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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화 (2/121)
  • 2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티스베는 기억을 차분히 되짚었다.

    ‘분명 에스텔이 진짜 성녀라는 게 밝혀질 때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어.’

    원작, <괴물꽃>의 시작이 되는 장면이자 에스텔이 자신도 모르고 있던 능력을 일깨운 순간.

    그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티스베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는 벚꽃처럼 흩날리는 에스텔의 긴 분홍색 머리칼.

    당연하다는 듯 티스베와 그녀 주변의 다른 이들의 앞을 가로막고 햇살을 등진 여린 인영. 겁에 질린 그들을 돌아보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다들, 괜찮으세요?”

    구원자가 할 법한 대사까지.

    그때 티스베는 생각했다.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구나.’

    상황은 대충 이랬다. 황실에서 연 사냥회. 사냥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숲으로 들어가고, 남은 이들끼리 호숫가에 모여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차에 갑자기 호수에서 집채만 한 마물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죽음을 직감하며 조금이라도 더 도망치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에스텔은 사람들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태연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날뛰기 직전이던 흉포한 마물을 순식간에 순한 강아지처럼 만들어 발아래 두고는 그렇게 물은 것이다.

    다들 괜찮냐고, 그 특유의 사랑스러운, 봄볕 같은 얼굴로.

    그녀는 강아지를 다루듯 마물을 익숙한 솜씨로 쓰다듬으며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조용하던 호숫가가 갑자기 소란해져서 놀란 모양이에요. 이제 진정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모두가 얼이 빠졌다.

    ‘그 다음은 책과 똑같았지.’

    정말 소름 끼치도록 같았다.

    에스텔 본인은 한미한 자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내내 시골에서 살다 이제 겨우 데뷔를 위해 상경한 탓에 본인이 가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었으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정예 기사 한 부대가 달려들어야 겨우 한 마리를 해치울 수 있는 마물을 이토록 손쉽게 다루다니!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 광경은, 그리고 에스텔은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내게 했다.

    에스텔이 속한 일레르 자작가가 어느 가지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는지.

    그리고, 신탁의 내용도.

    칼릭스트의 방계 가문, 일레르 자각가의 여식이 가진 특별한 힘.

    사람들이 그 사실을 가지고 신탁을 재해석하는 데에는 긴장을 내려놓는 그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설마, 일레르 영애가……”

    “설마가 아니라 정말인 것 같은데요? 칼릭스트 공녀와 일레르 영애는 동갑이잖아요!”

    순식간에 뒤집어진 신탁. 그리고, 에스텔에게 쏠린 사람들의 관심.

    굳이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방금, 성녀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그녀가 여태껏 신탁의 주인공으로서 마땅히 감내하도록 강요받았던 모든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그건 이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던 티스베에게도 꽤 소슬한 일이었다.

    ‘내가 왜 책에서 그토록 에스텔을 미워했는지도 이해가 가.’

    정확히 말하자면, 어째서 그토록 성녀 자리에 집착했는지 말이다.

    마물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티스베의 뒤로 몰려들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에스텔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관심을 뺏긴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의 박탈이었다.

    앉을 수 없는 의자가, 물이 새는 컵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건 더 이상 의자도 컵도 아니다.

    단지 쓰레기일 뿐.

    일평생 성녀에 걸맞는 특별함을 연기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온 삶.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듯 아득바득 모두가 바랐던 성녀가 되어 살아왔는데, 사실은 자신이 성녀가 아니었다니.

    ‘성녀여야 하는 내가, 사실 성녀가 아니라면.’

    그럼 나는 뭐지?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성녀가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고, 당시의 티스베는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책에서 티스베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무언가 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에, 에스텔이 아니야. 내가 신성력을 썼어요! 마물을 물리친 건 나야……!

    그러나 모두가 에스텔이 한 것을 보았는데, 과연 누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단 말인가.

    그렇게 티스베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 되었다.

    아, 물론 <괴물꽃>에서 말이다.

    티스베는 그렇게 멍청하게 진창으로 굴러들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인파를 뚫고 가 가장 먼저 에스텔의 손을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에스텔, 정말 대단해요. 덕분에 우리 모두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군요.”

    감사 인사는 뒷전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닭처럼 목을 늘여 빼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티스베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이라니. 신탁의 주인공은 어쩌면 당신이었을지 모르겠어요, 에스텔. 칼릭스트의 이름을 빌어 당신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실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쟁이, 혹은 사기꾼이라는 오명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그래서 티스베는 에스텔에게 그렇게 말한 뒤, 사람들이 아직 얼이 빠져 있을 때 서둘러 자리를 떴다.

    괜히 미적거리다가 더 얽혀서 좋을 것은 없을 게 뻔했으므로.

    ‘분명 그때까진 괜찮았어.’

    그래서 이제 순순히 성녀 타이틀을 내려놓고 새 삶을 개척해 보려 했는데.

    제게 한 번씩 시비를 걸고 갔던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 나자빠지는 이 환장할 만한 상황이라니.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대체 이게 뭐하는 상황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그리고, 신문 건너편에서 달그락 하고 찻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 왔다.

    티스베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있는 자리가 어느 자리인지 자각했다.

    ‘아차.’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지금은 오후였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이 그녀가 가문에서 정해 준 약혼자와 티타임을 가져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티스베는 서둘러 신문을 덮어 내려놓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 건너편, 밀빛의 금발 청년이 눈에 띄었다.

    티스베의 약혼자이자, <괴물꽃>의 악역으로 등장하는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푸른 다이아몬드를 박은 듯 아름다운 눈동자에, 오랜 기사 생활에도 불구하고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피기 직전의 복숭아꽃처럼 살짝 분홍빛이 도는 뺨과, 훌쩍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순수해 보이는 표정까지.

    그는 ‘순결’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외양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성격 역시 꼭 그만큼 다정하고 착했다.

    원작에서도 흑화한 티스베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다가 티스베의 계략에 말려들어 죽게 될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그는 그 성정답게 티스베의 중얼거림을 지나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울 테니, 심려가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아, 아니. 별일 아니에요. 소어. 내가 너무 신문에 몰두했네요, 미안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티스베. 원래도 티타임에 신문을 자주 읽곤 하셨잖습니까. 저는 괜찮으니 편히 계세요.”

    티스베의 사과에 금발의 청년, 소어가 다정히 대답하며 마주 미소 지었다. 그는 정말로 티스베가 평소에도 신문을 자주 읽곤 했으니 이번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분명 티스베가 평소에도 그와 있는 시간에 신문을 뒤적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한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아름다운 금발과 벽안의 소유자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그는 끔찍하게도 말수가 적었으므로.

    그래서 그 끔찍한 침묵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티스베는 종종 신문을 꺼내 놓고 소어와 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늘도 소어와 할 얘기가 좀 있을까 싶어서 하녀에게 신문을 가져오라고 한 건데.’

    막상 받아 보니 1면 헤드라인에서부터 정신이 팔려서 소어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약속에 나와서 신문에 코를 박고 있다니. 분명 불쾌감을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어는 다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신문을 읽으며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혹 무슨 기사가 당신께 심려를 끼쳤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염려가 되는군요.”

    이게 천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천사일까?

    티스베는 소어에게 미안해하던 것도 잊고, 그 훌륭한 인품에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박수를 다 보낸 다음에는 소어의 고운 미간에 잡힌 주름 개선을 위해 그의 앞으로 신문을 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이 기사 때문에요. 마네트 후작이 마차 사고로 죽었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소어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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