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언성을 높인 저 말들만 들어도 무슨 일인지는 얼추 유추 가능했다. 티스베의 차가운 시선이 공작의 방 앞에 가 닿았다.
‘그 밥벌레들이 왔나 보네.’
칼릭스트의 장로들.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머릿속엔 온통 구시대적인 발상만 들어차서 가문의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식충들.
다소 신랄한 평가가 아닌가 하는 발상도 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이건 티스베가 내린 평가가 아니었다.
이건 전부 티스베의 할아버지, 칼릭스트 공작이 했던 말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꽤 놀랐었지.’
가장 은밀하고 사람의 접근이 닿지 않는 최상층에만 가주의 집무실을 두는 여타 가문들과 달리, 칼릭스트의 집무실은 1층에도 있었다.
1층까지 손님의 접근을 허용하고, 2층부터는 사적인 공간으로 외부의 침입을 제한하는 탓이었다.
때문에 칼릭스트 공작은 대부분의 업무를 1층 집무실에서 수행하곤 했고, 때문에 티스베 역시 오며가며 들은 이야기가 좀 되었다.
예를 들자면 조금 전 장로들에 대한 신랄한 평가 같은 것.
-장로들이 시끄럽다고? 세금도 안 내는 놈들이 조세법 개정에 난리 피우는 건 여전하군. 이 밥버러지들은 죽지도 않는다던가.
-가, 가주님. 그래도 장로분들이십니다.
-나이만 있으면 개나 소나 다 꿰차는 장로직이 뭐 별거라고? 당장 나만 해도 가주직만 내려놓으면 장로가 될 텐데, 그게 대수더냐?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던지, 칼릭스트 공작은 장로들에 대한 욕을 잔뜩 퍼부었다.
집무실은 기본적으로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데다 본인의 집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지만.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면 밖에선 꽤 잘 들린단 말이지.’
덕분에 그들은 밖에서 듣고 있을 티스베의 존재는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원작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장로들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칼릭스트 공작의 입을 통해 장로들에 대해 듣는 게 꽤 신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작에서는 장로들이 꽤…… 좋은 역할로 나오니까.’
에스텔을 칼릭스트에 입적시키도록 중재하고, 또 에스텔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기꺼이 에스텔을 위해 가문의 힘을 빌려 주었다고.
에스텔의 조력자들 중 하나는 장로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연히 칼릭스트 공작과 장로들의 사이 역시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주님께서 손녀딸을 생각하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놔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면 저희 역시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야, 목청도 좋네. 나이는 할아버지보다 더 먹었을 게 분명한데 정정하기도 하시지.
티스베는 잠시 멈추어 서서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저게 아마 날 내쫓는 첫 번째 단계겠지.’
<괴물꽃>에서는 에스텔의 시점으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입적 전에 칼릭스트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었다.
에스텔이 입적되면 티스베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수순이었다.
차근차근 칼릭스트의 성녀라는 이름도 빼앗기고, 후계도 빼앗기고, 점점 밀려나서 소어 말고는 매달릴 사람 없는 신세로 전락하리라.
에스텔의 능력이 밝혀진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역시 자신을 내쫓아 달라며 탄원하고 있는 저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미묘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옳아.’
어린아이에게 성녀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겨 어릴 때부터 살인적인 공부량과 갖은 암살 시도, 음해 공작에 시달리게 해 놓고는.
이제 와서 명예를 운운하며 티스베를 버리고 에스텔을 들이자니.
그게 버러지와 다를 게 있나.
‘그렇다고는 해도 왜 할아버지가 에스텔의 입적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티스베는 차고 있던 진주 팔찌를 뚝 끊어 내, 진주알을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렸다.
투두둑.
진주알들이 요란하게 쏟아지며 마루 위를 구르고, 그제야 얼핏 열린 집무실의 문 너머 역정을 내던 목소리들이 뚝 멈추었다.
대신, 내내 침묵하던 칼릭스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 손녀가 돌아왔나 보군. 그대들이 장소와 시기도 모르고 언성을 높였으니 아마 다 들었다 해도 할 말은 없겠지.”
문 너머 딱딱한 목소리만 들렸지만, 티스베는 알 수 있었다.
‘이야……’
할아버지 화났네.
“당장 내 저택에서 꺼지지 않으면 네놈들의 몸뚱어리에서 쓸모없는 부위를 전부 도려내 주지.”
