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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0화 (10/121)

10화

살바토르 공작저.

은제 칼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던 라스가 흘긋, 소어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각하.”

“……말해.”

“왜 종이만 뚫어져라 보고 계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퍽 공손한 말이었지만, 거기에는 그만큼이나 노골적인 함의가 두 가지 담겨 있었다.

“종이는 그만 보고 일이나 하라는 건가.”

“덧붙이자면 그런 말을 했다고 내쫓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라스의 대답에, 소어가 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지독하게 무감정해서, 종이 인형 팔락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소어는 종이 인형보다는 한참 살벌한 편이었지만.

팔락. 소어의 손끝에서 종이가 떨어져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별일 아니다. 그분께서는 나와 만난 이후에는 꼭 귀택했다는 편지를 써 주시는데, 오늘은 연락이 없으시기에.”

“아, 그게 그 종이였습니까.”

신전에서 고가에 파는, 일명 소식지.

커다란 한 장을 나누어 사용하며, 소식지 조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본인의 소식지에 글을 적으면 다른 모든 조각들에 똑같은 글이 나타난다.

글이 보존되는 기간은 만 하루 정도이며, 그 기간이 지나면 모든 소식지는 깨끗해진다.

그러나 이토록 편리한 물건임에도 실제로 구매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지막지하게 비싸기 때문.

어지간한 백작령의 1년치 세금을 탈탈 털어야 겨우 살 수 있는 고가의 종이라니, 편지를 전해 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귀족들에게 소식지는 썩 실용적이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오히려 그 소식지를 사는 사람을 두고 바보라고 할 정도였으니.

라스도 그 종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제 수건으로 말끔히 닦아낸 단도를 도로 칼집에 밀어 넣으며, 그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저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그때 너는 수도에 없었을 테니 당연하지.”

“예. 그래도 듣긴 했습니다. 각하께서 그걸 선물하셨을 때 그분 표정이 볼만하셨다고요. 아주-”

“귀여우셨지.”

소어가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사르르 웃었다. 조금 전 종이 팔락일 때와 같은 삭막함은 온데간데없이, 당장 봄을 맞은 것처럼 화사하기만 한 웃음이었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 끝에, 그때의 일이 재생되었다.

“오늘은 당신께 드릴 게 있습니다.”

하고, 처음 이 종이를 내밀었을 때 티스베는 ‘웬 종이를 내미느냐’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이 종이로 꽃을 접어 주면 만족하겠느냐는 듯.

그러나, 그런 태평한 분위기는 소어가 입을 열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신전에서 파는 소식지에 대한 건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음, 소어. 설마 이게 그 소식지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왜 부정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건 신전의 소식지입니다.”

소어가 도리어 의아해져 대답하자, 주르륵 하고 뭔가 새는 소리가 났다.

원인은 티스베였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중 소어가 한 말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버렸고, 결국 티스베의 목 너머로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던 주스들은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

도저히 자신이 들은 걸 믿고 싶지 않다는 듯 크게 뜨인 눈과, 오렌지 주스를 뱉고도 충격이 채 가시질 않아 다물어지지 않던 작은 입술.

그 얼굴 가득 올라온 경악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물론, 그건 소어의 입장이고.

그들 사이를 지키고 있던 다른 수행원들이 티스베의 표정에 일제히 웃음이 터져서 숨을 참느라 끅끅거렸다는 것은 소어가 결코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컵을 내려놓고 간신히 입가를 닦은 티스베가 입을 열었다.

“소, 소어.”

그것도 아주 힘겹게.

“이, 이이거, 자른 거예요? 아니죠? 손 안 댔죠? 아아직 환불할 수 이, 있죠?”

“자른 겁니다. 환불할 생각도 없고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요! 왜 산 거예요!”

티스베가 그렇게 펄쩍 뛰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소어는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티스베가 언짢으셨다면,”

“아, 아니…… 아니에요. 소리 쳐서 미안해요. 화내는 거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그랬어요. 이건 너무, 비싸잖아요.”

내 약혼자가 호구라니. 티스베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소어는 어느 정도 티스베가 그렇게 반응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격이 문제였던 겁니까?”

