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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4화 (14/121)
  • 14화

    그 사실을 깨닫자 티스베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어쩐지 장로들이 어제 늦게까지 있더라니.’

    원작에서 에스텔은 입적을 앞두고 칼릭스트 공작, 티스베 등과 인사하기 위해 칼릭스트 공저에 한 차례 방문한다.

    칼릭스트 공작은 그다운 무뚝뚝함으로 에스텔을 맞아 주고, 티스베는 당연히 쌀쌀맞게 나온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조금 전, 마흘론과의 통화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것.

    내일 모레 황궁에서 있을, 성녀의 등장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

    이 사건은 그 파티를 위한 전초과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전에 에스텔이 오는 건 당연한 건데.’

    어제 장로들이 난리를 치고 간 것 때문일까. 저 밖의 소란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 버렸다.

    성녀의 등장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 에스텔은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간다.

    그것은 칼릭스트에서 원한 일이기도 했지만, 신탁에 등장하는 가문 이름이 칼릭스트이기 때문에 에스텔로서도 필요한 절차였다.

    ‘칼릭스트의 피를 이어받은 일레르 영애라는 건 모양이 좀 우스우니까.’

    에스텔이 신탁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예 칼릭스트 영애로 확정 짓고 간 셈이다.

    그러나 입적에 필요한 절차가 아직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칼릭스트의 인물들과 친분이라도 간단히 만들어 놓고 가기 위해 에스텔은 칼릭스트 공저로 향했다.

    물론, 에스텔이 나서서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이때의 에스텔은 아직 정치적 이해관계를 잘 모를 때였으니까.’

    질레트 백작이 계획했고, 동행했다.

    그러니 <괴물꽃>의 내용대로라면 지금 에스텔은 마차 안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만지며 앉아 있을 게 아니라, 공저 안에서 칼릭스트 공작과 함께 찻잔을 기울이고 있어야 옳다는 얘기다.

    ‘할아버지와 어느 정도 말을 맞춰야 에스텔이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티스베가 가문에서 버려지는 것에 큰 일조를 해 줄 것이다.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 같은 큰 이벤트에 에스텔이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티스베는 버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질레트 백작을 비롯한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오늘 칼릭스트 공작과 에스텔을 마주 앉혀 놓고 이야기를 시켜야 할 텐데.

    ‘할아버지가 워낙 강경히 나오니 애간장이 탔겠네.’

    이제야 알겠다.

    그렇게 장로와 가신들이 근래 들어 갑자기 유난을 떨던 이유를.

    티스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용인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뒷문을 향했다.

    2층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이 딸린 뒷문은, 지금 상황에서 티스베가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일단은 나도 가문에서 내쳐지는 게 목적이니까…….’

    어디 한 번 도와줘 볼까.

    * * *

    질레트 백작의 마차 안.

    ‘외숙부는 아직이신가.’

    에스텔은 벚꽃색으로 물든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수도에서 상경한 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햇병아리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다니는 대부분의 곳들은 에스텔이 평생 보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 차 있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칼릭스트 공저의 위용이 대단하다고는 들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마차로 40여 분을 달려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거대한 저택. 마차 안에서는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정원이 그를 감싸고 있고, 하물며 저택의 벽마저도 시골 영주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시골 사람에게 대귀족의 저택을 보여 주고 황궁이라고 속이는 장난이 있다고 들었을 때는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칼릭스트 공저에 왔다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위용이었다.

    그러나 에스텔이 떨려 하는 이유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이 이유가 실질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칼릭스트 공녀님과 티타임을 가질 수 있다니.’

    바로 티스베를 다시 만난다는 것.

    이 사실 때문에 에스텔은 질레트 백작에게 오늘 칼릭스트 공저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설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냥터에서의 그 일 이후로 줄곧 다시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콩콩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이대로라면 분명 티스베를 다시 만났을 때 고스란히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티스베는 에스텔의 오랜 우상이었으므로.

    에스텔은 ‘칼릭스트의 어린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세대였던 것이다.

    비단 에스텔뿐만이 아니라, 사실 많은 제국민들은 티스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특히나 어리고 의젓한데다, 영특하기까지 한 성녀는 많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귀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국의 많은 아이들은,

    -너 이렇게 떼만 쓰고 그러면 혼난다! 칼릭스트의 성녀님은 너랑 동갑인데도 그렇게 의젓하시다더라!

    ……과 같은 꾸지람을 듣고 자라기 일쑤였던 것이다.

    게다가 에스텔은 칼릭스트의 방계라는 특징 때문에 부모님 세대의 입에서도 자주 티스베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성녀님께서 이번 춘궁기에 신전의 금고를 풀도록 건의하셨다더군. 굶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라면서.

    -아마 공작 각하께서 시키신 거겠지요.

    -어쨌든 풀린 금고에서 제일 많은 몫이 떨어지는 건 칼릭스트 공작령이 될 테니, 우리에겐 잘 된 일이지.

    -그 어린 성녀님께는 많은 은혜를 입고 사는 것 같네요.

    제국에서 티스베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땅은 칼릭스트령이고, 에스텔은 칼릭스트령 출신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티스베에 대한 막연한 애정과 친밀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전 그런 에스텔의 마음에 불을 활활 지핀 사건까지 생겨 버렸던 것이다.

    -에스텔, 정말 대단해요. 덕분에 우리 모두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군요.

    사냥터에서 그렇게 말하며 제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티스베를 본 순간.

    에스텔은 깨닫고 만 것이다.

    아.

    이분이 나의 성녀님이시구나.

    그 뒤로 열렬한 티스베의 추종자가 되어 다시 만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기회가 생겼으니 심장이 뛰지 않을 수가 있나.

    다만 외숙부가 칼릭스트 공작께 허락을 구하고 오겠다며 들어간 이후로 통 돌아오질 않아, 에스텔은 괜히 머리나 꼬는 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기도 몇 번.

    에스텔은 결국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래, 기다리는 데에만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을 진정시키자.’

    이런 상태로 공녀님을 뵌다면 분명 시골뜨기처럼 낯을 붉히고 말 게 분명했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손을 잡아도 되는지 묻는 무례를 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자.

    나도 공녀님처럼 우아하고 멋있는 모습이 될 수 있다.

    될 수 있다.

    에스텔이 눈을 감고 되뇌고 있는데, 창문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외숙부가 돌아오신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뜨자,

    “어, 안 자는구나?”

    “꺄악!”

    꿈에서나 그리던 인물이 차창 너머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백발에 가까운 몽환적인 은발에, 햇살 아래서 더욱 반짝이는 금안. 묘하게 시니컬한 표정과 어딘지 관조적인 느낌이 드는 인상까지.

    “고, 공녀님!”

    에스텔이 비명에 가까운 부름을 외치자, 차창 밖의 티스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혹시 놀라게 했나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너무 좋아서…….”

    그 말에 방금 티스베의 표정이 ‘내가 뭘 들은 거지?’가 되었다가 ‘음, 아니겠지.’로 바뀐 것 같은 건 아마 에스텔의 혼몽한 기분 탓일 것이다.

    어쨌든 티스베가 이후에 내뱉은 건 ‘좋아서’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느슨하게 미소 지은 티스베가 상냥히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마차 문을 열어도 될까요?”

    “물론, 물론이에요.”

    에스텔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세차게 끄덕인 탓에 머리 장식이 조금 풀릴 정도로.

    에스텔의 대답이 떨어지자, 티스베는 기꺼운 표정으로 마차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려와요.”

    에스텔에게 이 모든 연쇄가 얼마나 기적처럼 보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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