과연 그 늙어빠진 몸에서 쓸모 있는 부위가 있기는 하겠느냐마는.
덧붙여진 말에, 열린 문에서 노인 몇 명이 내던져지다시피 튕겨 나왔다.
그들은 문 밖에 서 있는 티스베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물론 가주인 칼릭스트 공작과 달리 티스베는 공녀에 불과하니 인사를 해야 하는 건 티스베 쪽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이참에 아예 안 돌아와도 좋겠네.
하고 티스베가 속으로 빙글거리고 있는데, 집무실의 문이 닫히며 다소 피로해 보이는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까마득히 높은 키와 도저히 그 나이대로는 보이지 않는 다부진 체격이 그를 노인이라기보다는 군인의 모습에 가깝게 보이게 했다.
그는 마루를 굴러다니는 진주알들에 잠시 시선을 두더니, 한 발 늦게 티스베를 발견했다.
“……티스베.”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칼릭스트 공작은 그 말에 눈꺼풀을 느리게 내렸다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잠시 티스베를 살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느낌이기도 했고, 티스베가 조금 전 방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딜 다녀오느냐.”
물론, 둘 다 아닐 거라는 사실을 티스베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소어와의 약속에 다녀왔어요. 소어가 본인 마차로 데려다줘서 제 마차는 먼저 돌려보냈고요.”
“아, 그랬던가…….”
“돌아오자마자 팔찌가 끊어져서 주우려고 했는데, 제가 괜히 손님들과의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닐까 싶네요.”
“아니, 그렇잖아도 슬슬 돌려보내려 했으니 잘됐다. 그보다,”
칼릭스트 공작은 서두를 떼고 잠시 머뭇거렸다.
“……들었느냐?”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설명이 과연 필요하기나 할까.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티스베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할아버지.”
“아니, 널 신경 써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아, 제가 너무 앞서 나갔군요.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신경 써서 그러는 게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튀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티스베는 어딘지 민망해져,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할아버지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래라.”
그렇게 대답하는 칼릭스트 공작의 표정이 왜인지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황망해 보였던 것은 기분 탓일까.
뭔가 변명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낭패감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가 됐든 나한테 보일 만 한 감정은 아니니까.’
티스베는 그 미묘한 감정을 서둘러 떨쳐 내고 층계를 올랐다.
칼릭스트 공작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지만, 차마 등을 돌려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수없이 경험했다.
타인이 그리워 등을 돌렸을 때, 오로지 검은 고독만이 남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현실을.
거기에 아주 잠깐씩 다른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칼릭스트 공작은 단 한 번도 그 위치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괜한 기대도, 미련도 갖지 말자.’
그것은 티스베가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순간 내린 다짐이었다.
기대도 미련도 갖지 않는 것.
그것은 반드시 그녀가 책 속의 악녀로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망명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차피 떠날 곳에 마음 둘 필요 없잖아.’
그러나 사람 마음이 으레 그러하듯, 그 어떤 견고한 다짐이라도 한 번씩은 금이 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웃고 있느라 입꼬리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던 어느 날. 발코니에 숨어 있다가 우연히 누군가에게서 다정한 말을 듣는다거나.
혹은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너 같은 제자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며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던 날.
자신조차 잊고 있던 생일날, 제게 손수 만든 작은 핀쿠션을 선물이라며 내미는 하녀를 마주 하는 일들에.
티스베는 마음을 내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나중에 성녀가 아닌 자신을 두고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들의 호의에 기대를 갖고 싶었다.
‘그땐 그랬지.’
만약, 다정한 말을 건넸던 사람이 소어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자신을 유혹하려던 루넷 영식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을 예뻐하던 선생님은 그저 성녀 제자를 두었다는 타이틀이 갖고 싶었던 걸 알지 못했더라면.
하녀가 선물해 준 핀쿠션에 독침이 심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더 생각하지 말자.’
풀썩.
티스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대충 갈아입고 씻은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역시 사람은 필요 없다. 푹신하고 따뜻한 침구만 있다면 내일은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티스베’로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로와 수마가 티스베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아, 아직 잠들면 안 되는데.’
마흘론한테 일이 어떻게 됐는지 경과보고도 들어야 했고, 마도서도 읽어 봐야 했다.
‘참, 소어에게 잘 들어갔다고 편지도 써 줘야 하는데…….’
하암.
그 생각을 기점으로, 티스베는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