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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8화 (18/121)

18화

늦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티스베는 어젯밤 하지 못했던 것들을 했다. 개중 하나는 소어에게 편지 보내기였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잘 들어갔나요, 소어? 바래다줘서 고마웠어요. 어제 돌아오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어 버렸지 뭐예요. 혹시라도 편지를 기다렸을까 봐 서둘러 연락 남겨요. 좋은 하루 보내요.]

미리 변명하지만, 평소에는 이보다 훨씬 길게 쓴다. 그렇게 쓸 계획이 없었다고는 해도 편지글이라는 게 혼자 대화하듯이 쓴다고 가정하면 자꾸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소어가 기다렸을까 봐 급히 연락을 남긴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글은 다소 간략했다.

‘편지 답장이 온 모양이네.’

어딘지 즐거운 기분이 되어, 티스베는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소식지를 당겨 왔다.

소식지에 손이 닿으면 종이에 감도는 마나가 티스베의 것과 맞물려 부유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테지만, 마나가 고도로 발달한 티스베는 이런 자잘한 부분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나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해봐야 평소에는 별로 쓸 데가 없지만.’

마도구나 성물 같은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만약 그런 사람이나 물건을 만난다면 티스베의 마나 감지 능력은 꽤 쓸 만해진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 말이다.

‘소식지도 일종의 마도구니까.’

마나를 주입해 만들어 낸 도구이니 신전에서 파는 마도구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반적인 사용자들에게 이 소식지는 단순히 글씨를 전달해 주는 도구에 불과했겠지만, 티스베는 고도로 발달한 마나 감지 능력을 이용해, 소식지의 진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마나의 기억도 얼추 느낄 수 있다는 거지.’

즉, 상대방이 편지를 썼을 때의 감정이나 상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티스베는 가볍게 숨을 고르고, 소식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소어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티스베. 간밤이 편안하셨길 바라겠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드신 듯하여 편지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만, 혹 다른 일이 있으셨을까 조금 염려하였습니다. 짧게나마 연락 남겨 주셔서 기쁩니다.]

마나를 불어넣은 채 글을 읽어 내려가던 티스베는 그 문단에서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소어.”

기다렸으면서.

하지만 기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지, 잉크에 담긴 마나는 확연한 안도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말마따나 늘 연락하던 티스베가 연락도 없이 하룻밤을 보냈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혹 제가 기분 상하게 한 건 없을까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편지를 기다렸다고 하면 티스베에게 부담이 갔을 테니, 소어는 최선의 배려를 했으리라.

‘정말 착한 사람이라니까.’

티스베는 마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후로 갈수록, 불안과 안도에 대한 감정은 줄어들고 순수한 기쁨과 호의가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급히 소식을 남긴 티스베와 달리 소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긴 편지를 남겨 주었기에, 내용 역시 자잘하고 많았다.

예를 들자면 어제 경매장에서 보았던 반지를 정말로 갖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소어는 반지의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티스베의 눈 색과 흡사하여, 만약 티스베가 반지를 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밖에 창 밖에 비둘기가 두 마리나 앉아 있었다는 등의 사소한 몇 가지가 더 쓰이고, 마지막에는 짤막하게 용건이 있었다.

[내일 모레 황궁에서 연회가 있음을 기억하십니까? 생각해 보니 티스베의 드레스 코드를 듣지 못한 듯하여, 서면으로나마 여쭙고자 합니다. 직접 여쭙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간략하게나마 글 남겨 주시면 바로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다른 글과 다를 바 없이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글이었다.

소어와 티스베는 약혼한 사이이기 때문에 파티에 갈 때도 함께 입장하고, 드레스 코드를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매번 만나서 묻곤 했는데.’

이번에는 살인 사건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못 물어봤었다. 아니, 그걸 물어야 한다는 것조차 거의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소어가 아니었으면 이대로 파티 날을 맞았을지도.

‘의상을 맞출 시간이 그리 없으니, 최대한 빨리 답장해 줘야겠네.’

티스베는 곧장 소식지를 내려놓고 잉크병을 땄다.

퐁, 잉크에 펜촉 잠기는 소리 이후 깃펜이 사각거리며 소식지 위를 갈랐다.

