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전장의 살인귀를 생각하기나 할까. 비 맞고 꾀죄죄해진 조막 만 한 강아지가 차라리 더 어울리겠다.
‘수도에 없을 때부터 전해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라스는 풀이 죽은 소어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속으로만.
제 주인이 약혼녀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서 반편이가 되었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수도로 간 다른 이들에게서 종종 전해 들었다.
-정말이라니까요, 라스? 약혼녀 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신다구요! 이걸 직접 보셔야 하는데!
그때는 믿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놀라웠다.
라스는 분명 소어가 가장 신뢰하는 칼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꼭 같은 이유로 소어가 직접 관리하기 힘든 살바토르 공작령을 수호하느라 소어의 곁을 내내 떠나 있었다.
그가 소어의 부름을 받고 수도로 다시 올라온 것도 고작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바토르 공작령에 처박혀 있는 동안 소어와 아주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땐 약혼녀에 대한 언급이 딱히 나오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라스가 소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라스는 그게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 좀 적응 안 되는 것 빼면.’
아, 그리고 그 뒤치다꺼리 하느라 잔업이 느는 것 빼면.
라스는 소어가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살바토르 공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전장으로 나갔을 때부터 함께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재 소어의 수하로 일하는 사람은 몇이 더 있었지만, 그때부터 함께한 건 라스가 유일했다.
그 이유는 별 것 없다.
함께 출전했던 나머지는 전부 죽었으니까.
적의 칼에, 혹은 소어의 칼에.
‘그 살바토르 공작이니, 배신하는 놈들이 많았지.’
낮에는 농담을 주고받고 충성을 맹세하다가, 밤에는 검을 들고 암살을 시도하는 일이 부지기수.
제각기 이유도 다양했다.
집에 돈이 모자라서,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전쟁터를 그만 떠나고 싶어서 등등.
그 속에서 얼마나 소어가 차갑고 날카롭게 벼려졌는지는 본인보다도 라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랑해진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애초에 예전엔 약혼녀에게 별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지.’
라스는 전장에서의 기억을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이따금 본성에서 편지가 올 때면 소어는 늘 편지를 뜯지도 않고 버려 버렸다.
때문에 편지를 확인하고 불태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늘 라스의 몫이었는데, 한 번은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허, 각하. 이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약혼녀가 생기셨답니다. 장로님들께서 추진한 모양인데요? 약혼한 본인은 여기서 구르고 있는데, 약혼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둬라.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약혼 아니냐.
-확인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돌아가면 알게 되겠지. 나와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딱 라스가 알던 소어다운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라니.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그 냉랭한 살바토르 공작의 마음을 녹여 둔 거지?
라스는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늘 그랬듯 궁금증을 잘 갈무리해 품에 넣어 두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소어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빨리 보고를 마치고 잔업을 하러 가는 것이었으므로.
그 ‘잔업’이라는 것조차 소어의 피앙세에 관한 일이라는 게 조금 우스개긴 하지만.
다행히 소어는 그렇게 오래 감상에 잠겨 있을 생각은 없었던지, 종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널 오래 붙잡아 둔 것도 사실이니, 보고 먼저 듣도록 하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우선, ‘선물’은 명하신 대로 구매해 두었습니다. 낙찰가는 3억 2천만 골드입니다.”
“알겠다. ‘표적’은?”
“그게, 문제인데요.”
내내 밝았던 라스의 표정이 조금 나빠졌다.
“말씀하신 대로 경매장을 나올 때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표적’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붙어 있었습니다.”
라스의 말에 소어가 느슨히 턱을 괴며 물었다.
“변명은 알겠다만, 내가 굳이 너를 수도로 불러왔음에도 처리할 수 없을 인물인가?”
“그림자를 다루더군요. 제가 알기로 그런 인간은 대륙에 한 명 뿐입니다.”
“조디악의 길드장.”
대신 대답한 소어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군.”
“물론 명하신 대로 죽이려면 죽일 수는 있었겠지만, 과정에서 조디악 길드장과 붙게 되면…….”
“그가 능력을 써서 사건을 통째로 은폐해 버릴 테니 나설 수 없었겠지.”
조디악 길드장의 신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가 그림자를 다룬다는 사실과 그 능력으로 은폐와 은신에 능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가 고작 정보 길드에 불과한 조디악을 S랭크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능력 덕분이라는 말도 있으니.
