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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6화 (16/121)

16화

그날 티스베가 나눈 대화는 알마스에게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그것은 비단 티스베의 생각에 대한 충격뿐이 아니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

과연 나는, 정말로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아이가 나를 싫어할 거라는 막연한 말로 아이를 보살피는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제 자식인 아들을 키울 때도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 때문에, 손녀딸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적은 없었나…….

알마스는 이미 그 모든 자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외면해 온 손녀딸이 막연히 두려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손녀딸이 언젠가 자신을 떠날 날이.

아내는 오래 전 병으로 죽었다. 하나뿐인 아들 부부마저 사고로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미 상실이 익숙했다.

그런데 하나 남은 손녀딸마저 자신을 떠나게 된다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가문이, 겨우 손녀딸 하나 지키지 못하는 가주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백작.”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분투한 삶이 되는가.

그날 그 사건 이후로도 알마스는 티스베에게 다정히 대해 주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내내 무관심했던 자신이 티스베에게 갑자기 관심을 내보이면 티스베의 성격 상 오히려 자신을 더 어려워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여전히, 그는 좋은 양육자가 될 자신이 없었기에.

다행히 좋은 양육자 없이도 티스베는 잘 자랐다.

신탁의 아이라는 명예가 없어도, 티스베는 알마스가 처음 의도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알마스는 좋은 양육자가 될 자신은 없어도 좋은 보호자만큼은 되어 줄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알마스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붙잡는 질레트 백작의 손을 매정히 뿌리쳤다.

“당분간 티스베의 지위를 위협할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네. 그러니 자네도 이만 돌아가게. 나는 일레르 영애와 만나 볼 생각이 없으니.”

“……가주님.”

“티스베는 내게 하나 남은 손녀딸일세. 자네도 자식을 둔 아버지이지 않나. 장로들에게는 권하지 못해도, 자네라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겠네.”

질레트 백작, 그 충성스러운 칼릭스트의 가신은 알마스의 말에 조금 결연해진 눈빛을 했다. 말마따나 그 역시 아버지였기에.

“가주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라는 말이 질레트 백작의 입에서 나오려던 훈훈한 순간.

벌컥!

저택의 문이 열리고, 하오의 햇살이 저택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두 명의 여자.

그 두 사람을 본 순간, 알마스는 생전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말을 속으로 내뱉었다.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그런 알마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스베가 활짝 웃으며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손님도 함께요.

티스베의 말에 알마스의 머릿속에서는 종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두 번째 시련을 주겠노라는, 뭐 그런 종 말이다.

‘하필…… 이럴 때.’

하필 이럴 때 돌아오다니. 이 끈질긴 가신을 겨우 다 설득해 놓은 참이었는데!

알마스가 굳이 오늘 티스베를 밖으로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질레트 백작은 가신들 중에서도 꽤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데다, 에스텔의 외숙인 덕분에 그는 이번 문제-에스텔을 입적시키는 것-에 대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명예와 이득에 눈이 먼 장로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정에 호소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마스는 일부러 티스베를 외출시켜 놓고, 질레트 백작을 잘 구워삶아서 이번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지가 눈앞에 놓인 순간 티스베가 돌아왔다.

그것도, 에스텔을 데리고!

체념에 가까웠던 질레트 백작의 눈에 희망이라는 글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마스는 단계별로 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질레트 백작이 반색을 하며 티스베에게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어찌 에스텔과 함께 돌아오시는지…….”

“안녕하세요, 질레트 백작. 외출을 갔다 돌아오는데 낯선 마차가 있더군요.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기에 잠깐 참견 좀 했습니다.”

혹 무례는 아니었겠지요?

하고 티스베가 우아하게 묻자, 질레트 백작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에스텔도 공녀님을 많이 만나 뵙고 싶어 했답니다. 그렇지 않으냐, 에스텔?”

질레트 백작의 물음에 에스텔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대답은 이 대화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다.

티스베는 일부러 눈에 보이도록 에스텔의 손에 깍지를 끼며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스텔 양과 이야기는 오면서 이미 나누었답니다. 오늘 이 저택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도요. 하여 제가 에스텔 양을 데려오면 백작께서 언짢으실까 걱정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제가 언짢을 리 있습니까. 다만, 아직 가주님께 에스텔을 데려와도 된다고 허락을 받지 못한 터라…….”

질레트 백작이 말끝을 흐리며 알마스를 돌아보았다. 엉겁결에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알마스는, 민망함과 언짢음이 반씩 섞인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백작의 말이 맞다. 아직 나는 일레르 영애를 손님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그래서 에스텔 양을 저 햇볕 아래 마차에 계속 두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티스베의 반문에, 알마스는 말문이 막혔다. 모두 티스베를 위해서 그런 건데, 정작 티스베에게 꾸중을 듣는 입장이 되자 몹시 겸연쩍어진 것이다.

“칼릭스트가 손님을 맞는 예의는 그렇게 가혹하지 않다고 배웠습니다, 할아버지.”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레르 영애를 칼릭스트 안으로 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거다.”

“에스텔 양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준다는 것 말씀이시죠.”

“그래. 난 용납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에스텔을 들일 생각 또한 없다. 알마스의 강경한 말투에 질레트 백작의 기세가 다시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지만, 티스베는 미동도 없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현명히 대처하실 거라 생각해 이번 일에는 첨언하지 않으려 했지만, 겨우 이런 일로 에스텔 양을 문전박대하셨다면 조금 실망입니다.”

“……뭐라고?”

“어쨌든 에스텔 양을 칼릭스트의 이름으로 비호해야 하는 건 확정된 일이 아닌가요? 파티에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가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티스베는 질레트 백작처럼 곧바로 에스텔을 입적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유예를 두자는 식으로 말했다.

입적은 안 해도 되니까, 어차피 비호해야 하는 일이라면 파티에 에스텔이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가게끔 해 주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무엇보다 이런 일로 여러 사람이 힘든 것도 원치 않습니다. 에스텔 양은 신탁의 아이이고, 그러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어야겠죠.”

그녀의 말은 누구라도 받아들이지 않고는 힘들 만큼 설득력 있었다. 게다가 이 문제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티스베의 말이었기에, 그 영향력 또한 상당했다.

제 이득을 생각해 질레트 백작이 에스텔을 들이라고 하는 것은 꽃병 내리치듯 내리쳐서 끊어 낼 수 있겠지만, 제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에스텔을 들이라고 말하는 티스베를 어떻게 끊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알마스는 그럴 수 없었다.

티스베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그였기에.

그래서, 그는 완강히 거절하는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티스베. 네가 지금 말하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 않을 거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러길 바라는 거냐?”

알마스는 티스베의 입에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이 옳은 길이었다.

비록 티스베와 살가운 사이는 되지 못했어도, 알마스는 티스베를 언제고 지켜보고 있었다.

티스베가 얼마나 악착같이 공부하고 노력했는지. 그만큼 얼마나 욕심이 많고, 또 하고 싶은 게 많은지.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 공부량을 줄이는 게 어떻겠느냐 물어도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언제나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 온 그의 손녀딸을.

그러니 티스베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일 리 없었다.

주변에서 하도 에스텔을 들이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주창하니,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말했다.

“티스베 네가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일평생 남을 위한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왔으니, 이제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하거라.

미처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들이 목 안쪽을 쿡쿡 찔러왔다.

그러나 그런 알마스의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티스베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합리적인 판단을 해 주세요, 할아버지.”

저는 망명할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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