[드레스 코드는 날카로운 것. 눈 색과 반지의 보석 색을 맞추는 건 요즘 유행인가요? 비둘기는 부부일지도.]

편지와 달리 짤막한 답변들이었다. 편지글에 대한 답변이나 감상 등을 전할 때 종종 쓰는 방식.

티스베가 펜을 놓고 일어나려는데, 그 밑에 곧장 무언가 적히기 시작했다.

당장 인쇄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각지고 반듯한 글씨.

당연하지만 소어였다.

[날카로운 것, 알겠습니다. 저는 유행에 기민하지 못해 변변한 답변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비둘기가 부부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서로 털을 골라 주더군요.]

소식지가 글씨를 즉각적으로 전달한다는 이점을 이용해, 가끔 시기가 맞으면 이렇게 곧바로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마나를 불어넣어 보면, 왠지 발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어는 답장을 받아서 기뻤던 걸까?

티스베는 내려놓으려던 펜을 다시 잉크병에 담갔다.

[날카로운 의상은 준비가 되었나요? 유행에 기민하지 않다기엔 늘 잘 차려입는 것 같던데. 비둘기들 사이가 좋았다고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을 거예요.]

[살바토르 인장을 본떠 만든 부토니에는 검 모양입니다. 제 옷차림이 나쁘지 않았던 건 제 옷을 골라 주는 집사가 유행에 기민한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앞선 두 답변에 반해, 비둘기에 대한 답변은 잠시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적기를 주저하는 듯.

잠깐의 공백 이후 글씨가 소식지에 올라왔다.

[오늘 하루 특별한 일은 없으셨는지.]

아주 대놓고 화제를 돌리는 말이었다. 티스베는 흐음, 하고 반듯한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마나를 주입해 봐도, 민망해하거나 주저하는 듯한 감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둘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티스베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이렇게 실시간으로 필담을 주고받는 상황에서는 그녀의 공백이 고스란히 소어에게도 전달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춤을 출 때 검에 베이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집사에게 봉급을 조금 더 얹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요. 특별한 일은 딱히 없고, 조금 전 성녀 에스텔 양이 공저에 방문했어요. 마찬가지로 내일 모레 파티 때문에.]

[제 검은 어느 것도 당신을 벨 수 없으니 안심하시길. 제 집사가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께 충성을 바치게 될 것 같군요. 내일 모레 파티와 에스텔 양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구두 굽은 무엇이든 당신 발등을 공격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당신 집사가 내게 충성을 바치거든 첫 번째 명령은 당신을 배신하지 말라는 걸로 내리겠어요. 에스텔 양이 칼릭스트의 비호를 받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티스베가 원하신다면 제 발등을 카펫 삼으셔도 좋습니다. 집사에게 칼 맞을 일은 없을 테니 잘 되었군요. 그런데 혹, 에스텔 양이 당신을 적대시하진 않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소어가 보낸 마지막 물음에, 앞에서 나눴던 사소한 잡담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

‘에스텔이, 나를 적대시하진 않았느냐고?’

이건 무슨 뜻이지?

답장을 적기 전, 티스베는 생각을 되짚었다. 그녀가 조금 전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 마차로 갔을 때부터, 에스텔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전까지 모조리.

에스텔은 책 속에서 보던 대로 사랑스럽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물론, 몇 마디 안 되는 에스텔의 목소리에서 짐작한 부분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게 티스베의 입장이었던 이유도 있고.

‘그 얘기가 좀 충격이었던 건지.’

에스텔이 왜 마차 안에서 내내 기다려야 했는지 알려 주자 그녀는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칼릭스트에 입적되는 것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그것 때문에 칼릭스트 공작과 외숙부가 싸우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둘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티스베가 왔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던 건지.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그때 이후로 에스텔이 줄곧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입을 열질 않으니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돌이켜보자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적대시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인데.

그러고 보니 에스텔이 책 속에서 티스베를 어떻게 생각했더라. 티스베는 악녀였고 에스텔을 미워했으니 둘의 관계가 나빴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티스베의 악행을 제외한다면?

에스텔은 티스베를 어떻게 보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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