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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3화 (13/121)
  • 13화

    ‘갑자기? 나한테?’

    공녀가 뭐 어쨌다고?

    마흘론이 웃음조로 내뱉은 말에 겨우 고장이 풀린 뒤, 티스베는 서둘러 통신을 종료하고 밖으로 나갔다.

    통신이 끊길 때까지도 마흘론이 낄낄댄 건 그렇게 비밀은 아닌 내용이었다.

    내려놓았던 결정을 도로 목에 걸고 문을 열자, 바깥의 소란한 공기가 고스란히 살갗으로 전해졌다.

    유난히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1층의 홀에서 소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까 그 큰소리는 할아버지가 저 남자를 내던지면서 난 소리인 것 같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남자와, 그 앞에 거상처럼 우뚝 선 칼릭스트 공작이 보였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이답게 칼릭스트 공작의 체격은 상당했기에, 그 앞에 선 남자는 오히려 왜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가주님,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공녀님이 지금 가문에 도움이 됩니까, 해가 됩니까? 잘 아시잖습니까.”

    “어제는 구더기 같은 것들이 찾아와서 같은 말을 하더니, 이젠 자네가 와서 내 속을 뒤집는군 그래. 내가 지금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알고나 있나?”

    “모두 가문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주님. 서둘러 에스텔, 아니, 성녀님을 칼릭스트로 들이지 않으면 다른 가문에서 그분을 비호하겠답시고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 남자의 말은 옳았다.

    신전이 공표하기까지 한 이상, 에스텔은 모두가 노리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다만 칼릭스트가 워낙 막강히 버티고 있으니 당장은 섣부르게 입을 벌리지 못하는 것 뿐.

    이 한 달여간의 눈치 싸움이 끝나고도 에스텔이 칼릭스트의 비호를 받지 않고 있다면, 다른 가문에서 그걸 가만 둘 리 없었다.

    그러면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그 가문에 빼앗기는 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그렇게 장로고 가신이고 눈에 불을 켜고 할아버지께 에스텔을 들여오라고 하는 거지.’

    문제는 지금 칼릭스트 공작이 다소 완강하다는 건데.

    이는 가문에서 버려질 것을 이용해 망명을 계획하던 티스베에게는 결코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칼릭스트에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티스베 하나뿐이면 망명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곧장 튀어나와 봤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여차하면 내가 내려가서 상황을 좀 중재해야 할 것 같은데…….’

    평소에는 나한테 관심도 없던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는 거지?

    티스베는 계단의 난간에 몸을 숨긴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가신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항변이 끝나자, 칼릭스트 공작이 인상을 쓰며 특유의 위협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뭘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비호하지 않겠다 한 적 없네. 칼릭스트의 방계 출신이니 그 출신에 맞게 일레르를 후원하겠다 했지.”

    “가주님, 그게 무슨 비호입니까. 그런 비호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녀님을 칼릭스트의 이름으로 비호하기 위해서는 양녀로 입적하는 것이 최선임을 가주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음, 맞지. 티스베는 남자의 말에 동의했다.

    결국 비호하는 건 ‘성녀’를 정치적 목적으로 써먹기 위해서니까. 입적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바꿔 말하자면 날 내버리자는 거니까 기분은 좀 그렇다만…….’

    어쨌든 가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맞는 말이었다. 가문을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칼릭스트 공작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처럼 언성을 높이는 대신, 다소 착잡한 낯빛으로 가신을 보더니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질레트 백작, 자네가 말하는 그…… 최선에. 티스베는 없는 겐가?”

    그리고 그건, 몰래 듣고 있던 티스베에게 약간의 충격을 남겼다.

    충격을 받은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던지, 가신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잠깐 말을 잃었다가 겨우 대답했다.

    “……성녀님을 입적하는 것이 공녀님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만약 그게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라면 자네는 칼릭스트의 가신으로 있을 자격이 없네.”

    이번 말은 조금 전과 달리 노골적인 위협이 실려 있었다. 가신은 서둘러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저는 그게 큰 문제가 될 거라 보지 않습니다. 성녀님을 입적시킨다 하여 공녀님이 제적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티스베가 평생을 신탁의 아이, 성녀라며 떠받들어지며 살다가 사실은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 지 겨우 한 달일세. 한 달.”

    그 아이가 지금 무슨 심정일지 자네는 생각해 보질 못하나?

