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흐음…….”
티스베는 손 안에서 펜대를 몇 번 굴리다, 회신을 적었다.
[에스텔 양이 나를 싫어한다는 소문이라도 있나요?]
답장은 곧장 왔다. 아니, 사과가 곧장 왔다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티스베. 아무래도 제 질문이 오해를 만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그런 소문은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그간 겪어 온 일들이 있어 노파심에 여쭈었습니다.]
아하.
티스베는 그제야 소어의 질문을 이해했다. 그간 하도 외부의 비난에 시달렸더니, 소어가 덩달아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긴, 겉으로 보자면 에스텔과 나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일 테니까.’
서로가 서로의 견제 상대인 관계.
같은 성녀라는 이름 아래 묶인 것도 모자라, 같은 가문에 묶이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에스텔은 정말 착한데.’
단순히 여주인공이라서 착한 것뿐만 아니라, 에스텔의 선한 심성이 이후 세상을 구하는 데 가장 큰 열쇠가 되기 때문에 그녀는 필연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다소 순박하고, 그만큼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면도 있지만 선하고 정의롭다. 그게 책 속에서 나온 에스텔의 설명이었다.
아마 선한 걸로만 따지자면 소어와 버금가지 않을까?
‘마나로 느껴지는 소어의 감정도 그리 특별한 건 없으니 정말로 걱정해서 물었던 것 같고.’
그래서 티스베는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적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에스텔 양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것은 소어를 향한 신뢰뿐 아니라, 자신의 마나가 전해 주는 소어의 감정을 읽었기에 나온 대답이었다.
소어가 만약 에스텔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다른 대답을 했겠지만, 그녀의 마나는 소어가 평탄한 상태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티스베가 미처 알지 못한 점이 있었다.
대개의 시간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이란, 대부분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처럼 나쁜 쪽으로 크게 기울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가면을, 그러니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건 비단 일정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로 국한되지 않는다.
상태는 심리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심리 기복도 일정 이하로 줄여야 한다.
때문에 그들의 심리 상태는 대체로 깊은 호수 같아서, 돌이 던져져도 잠깐 파동이 일 뿐 크게 출렁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감정만으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란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상대방이 상냥한 낯을 쓰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면, 단순히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해서 그 속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하여, 살바토르 공작저의 응접실 안.
“좋은 사람이라.”
소식지를 내려다보는 소어의 시선이 차가웠다.
물론 그게 티스베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펜촉을 잉크병에 담갔다 뺐다.
날카로운 글씨체가 막힘없이 적혔다.
[티스베, 저는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따릅니다. 하지만 모든 배신은 웃는 낯을 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소어의 말을 이해한다는, 상냥한 티스베다운 대답이었다.
[무얼 염려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소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날 믿어요.]
그녀는 너무나 상냥해서, 소어뿐만 아니라 에스텔 또한 조금도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소어는 그 상냥함을 탓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티스베의 상냥함을 사랑했으므로.
그러나 그녀가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마음이 조금 아플 뿐이다.
‘내 성녀님께서는 너무 마음이 여리시니.’
별수 없지.
소어는 펜을 들어, 대답을 적었다.
[물론입니다, 티스베.]
당신이 가는 모든 길에 있는 방해물은 제가 치울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문장의 끝에 잉크가 점을 남겼다. 그 뒤로 간단한 인사가 오고가고, 필담은 끝이 났다.
오고 간 필담이 꼭 백사장 위에 적은 낙서 같다. 몇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
소어는 뜻 모를 시선으로 티스베와 나눈 필담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라스.”
“말씀하십시오.”
짤막한 부름에, 집무실 한쪽에서 서류를 정리 중이었던 라스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소어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라스를 향했다가, 도로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표적이 늘어난 것 같다.”
그 말에, 라스가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나누는 ‘명령어’에는 몇 가지 함의가 있었는데, 개중 하나가 표적에 대한 것이었다.
표적의 수가 늘었을 때, 이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표적이 ‘추가되었다’고 하는 것.
그건 기존의 표적과 추가된 표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쓰는 말이었다.
