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2화 (12/121)

12화

그나마 다행인 건 루넷 영식을 살려 보냈기 때문에 당장 급한 불은 껐다는 거지만.

“그런 실력자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고 다시 표적을 죽이려고 할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좋겠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아가씨한테 그따위로 입 턴 놈을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아요.”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별들은 언제나 당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알겠으니까 너희 길드 슬로건 읊지 마.”

게다가 그 슬로건은 티스베가 지어 준 거였다. 티스베는 자신을 놀리는 마흘론 대신 결정을 한 번 손끝으로 튕기며 인상을 썼다.

“저야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게 망명이라는 걸 아니까 굳이 나서지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그놈이 하는 짓이 속 시원하긴 하거든요. 아주 보기 좋게 뭉개 놨잖습니까.”

“뭐, 그건 사실이지.”

자신한테 혐의가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티스베 역시 뒤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속 시원하다고 하고 끝나기엔, 범인이 원하는 바를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사실 이 지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S급 정보 길드 조디악을 손에 통째로 쥐고 있는데도 범인의 의도조차 파악할 수 없다니.

차라리 조디악의 정보력이 모자라서 그랬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과 충분한 비용을 주신다면 조디악은 어느 정보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디악의 홍보 문구였다.

그리고 마흘론이 실제로 성공시킨 말도 안 되는 업적이기도 했다.

조디악의 의뢰 달성률은 97%에 육박했으니 말이다.

‘나머지 3%는 대부분이 조디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거나 나에 관련된 정보지.’

그러니 달성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조디악이 해결하지 못하는 3%의 의뢰 중에서, 조디악과 티스베에 관련된 정보가 아닌 경우가 최근 있었다.

-체르닐 경관의 사망 사고요? 이 사고를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알아봤죠. 아가씨는 물론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유별나게 불운한 하루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마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니까. 그러다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가씨도 참. 그건 초짜들이나 그러는 거죠. 그리고 제가 안 죽였는데도 죽었잖습니까.

마흘론은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낄낄대며 손을 내젓더니, 금세 웃음기를 잃은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어쨌든 알아봤습니다. 아가씨와 연루된 자들의 연쇄적인 죽음이 아무런 이유가 없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결과는?

-음,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기 좀 부끄럽습니다만.

결과는 깨끗했다.

마치 그것들이 모두 자연적인 죽음인 것처럼.

사고는 정말로 사고인 것처럼 보였고, 그 밖의 사망에서도 어떠한 연결 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독살로 죽은 사람의 경우 독의 종류를 알아내어 그 독약을 판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덕분에 이 모든 게 자연적이지 않다는 확증은 얻었습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사고였다면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여긴 흔적이 하나도 없거든요.

꽃병이 깨지면 깨진 조각들을 치울 수는 있어도 꽃병을 다시 원상복귀 시켜 놓을 수는 없는 것처럼, 범죄의 흔적 역시도 그렇다고 마흘론은 설명했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알아낸 건 그게 전부.

“그 뒤로 더 알아낸 게 없잖아.”

“그렇기야 하죠. 우선은 좀 더 시간을 들여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당장은 나오는 게 없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답은 하나뿐이죠.”

“역시, 황금열쇠구나.”

“맞습니다.”

보안등급 황금열쇠.

각 나라의 최고위 계층이 그들의 권한을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은폐한 정보가 바로 이 등급에 속한다.

대륙의 모든 정보를 쥐고 있다는 S급 길드 조디악도 차마 손댈 수 없는 등급의 정보.

“예를 들자면 신전이 쥐고 있는 신성력 관련 정보들이 이런 것에 속하죠. 아니면 황제가 비밀 친위대를 동원한 일이 생길 때라거나.”

물론 이런 정보들은 극히 드물다.

하여 여태까지 황금열쇠 등급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등급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바로 그 등급이 등장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티스베를 위협하는 존재로써.

“그렇다면 범인은 나보다 더 우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지.”

최소한 일국의 공작 이상.

티스베의 권한과 조디악을 동원해서도 알아낼 수 없는 범인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난관인데.

“암영까지 간파당하다니…….”

“저도 간파당하는 경험은 굉장히 오랜만인데, 아찔하던데요.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겠다 싶었습니다.”

마흘론은 그렇게 말하며 농담조로 웃었지만, 티스베는 그 웃음 너머에 씁쓸한 불안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티스베의 심정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스베가 길게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범인을 당장 잡아낼 수 없다면 의도라도 파악해야 해.”

“흠, 아가씨의 열렬한 추종자 아닙니까?”

“순진한 대답이네, 마히.”

티스베가 건조하게 웃었다.

에스텔이 진짜 신탁의 주인공이라는 게 신전을 통해서 공표되기까지 한 이 마당에,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나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몰락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말이 차라리 신빙성 있겠어.”

“신빙성이고 뭐고, 그게 사실 가장 유력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티스베가 가볍게 박수를 쳐서 말을 끊었다.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해. 내가 아직 칼릭스트 공녀라고 불릴 때.”

더 이상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어제 장로들이 와서 에스텔을 입적시키라고 으름장을 놓던 게 도화선이었다.

모든 게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에스텔은 입적되고, 티스베는 모든 권력과 지위를 상실한다.

그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티스베는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내일 모레, 황궁에서 파티가 있어. 거기에-”

그리고 그 순간.

쿠당탕!

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와, 익숙한 목소리도.

“-가주님!”

“돌아가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티스베의 할아버지, 칼릭스트 공작이었다.

소란이 결정까지 흘러들어갔던지, 결정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아가씨. 괜찮은 겁니까?”

“……글쎄.”

일단 제게 볼 일이 있어서 다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걸 괜찮다고 해야 할지.

칼릭스트 공작은 쉽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냐고 하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이지만.

어쨌든 그가 저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인데.

‘무슨 일이지?’

하고 티스베가 몸을 일으킨 순간.

“칼릭스트의 공녀는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티스베 한 명뿐이다!”

우렁찬 칼릭스트 공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저택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티스베 한 명뿐이다!

뿐이다!

뿐이다…….

그 속에서, 티스베는 잠깐 고장이 나 있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아니, 들은 게 맞긴 한가? 이거 꿈은 아닌가?

머릿속 물음표의 향연 속에 빠진 티스베 대신, 결정 너머로 칼릭스트 공작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던 마흘론의 한 마디가 상황을 깔끔히 정리해 주었다.

“와, 아가씨.”

이거 아무래도 망명은 힘들겠는데요.

* * *

티스베가 망명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에스텔의 입적이다.

티스베는 이런 표현이 에스텔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서 싫다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사실이니까.

에스텔의 입적은 티스베에게서 모든 기회를 빼앗아 간다.

공녀라는 이름도, 후계자의 지위도.

입적 이후 에스텔이 ‘칼릭스트 공녀’로 자신을 소개하게 되면서 티스베는 자신을 ‘칼릭스트 영애’로 소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의미하는 바가 컸다.

공녀와 영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공녀는 그 자체로 내뱉는 말마다 공작에 준하는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지만, 영애는 그저 칼릭스트의 딸일 뿐이다.

정략결혼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는 칼릭스트의 딸.

그게 싫어서 티스베는 망명을 계획했다.

어차피 자신은 가문에서 곧 내놓은 자식이 될 테니, 아무도 제게 신경 쓰지 않을 때 슬쩍 마법국 세이즈로 떠나 버릴 요량으로.

그런데…….

뭐라고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