    그렇게 묻는 칼릭스트 공작의 목소리는 차라리 비수 같았다.

    “그렇잖아도 그 애에게 살인 혐의까지 나돌고 있는 와중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일레르 영애를 입적시키자고?”

    “하지만 가주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일레르 영애를 입적시켜야 하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그 혐의가 사실일 가능성도,”

    쨍그랑!

    바로 옆에 있던 꽃병‘이었던’ 유리 조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칼릭스트 공작의 지팡이가 허공을 가른 탓이었다.

    “한 번만 더 그딴 말을 입에 올리면, 이다음은 꽃병이 아니라 자네 머리통이 될 걸세.”

    “시, 실언했습니다.”

    “지금 저택에 티스베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알게. 그 애가 듣기라도 했다면 질레트 백작, 자네는 당장 파면이었을 테니.”

    안타깝지만 질레트 백작을 당장 파면시켜야겠는데요, 할아버지.

    티스베는 조금 전보다 한결 착잡한 기분이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아까 하녀가 나가자고 했던 거구나.’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전, 하녀가 이상하리만치 강경하게 티스베에게 외출을 권했었다.

    -잠깐 시내에 다녀오면 어떨까요, 아가씨?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는데. 외출 금지를 당하기도 했고.

    -주인님께서도 아가씨께서 너무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셔서, 이번 외출은 허용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잠깐 혹하기는 했지만, 원래 티스베의 계획은 오늘 오후에 마도서를 읽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하녀가 날 핑계 삼아서 시내에 나가려는 수작인 줄 알고 돈을 줘서 내보냈는데.’

    그게 할아버지 명령이었다니.

    물론 하녀도 칼릭스트 공작이 ‘이런 의도’로 티스베를 내보내라고 했다면 분명 티스베를 어떻게든 끌고 나갔을 것이다.

    아마도 칼릭스트 공작은 정말로 ‘티스베가 방 안에만 있는 것이 걱정되니 데리고 시내에 다녀와라’ 정도의 말만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금화를 주며 나는 두고 혼자 다녀오라는 말에 그렇게 신나서 나갔겠지.

    ‘게다가 그 뒤로 아무도 부르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 칼릭스트 공작으로서는 티스베가 외출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티스베의 무심한 시선이 층계 아래쪽을 향했다.

    언제고 제게 말 한 마디 다정히 걸어 준 적 없던 무뚝뚝하던 할아버지와, 자신을 내쫓으라며 열변을 토하는 질레트 백작.

    ‘백작 쪽이 오히려 더 친근하게…… 아니,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하지만 칼릭스트 공작이 자신을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나온다고 해도 불편하기만 하고.

    오히려 원작의 내용대로 자신을 내쫓으라고 말하는 질레트 백작 쪽이 더 받아들이기 쉬웠다.

    칼릭스트 공작의 말에 가슴 한 쪽이 시큰거리는 것 같은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완강하면 망명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는데…….

    “……음?”

    상황을 살피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티스베의 눈에 무언가 잡혔다.

    아마도 질레트 백작이 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낯선 마차.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분홍 머리칼의 한 여자가 보였다.

    분홍 머리칼의 여자가 누군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스텔 일레르. 이 세계의 여주인공.

    ‘그러고 보니, 질레트 백작은 단순한 가신이 아니었지.’

    티스베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렸다.

    질레트 백작가는 에스텔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에스텔의 외가에 해당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시골 귀족이었던 에스텔이 데뷔탕트를 위해 수도로 상경하면서, 질레트 백작저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됐었고.

    ‘질레트 백작은 에스텔을 칼릭스트에 입적시켜서 자신의 공을 좀 더 높이고 싶어 했지.’

    어차피 그는 가진 명예와 부가 그리 많지 않아 에스텔을 입적한다 해도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없기도 했고.

    애초에 그는 칼릭스트에 충성하는 칼릭스트의 가신이기도 했으니까.

    칼릭스트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것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영향력 있는 일이었으리라.

    갑작스럽게 칼릭스트 공저를 방문한 질레트 백작과, 질레트 백작이 데려온 에스텔.

    ‘그리고 신전이 에스텔을 신탁의 주인공으로 공표한 이후라.’

    정황을 짜 맞추어 보면 한 가지 결과가 나온다.

    ‘이거, 에스텔이 칼릭스트에 처음 방문하는 날이었잖아?’

    바로, 지금 이 사건이 원작에 있는 내용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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