“그럼요. 이런 고가의 선물은……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 닫힌 입술 너머에 “겨우 정략 약혼 상대에게 하기에는,”이라는 말이 숨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소어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소어는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게 걱정이신 거라면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전에서 제게 가격을 많이 덜어 주었으니까요.”

“……신전이 그랬다고요?”

“예. 제작 비용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사가는 이가 없으니 쌓아 두는 것도 문제라 하더군요. 그래서 제게 아주 싼 가격에 팔아 주었습니다.”

“얼마에 팔았는데요?”

“원가의 삼분지 일정도 되는 가격이었습니다.”

그 말에, 티스베의 표정이 한결 좋아지는 것을 소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티스베가 자신의 말을 믿고 있지 않는 것 역시 빤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소어는 자신이 한 말을 진실로 만들었다.

신전에게 거액을 넘기고 소식지를 1/3의 가격으로 팔게끔 한 것이다.

그걸 위해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나 정도 처분해야 했지만, 그건 살바토르 공작가의 막대한 부에 조금의 위협도 줄 수 없는 사항이었다.

소식지가 원가의 1/3밖에 되지 않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확인한 이후에야, 티스베는 다그쳐서 미안했다며 소식지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소어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개중 한 가지는, 티스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은 오히려 질겁하시니.’

그렇다고 선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어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남들은 다 그러고 사는걸. 중요한 건 들키지 않는 거야.

들키지 않으면, 잘못도 없는 거지.

아주 어린 날 만났던 소녀가 해 주었던 조언을 되새기면서.

* * *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말투에서 묻어나는 연륜이 있었다.

거기에 하오의 햇살 아래서 유독 신비로워 보이는 은발과, 그보다 더 영롱하게 빛이 나는 금안까지.

만약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말해 주기라도 하듯, 소녀는 분명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이질감이 있었다.

때문에, 소녀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어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가 어째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관조적이고 살짝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소녀의 시선 앞에서 성녀라는 별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던 소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

물론, 옆에서 제 주인의 낯 뜨거운 변화를 견딜 수가 없었던 라스가 요란스럽게 헛기침을 하기 전까지만.

“흠! 크흠, 흠! 아무튼, 각하.”

감상이 파삭 깨져 버린 소어가 순식간에 미소를 입가에서 거두며 시선을 들었다.

과묵한 소어답게 대답은 없었지만, 괜히 입 잘못 놀리면 네 앞에 놓인-조금 전까지 뽀득뽀득 닦아 반짝거리기까지 하는-칼이 어디를 향할지 뻔히 보이는 시선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끽 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 법한 살벌한 시선이었으나, 라스는 늘 그렇듯 입이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그는 소어가 전쟁터를 전전하던 당시, 그의 옆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라스가 태연하게 단도를 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매번 편지를 남기시던 분이 편지가 없으시다는 건 이미 잠드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예, 뭐. 저야 각하께 경과 보고하러 들어왔는데 내내 종이만 보고 계시니 궁금해서 여쭈었습니다만.”

보고하러 들어왔더니 종이만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처음에는 새롭게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했더란다.

물론, 조심스럽게 “각하?” 하고 말을 꺼내자마자 기다리라는 대답이 떨어져서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과묵한 주인이 다시 자신을 불러 줄 때까지 소파에 앉아 칼이나 닦기로 했다.

문제는 라스가 기다리는 동안 가지고 있는 모든 칼들을 닦았는데도 소어가 이 긴 기다림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방금 넣은 단도가 마지막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그만 기다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그분께서 편지를 늦게 쓰신 적이 있다.”

그러나 라스의 말에 돌아온 건 웬 동문서답이었다. 소어는 왠지 쓸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종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네 말처럼 일찍 잠자리에 드셨겠구나 하고 기다리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나?”

“뭐, 각하께서 못 보신 사이에 편지가 사라져 버리기라도 했……”

……염병할. 정답이군.

라스는 속으로 욕을 했다.

이유는, 그가 대답하자마자 소어가 순식간에 물에 쫄딱 젖은 토끼마냥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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