만약 라스가 ‘표적’을 죽이기 위해 조디악의 길드장과 전면으로 붙었다면 무슨 결과가 있을지는 뻔하다.
그러나 실패는 실패. 라스가 허리를 숙였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디악의 길드장이 붙어 있었는데 너 혼자 어떻게 할 도리 없는 건 알고 있으니.”
소어가 잘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퍼런 죽음처럼 깊게 내려앉은 벽안이 조금 전까지도 내내 바라보고 있던 소식지를 응시했다.
“라스 네게도 말했지만, 그놈들의 죽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이건 본보기니까.”
고작 한 소녀의 어깨에 구원의 이름을 걸어 모든 부담을 떠넘겨 놓고, 이제 와서 입을 씻는 더러운 인간 말종들을 향한 본보기.
그래서 위험 부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어는 그의 행적이 겉으로 드러나게 했다.
그래야 다른 인간 이하의 쓰레기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입을 다물 테니까.
공포만큼 민중을 잘 선동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어가 ‘표적’들을 청소하고 다닌 이후, 감히 티스베의 면전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이는 사라졌다.
‘티스베도 버러지들이 죽어서 기쁘다고 했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이유로는 그거면 충분했다.
“조디악이 왜 이 일에 끼어드는지는 모르겠다만…….”
소어의 손끝이 빈 종이 위를 쓸었다. 음울한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남은 표적은 하나고, 기회는 더 있다.”
다음에는 실패하지 말도록.
명령하는 목소리가 유달리 스산했다.
루넷 영식이 죽을 만한 기회는 더 있었다.
* * *
그래, 루넷 영식이 죽을 만한 기회는 더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지. 마흘론, 네가 정보를 수집할 때도 그렇잖아.”
하고, 티스베는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안에 들린 마름모 모양의 검은 보석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정보를 수집할 때는 그 누구보다 치밀한 전략을 짜서 하나뿐인 기회를 얻어 오는데요.”
“아, 그렇게 치밀해서 어제 경매장에서 물건 사겠다고 떼썼니?”
“……어쨌든 표적은 살려 보냈으니 된 거 아닙니까.”
“어제 일로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고.”
티스베가 보석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보석은 일종의 결정으로, 쉽게 보자면 마흘론과 통신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흘론의 그림자 일부를 보석에 가둬서 말이 통하게 만든 거지만.’
어쨌든 유용한 물건이었다. 티스베는 외출을 금지당한 이후로 늘 이 결정을 사용해서 마흘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늦은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티스베는 결정부터 꺼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흘론! 루넷 영식, 살아 돌아갔어?
-물론이지요. 제가 누굽니까.
어젯밤 소어와 함께 귀가하느라 마흘론에게 맡겨 둔 ‘표적’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가씨 말씀이 맞았습니다. 노리는 놈이 있던데요? 직접 덤비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
티스베가 굳이 마흘론을 데려온 것은 그가 비단 티스베의 계획을 잘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폐와 은신에 능한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마흘론을 거두었던 이에게서 물려받은 능력.’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 일명 암영.
이때 ‘그림자’란 단순히 사물이 빛에 가리어 생기는 음지뿐만 아니라, 모든 암흑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두운 곳이라면 마흘론을 이길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게다가 여차하면 살인 현장을 은폐할 수도 있고.’
특정 반경 안의 모든 그림자를 파악할 수 있으니 기척을 알아보는 데에도 용이하다.
그래서 티스베는 죽음이 제 코앞에 닥친 줄도 모르고 있는 멍청한 루넷 영식의 옆에 마흘론을 찰싹 붙여 둔 뒤, 그를 죽이려고 덤비는 이를 붙잡아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문제는, 상대방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표적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보고 도망치던데요. 분명 평범한 놈은 아닙니다.
-그걸 알아봤으면 그게 너라는 것도 알아봤을까?
-그렇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왜? 네 능력이 꽤 알려진 능력이라서?
-아뇨, 이것과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암영을 쓰는 걸 보고 제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제가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도 알아봤다는 건.
-암영을 간파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거구나.
-맞습니다. 암영은 분명 은신에 특화된 기술이긴 하지만, 기척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그렇게 흔할 것 같지는 않은데.
-흔하진 않습니다. 제가 만나 본 것도 겨우 네다섯 명 정도였으니.
그렇게 흔하지 않은 실력자가 ‘굳이’ 루넷 영식을 노리고 있었다면 역시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 <괴물꽃>의 사건들을 재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