한편 표적이 ‘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였다.
“표적을 동시 처리하시려는 겁니까?”
“근 시일 내에 아주 좋은 기회가 있는데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 있나?”
내일 모레 있을,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
소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라스는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더 해서 주인의 한심한 시선을 받는 대신 좀 더 현실적인 지적을 꺼냈다.
“황궁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으면 발각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목표가 표적의 완전한 암살과 은폐였더라면 또 몰라도, 소어의 목표는 모두가 표적의 죽음을 알게끔 하는 것이니 얘기가 달랐다.
한 명까지야 어떻게 해 볼 수 있겠다지만, 두 명씩이나? 그것도 황궁에서?
아무리 라스라고 해도, 아무리 살바토르라고 해도 무리다.
“발각되는 건 염려 마라. 이번에도 조디악의 길드장이 분명 붙어 있을 테니. 그리고 네가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다만, 이번에는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표적이 ‘늘었다’고만 하시니 제가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설명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 놀린 건 생각 않나?”
그것도 반박할 길 없는 말이라, 라스는 입을 닫았다. 소어는 굳이 더 질책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방해물을 치우는 데 시야를 가리는 암막이 있다면 응당 그부터 치워야지.”
이번 목표는 조디악의 길드장이다.
소어의 말이 떨어지자, 라스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했다.
“황궁의 연회에 조디악의 길드장이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황궁의 연회처럼 노려지기 쉬운 곳에 가면서, 표적에 그만한 호위조차 붙이지 않으려고? 분명 온다. 누군가의 호위나 시종으로 위장할 가능성이 크겠지.”
다른 상황이라면 그림자에 숨어서 올 수도 있겠지만, 라스에게 한 번 들킨 전적이 있으니 뻔히 같은 방법을 쓰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으니.”
조디악의 길드장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소어가 소식지 옆에 놓인 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에스텔의 초상화가 왼쪽 상단에 그려진, 그녀의 정보를 담은 종이였다.
이것은 그녀가 진짜 성녀라는 게 밝혀진 뒤, 소어가 라스를 시켜 얼마 전 받아 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에스텔의 가족 관계를 비롯해 친구 관계 등이 전부 적혀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에스텔의 사촌 남자 형제에 관한 부분.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물병자리의 가호]
이는 단순히 그가 물병자리에 속하는 생일을 타고났다는 뜻이 아니다.
“조디악의 간부에게 딸린 사촌 동생이 하루아침에 성녀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소어가 조소하며 말했다.
대륙에 하나뿐인 S급 정보길드, 조디악.
그 이름은 황도 12궁 별자리를 모아 일컫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여 그들 사이의 직책이나 명칭 또한 성좌의 이름을 빌려 쓴다.
현재 알려져 있는 별칭은 각각 이렇다.
조디악의 수장은 소웅성.
마찬가지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소웅성의 주인이자 조디악의 실세에게 주어진 별칭은 카시오페이아, 닻별이고.
그 아래 간부 12명에게는 각기 황도 12궁의 별자리가 하나씩 주어진다.
개중에서도 에스텔의 사촌이 받은 별자리는 물병자리.
‘티스베는 에스텔이 위험하지 않다고 했지만.’
조디악의 간부를 친인척으로 둔 이가 어떻게 위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잖아도 티스베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그저 조금 운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가져가 버린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거슬렸다.
‘거기에 이제는 칼릭스트까지 침투하다니.’
그간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내버려 뒀건만, 오늘 티스베와의 대화로 확신이 섰다. 에스텔은 존재 자체가 티스베에게 있어 위협이다.
소어는 다소 피곤한 기분에, 눈두덩을 손끝으로 누르며 눈을 내리감았다.
‘내가 바라는 게 그리 큰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 누구도 티스베를 위협할 수 없는, 아주 안온하고 행복한 온실을 만들고자 하는 제 바람이.
그래서 이 생활에 티스베가 만족해 제 곁을 떠날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는 그런 환경을 바라는 마음이 분명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닐 텐데.
왜 매번 제 바람은 번번이 방해 받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