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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화 (4/121)

4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깨닫게 된 이후, 티스베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여긴 답이 없다. 망명하자!

부딪혀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망명부터 생각하다니, 누군가는 너무 극단적인 시도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티스베라고 해서 왜 시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이건 나름대로 모든 현실을 따져 본 이후에 나온 최선책이었다.

일단 첫 번째, 이 책은 악녀-그러니까 티스베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 일례로 현재의 상황을 들 수 있겠다. 책 속에서 에스텔의 능력이 밝혀졌을 때, 티스베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든 자기변호를 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 티스베는 깔끔하게 에스텔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녀에게 성녀 타이틀을 넘겼다. 다른 건 피할 수 없어도, 적어도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면 상황이 좀 나아질 줄 알았지.’

하지만 결과가 어떠한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사교 모임에서 배척당했다. 그뿐이면 억울하지도 않다. 일주일 내내 죽여도 날짜가 모자랄 만큼 그녀를 모욕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온 제국은 티스베를 오랫동안 성녀로 오판해 왔다.

그리고 본인의 오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으레 그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기 마련이니까.

때문에, 두 번째.

칼릭스트가는 머잖아 티스베를 등지게 될 것이다.

후계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오점이 된 티스베를 서둘러 소어와 결혼시키고 칼릭스트의 이름에서 제적하자는 얘기까지 나올 터다.

‘이렇게 된 이상 분명하지.’

물론 티스베가 그 요구를 순순히 따르면 원작에서처럼 처형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라면 모든 사회적 활동을 박탈당하게 될 미래가 빤히 보였다.

‘이대로는 집에 처박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사교계는 그녀를 꺼릴 테고, 얼굴이 이미 팔릴 대로 팔린 탓에 어디 갈 때마다 성녀 관련한 수군거림을 달고 살아야 할 테니까.

그렇게 티스베가 반강제적으로 집에 틀어박히면 성녀로 자라기 위해 감내해 온 그 모든 노력이 쓸모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 될 터다.

아무리 티스베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그런 취급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신탁을 티스베가 해석한 것도 아니고, 티스베가 자신을 성녀 취급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칼부림을 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소어는 무슨 죄냔 말이지.’

소어는 책임감이 강하고 선한 사람이다.

그러니 분명 그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티스베를 끝까지 책임지려 할 터였다.

하지만 소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애초에 소어가 티스베와 약혼한 것도 살바토르 공작가의 장로들이 벌인 일이었는데.

그 착한 성품 때문에 티스베를 외면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됐다고 소어에게 모든 뒷감당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티스베는 망명을 계획했다.

그녀가 쌓아 온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또 그만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마법국 세이즈.’

대륙의 세 강국 사이에 조그맣게 끼어 있는, 나라라기보다는 거대한 도시에 가까운 나라.

마법을 쓸 수 있는 소수만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 외에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곳.

티스베의 망명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책 속에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아 결국 티스베의 거짓말이 되어 버렸지만, 티스베는 정말로 신성력을 쓸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을.

신성력과 마력은 모두 마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마나의 성질에 따라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마법 술식에 맞추어 사용한다는 점에서 갈래가 나뉠 뿐.

하지만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극히 적고, 덕분에 이 대륙의 일반인들에게는 마법에 대한 지식도, 신성력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신성력에 대한 것은 신전에 정보가 있다지만, 신전이 워낙 정보를 꽁꽁 숨기니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쉽게 알 수가 없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티스베는 자신이 우연히 발현한 마력을, 자신이 성녀이기 때문에 발현한 신성력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더욱 부정했던 거고.’

하지만 그 덕분에 얻어 낸 것도 있었다.

바로 그녀만이 가진 마나 운용법.

본래 티스베가 가진 능력은 마력을 술식에 맞추어 사용하는 능력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신성력으로 오인하고 남몰래 신성력 관련 책들을 보면서 끊임없는 독학을 거쳤다.

그 끝에, 티스베는 마력을 신성력처럼 술식 없이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비록 책 속에서의 티스베는 이 능력을 에스텔 괴롭히기에만 쓰다가 결국 본인의 진짜 능력조차 알지 못하고 죽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니었다.

책 속의 내용대로 마력을 갈고닦아 온 티스베는 지금 자신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런 능력이라면 세이즈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거야.’

게다가 세이즈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이후 외부와 단절되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지위와 관계를 내려놓고 와야 했다.

제국 모두에게 돌을 맞고 있고, 곧 가문에서 쫓겨날 예정인 티스베에게 이처럼 좋은 조건이 또 어디 있을까!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녀는 세이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티스베는 설마, 자신이 세이즈에 들어가기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상황을 맞닥뜨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세이즈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조항.

모든 망명자는 범죄 관련 혐의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때는 단순히 내가 안 저지르면 될 줄 알았지.’

난 가만히 있었는데 나를 욕하던 사람들이 단체로 픽픽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다시 생각하니 좀 억울하네.’

회상 끝에 기분이 떫어져서, 티스베는 얼른 소어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어의 무해해 보이는 얼굴은 오늘도 티스베 내면의 평화를 다스리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 무해해 보이는 얼굴이 어쩐지 조금 불안정한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제 뺨을 감싼 티스베의 손 위로 제 손을 느리게 겹쳐 잡아 내리며, 소어가 입을 열었다.

“범인을, 잡으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어의 미간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티스베가 가장 좋아하는 소어의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소어는 도대체 뭐가 걱정이기에 저렇게 애처로운 얼굴을 하는 걸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소어가 머뭇거리며 시선을 내리더니, 말을 이은 덕분이었다.

“만약 범인이 있다면, 그를 잡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거예요, 소어?”

“제가…… 감히, 네. 그렇습니다.”

소어는 차마 티스베의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겠는지, 내내 눈꺼풀을 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티스베는 그 눈꺼풀을 장식한 금빛 속눈썹이 오후의 햇살을 만나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며,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착한 사람이라니까.’

범인을 잡으려다 다칠 걸 걱정해 주다니.

물론 티스베가 겉으로 보자면 별 능력도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그래도.

“나 검술도 꽤 잘하는데요, 소어.”

“부상을 계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날 도와줄 사람도 많아요. 이래 봬도 공작가에 있으니까.”

“그들이 모두 당신의 편일 거라 생각지 않는다고, 불과 지난 만남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티스베는 영 내키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에 말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어서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억력이 좋잖아.’

하긴, 생각해보면 소어는 티스베의 말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이럴 땐 뭐라고 변명하면 좋지. 티스베가 고민하는데, 조금 전과 달리 살짝 인상을 쓴 소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쩌면. 그들이 죽은 건 정말 우연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와 마주쳐서 모욕을 준 사람들이 하루에 하나씩 차례대로 죽어가는 이 상황이요?”

“……실언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죽는 거면 또 몰라도, 하루에 하나씩 죽는 거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죠.”

“그렇군요…….”

소어의 눈이 무언가의 이유로 반짝였지만, 티스베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린 이후라 차마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착잡한 손길로 신문의 헤드라인을 쓸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신문을 덮어놓고 욕하지 못하겠어요. 나라도 의심했을 것 같아서.”

“당신은 너무 상냥하십니다.”

“별로 안 그런데. 사실 여기 신문사 망했으면 좋겠거든요.”

티스베는 신문을 마구 구겨 바닥으로 내던지곤 다시 고개를 들어 소어를 마주 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소어는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그 신문사에 빚이 많다더군요. 가만 두면 어련히 망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예. 며칠 뒤에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놀랍지 않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다정하게 미소 짓는 소어의 얼굴이 아주 상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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