조금 굳어졌으니, 그의 가정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티스베가 말을 수습하는 것보다 소어가 묻는 것이 빨랐다.

-만나게 될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말 그대로 당신과 만나는 사람들이요. 소어는 모두에게 다정하잖아요? 지난 번 살롱에서도 당신 인기가 상당하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제가 다 으쓱했다니까요.

티스베는 아주 유연하게 상황을 모면했지만, 소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든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티스베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티스베를 바라왔던 그였기에 알고 있었다.

티스베는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꼭 그만큼 이 세계에는 정을 두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마치 여기는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처럼, 혹은 이곳의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언제나 소어를 살갑게 챙기지만 정작 단 한 번도 미래를 기약하는 말은 한 적 없던 그의 약혼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웃을 때면 가늘어진 입술 사이 드러나는 흰 치열이 고르고, 가장 안온한 봄볕으로 엮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매가 아름다운.

손에 잡힐 거리에서 단 한 번도 손에 잡혀 주지 않는 사람.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부나방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멈출 수가 없어 괴롭지만.

그래도 마냥 낙담할 것은 없다.

‘표적 두 개만 처리하면 된다.’

그러면 티스베를 조롱할 수 있는 이도, 티스베를 위협할 수 있는 이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이 마음을 고백해도 될까.

신탁의 아이가 사실 누가 되었든, 제게 있어 성녀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오직 티스베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를 알게 된 이래로 제 시선은 오직 티스베만을 쫓았다는 것을…….

그때는 말해도 되는 걸까.

소어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서로 털을 골라주는 사이 좋은 비둘기 한 쌍이 보였다.

티스베가 부부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비둘기들이었다.

‘티스베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스스럼없었겠지.’

자신은 어쩐지 그런 말을 적자니 못내 민망해져서 결국 적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들의 사소한 차이는 그런 것에서 늘 드러났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소어는 티스베를 사랑했지만.

‘티스베는…….’

소어는 눈을 감은 채 잠시 인상을 썼다가, 몸을 일으켰다. 피로가 물든 눈매가 유난히 음울해 보였다.

무슨 고민이 되었든, 우선은 고지를 밟은 뒤에 해야 했다.

“라스, 집사에게 가서 부토니에를 준비해 두라 일러라.”

소어는 계획을 감행하기로 했다.

물론, 조디악의 숨은 실세라 불리는 닻별-카시오페이아-가 사실 티스베이며, 조디악의 길드장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그녀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상태였다.

***

그로부터 이틀 뒤.

티스베는 조급한 걸음으로 황궁의 홀을 가로지르며 물었다.

“오늘 네가 지켜야 할 게 한 명이 더 있다고?”

“예. 물병이 제게 부탁하더군요. 사촌 동생이 위험할 수 있으니 좀 지켜봐 달라고.”

티스베의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마흘론이 대답했다. 그는 오늘도 목을 덮는 곱슬머리를 꽁지로 묶은 상태였는데, 덕분에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통수에 뾰족 튀어나온 꽁지가 씰룩씰룩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뒤에서 볼 때나 가능한 얘기기에, 지금의 티스베는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티스베는 치마를 두 손에 가득 올려 잡고 거의 뛰다시피 해 걷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어가 기다리겠어!!”

약속 시간에 늦었기 때문이다.

파티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대개 짝을 지어 들어가고, 특히 약혼 관계일 때 상대방과 짝을 지어 입장하지 않는다면 파혼하자는 얘기로 받아들일 만큼 파티장 입장은 사교계 파티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필 티스베가 며칠 전 의상실에 맡겨 둔 옷이 오늘 늦게서야 오는 바람에 아주 제대로 늦어 버렸다.

즉 이 말은 소어가 황궁에서 오지 않는 티스베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뜻이 되기도 한다.

무거운 드레스를 잔뜩 움켜쥐고 뛰느라 헉헉대는 티스베의 옆에서, 얄미울 정도로 쌩쌩한 마흘론이 겅중겅중 그녀를 따라가며 이죽거렸다.

“기다리기는 한참 전부터 기다렸겠죠. 벌써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거 아십니까?”

“조용히 해! 알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미안해 죽겠는데.”

티스베가 평소답지 않게 버럭 짜증을 내자, 마흘론이 낄낄대고 웃었다.

“어쨌든요, 그래서 제가 완벽하게 표적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래, 에스텔이라도 잘 봐 둬. 표적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뭘?”

“물병 놈 사촌 동생이 그 새로 공표된 성녀라는 사실이요?”

겅중겅중 뛰던 마흘론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옆에서 뛰던 티스베가 점차 속도를 늦춘 까닭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 봤다가, 되물었다.

“……내가 그걸 말했어?”

“아마도요? 조디악에서 누가 입을 연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냥…… 음, 별들은 언제나 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별들은 언제나 당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티스베가 조디악의 슬로건을 읊어 주자, 마흘론은 그제야 미간을 풀었다.

“누가 발설한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깜짝 놀랐네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흘론의 말에, 티스베가 고개를 끄덕이자 티스베의 옆에서 내내 뛰던 마흘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니, 회색 그림자에 녹아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는 자신의 능력인 ‘암영’을 이용해 그림자에 숨어 먼저 연회장에 침투해 있기로 했다.

다만 들킬 것을 주의해 계속 그림자로 있지는 말고,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 가며 은신할 것.

그것이 티스베가 내린 명령이었다.

마흘론이 그림자에 섞여 사라지자, 그쪽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티스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뛰느라 정신없어서 원작 설정을 얘기해 버렸네.’

그나마 마흘론이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조디악의 간부, 물병자리의 수호를 받는 이가 에스텔의 사촌 오빠라는 것.

그것은 책을 읽은 티스베는 이미 알고 있지만 칼릭스트 공녀에 불과한 그녀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에스텔이 사촌 오빠를 통해서 조디악을 알게 되니까.’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정신없는 와중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사실 그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점점 책의 기억과 내가 살면서 생긴 기억이 섞이는 게 느껴져.’

환생 직후에는 이전 삶의 기억들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아마 아이와 어른의 몸이라는 괴리감 때문이었을까.

이번 생의 나보다는 이전 생의 내가 좀더 ‘나’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 삶의 기억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잊혀져갔다. 자신이 어떤 가족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등.

그 와중 선명한 것은 오직 <괴물꽃> 뿐이었다.

‘마치 현재 몸담은 세계와 관련이 없는 정보들은 전부 지워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지.’

때문에 지금 티스베는 책의 내용을 제외하면 이전 삶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괴물꽃>과 같은 사건, 같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겹칠수록 점점 책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를 자기도 모르게 발설하는 것 역시 그런 현상의 일부였다.

‘책의 내용과 지금 상황이 꽤 달라져서 더 뒤죽박죽인 것도 있고.’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여도, 자잘한 것들은 바뀌었다.

당장 에스텔만 해도 칼릭스트의 이름을 얻어내지 못하고 ‘드 칼릭스트’에서 그치지 않았는가.

‘이런 변화를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냐.’

티스베라는 인물이 바뀌었으니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그러니 티스베가 오늘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원작은 내 알 바 아니고, 무조건 망명을 사수한다!’

루넷 영식도 지키고, 에스텔한테 성녀 역할도 넘기고!

나한테 살인 혐의를 만들어 준 그 개…… 아니 아무튼 범인도 잡는다!

티스베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무엇일지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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