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절대 망명해.’
내 밝은 미래는 오직 세이즈에 있다! 칼릭스트? 알아서 하라지!
티스베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생각 만반이었지만, 그런 티스베의 생각을 알마스가 알 리 없었다.
덕분에 그에게 티스베의 차분하고 자애로운 미소는, 그저 그의 바람이 욕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아.’
그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성녀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알마스는 그제야 티스베가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티스베는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 있었던 것이다.
처음 자신이 티스베의 가정교사를 초빙할 때 바랐던 것처럼, 신탁의 이름 없이도 모두의 선망을 받아 낼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늘 어리게만 보았더니. 언제 이렇게 큰 건지.’
알마스는 코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다른 이였더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래, 너도 다 컸구나! 더는 널 아이처럼 보호하려 애쓰지 않으마!”하고 선뜻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티스베가 원한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일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알마스였다.
‘나도 그랬지. 저 나이 때는 다 자란 줄 알고 도움이 필요 없다고 선두로 나섰어.’
하지만 그 결과 늘어나는 건 상처와 외로움뿐이었다.
알마스는 그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다 자랐다고는 해도 역시 아직은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할 테지.’
걱정 마라, 이 할애비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마.
아들에 이어 하나뿐인 손녀딸까지 상처입는 것을 볼 수는 없다고, 알마스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간 티스베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결정을 내리니 후련하기까지 하군.’
내 손녀딸, 티스베는 절대로 지킨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알마스의 인생 2회차 손녀딸은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생각뿐이었으니까.
‘내가 망명을 위해 얼마나 준비해 왔는데 고작 여기서 발목이 잡힐 순 없지.’
마흘론, 내 망명이 어렵겠다고?
뭘 모르는 소리!
티스베는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물론 할아버지도 마냥 냉혈한은 아니니까, 내가 마음에 걸리실 수 있겠지.’
세간의 보는 눈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게 마음에 걸린다면, 내가 나서서 마음의 가시를 없애주면 그만이다.
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후련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좀 보라.
분명 할아버지도 이런 결말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티스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를 정말 아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알마스는 손녀를 마지막까지 챙겼으며, 마지못해 성녀를 입적했다는 그럴싸한 체면치레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
아마 그걸 위해서 이렇게 강경하게 나왔던 것이겠지.
이제 알마스는 에스텔에게 마지못하는 척 칼릭스트의 이름을 주겠다고 하면 된다.
“……알겠다. 티스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일레르 양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수여하겠다.”
그래, 이렇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가주님!”
질레트 백작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티스베 역시 그에 긍정의 한 마디를 보태려는 순간, 알마스가 말을 이었다.
“섣불리 기뻐하지 말게, 백작. 내가 허락하는 칼릭스트의 이름은 ‘드 칼릭스트’이니.”
그 말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설핏 굳어들었다.
드 칼릭스트.
해석하자면 ‘칼릭스트의’, 혹은, ‘칼릭스트에 의한’ 정도의 뜻이 된다.
이것을 이름에 붙이겠다는 건 곧 이런 얘기가 된다.
“칼릭스트의 이름을 수여하는 것은 일레르 영애를 비호하기로 한 이상 감내할 절차였다만, 그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칼릭스트의 이름 아래 있으나, 칼릭스트의 일원으로는 받아 주지 않겠다는 뜻.
명분이 필요하다면 이름은 내어 주겠지만, 여전히 입적은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티스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아직도 챙길 체면이 남아 있는 건가?’
이건 계산 밖이었다.
원래 티스베의 계획대로라면 알마스가 마지못하는 척 에스텔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수여하고, 이 기세를 몰아 에스텔이 칼릭스트에 입적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그대로 찬밥 신세가 되어 룰루랄라 망명을 떠나는 거고.
‘그런데 드 칼릭스트라니.’
물론 이대로도 충분히 원작을 유지할 수 있기는 했다.
에스텔을 굳이 데려온 것이 무쓸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스텔이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세간의 관심이 나에서 에스텔로 넘어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
하지만 벌써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이 망명 계획, 정말 괜찮은 걸까?
‘설마 이대로 할아버지가 에스텔을 입적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알마스가 갑자기 티스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솟아나지 않는 한은.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다.
만약 에스텔 본인이 입적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은 절대!
그럴 일이 없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가정인 거지.’
티스베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잠깐 든 의구심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내 버렸다.
그렇게 동상이몽의 현장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그 바람에 티스베가 놓치고 만 것이 하나 있었으니.
‘내가, 칼릭스트가 되면 공녀님의 자리를 뺏게 되는 거구나.’
바로, 그녀의 한 발짝 뒤에서 진홍색 눈을 단 한 순간도 티스베에게서 떼지 않고 있던.
에스텔의 존재였다.
* * *
에스텔이 진짜 성녀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변화를 제일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에스텔일 터였다.
왜냐하면.
‘나는 딱히 달라진 게 없는걸.’
물론 에스텔이 머물고 있는 질레트 백작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으로 대문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에스텔에게 오는 초대장으로 책도 한 권 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거라. 네 신분이 악용되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이유로 에스텔은 초대장을 한 번 뜯어보지도 못하고 집에 콕 박혀 있는 나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텔이 오늘 티스베와의 만남을 더 기다렸던 것도 있었다.
정말 간만의 외출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난 들뜨기만 했을 뿐, 공녀님이 무슨 상황일지는 조금도 몰랐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자 찬물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자리가 티스베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자리였다는 걸 알았다면 그토록 들뜨지는 못했을 텐데.
‘공녀님은 내게 정말 상냥하게 대해 주셨는데…….’
정작 자신은 티스베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니.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
에스텔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티스베를 떠올렸다.
자신의 행동이 본인의 목을 조이게 될 걸 알면서도 한 치 흔들림이 없었던 그 표정.
-에스텔, 당신은 성녀예요. 그에 걸맞은 자리를 누릴 때가 된 거죠.
-그, 그러면 공녀님은요?
-나도 내게 알맞은 자리를 찾아가겠죠. 난 걱정하지 말아요.
티스베는 말했다.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합리적으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나라면 내가 너무 미웠을 텐데…….’
에스텔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비어 있는 손이지만, 아직도 티스베와 손을 맞잡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조금은 낯설고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에스텔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다,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내가 그분의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티스베의 망명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조용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 * *
한편.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겠군.’
티스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 질레트 백작과 에스텔이 칼릭스트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고, 그제야 티스베는 소란에서 벗어났다.
‘별것도 안 했는데 피곤한 기분이란 말이지.’
그녀는 자신이 준 돈을 들고 시내로 나간 하녀가 돌아오거든 자신과 함께 나갔다고 말을 맞추게끔 전언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소란에 휘말리느라 밀린 일정을 마저 소화해야 했다.
‘일정이라고는 해 봐야 두 가지밖에 없지만.’
마흘론과 이후 계획을 짜는 것.
그리고 마도서를 읽는 것.
우선 마흘론과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더 중요하니 그것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았는데, 티스베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소어?”
바로, 책상에 올려둔 소식지에 글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