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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23화 (완결) (123/123)

123화

“무슨 일로 부른 거지? 결혼식 준비로 바쁜데.”

데반은 단호한 어조와는 달리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듣기로는 노집사를 제외한 모든 이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나도 거절당해, 겨우겨우 그를 내 방으로 부른 참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준비라니?

“결혼식 준비요?”

지금껏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게 모두 결혼식 준비 때문이라는 건가? 아스트릴라의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그래. 아, 안 그래도 물을 게 있었는데 드레스는 하얀색이 좋은가?”

“……네?”

“보통 하얀색으로 하던데, 꼭 하얀색이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보통 하얀색을 선호해서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하얀색이―”

“잠깐만요, 데반. 하얀색이 뭐요?”

“결혼식 드레스 말이다. 저번에 보아하니 아스트릴라가 입힌 건 영 안 어울리던데.”

“그보단 당신이 사 왔던 그 깃털 가득한 드레스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거 아녜요? 더 안 어울리는 건 그쪽이었는데.”

“그래서 하얀색이 좋다고?”

자꾸 하얀색, 하얀색……. 아무래도 내 드레스까지 데반이 직접 고르려는 듯했다. 그 미적 감각으로 드레스를 고르면……. 생각에 빠져 있자 데반이 금세 대답했다.

“역시 다른 색이 좋지? 특별한 색으로―”

“아뇨, 하얀색으로 할게요! 저 하얀색 좋아해요!”

필사적으로 대답하자 데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 차라리 하얀색이 낫겠지……. 하얀색 드레스가 예쁘지 않기도 힘들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번 결혼식은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온 제국민이 아닌 우리를 아는 사람만 불러서 할 생각이니 조금 모양새가 우스워도 괜찮겠지.

“그보다 데반,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아, 그래.”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당신의 저주……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래?”

“……기쁘지 않으세요?”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해서 물었다.

“기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했다시피 난 저주나 예언 따위는 이제 상관없어서. 만약 그 방법이라는 게 코델리아와 관련된 거라면 별로 고치고 싶지 않은데.”

어쩐지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해, 나는 짧게 웃음을 삼켰다.

“아니에요. 제가 고칠 수 있어요.”

“오래 걸리나? 보다시피 내가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이번엔 삼키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데반에게는 결혼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게 하찮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제 저주까지.

“오래 안 걸려요. 우리 예전에 했었잖아요. 그런 치료일 뿐이에요.”

안심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데반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안 하는 게 낫겠군.”

“네? 왜요? 오래 안 걸렸잖아요. 그냥 손 좀 잡고―”

“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하라고.”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힐다의 힘을 전혀 이기지 못해 걸핏하면 픽픽 쓰러졌었지.

“이번엔 괜찮아요.”

“그 말을 내가 몇 번이나 들었다고 생각하지?”

“정말이에요. 힐다가 직접 말해줬어요. 이제는 제가 그 힘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편지에 썼다시피 신을 만난 이후로 제 신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거든요.”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눈동자로 데반이 나를 바라봤다.

“정말이에요. 믿어도 돼요.”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손을 내밀었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면서도 데반은 잘 훈련된 것처럼 내 손 위로 손을 착 얹었다.

정말이지. 이 덩치의 사내가 자꾸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 안 되는데.

“그럼 시작할게요.”

“잠깐 아무래도―”

“집중해요, 데반.”

*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혼식 당일이었다. 아니, 빠르게 흐른 게 아니라 데반이 빠르게 준비한 쪽에 가까웠다.

그는 별궁 정원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겠다고 선언하더니,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정원 쪽으론 발길도 향하지 못하도록 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그토록 많은 건지.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 조금 우스꽝스러워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식장의 모습을 비밀로 부치는 데반의 모습을 보자 불안감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 깃털이 가득한 건 아니겠지.

“오늘 결혼식이 아니라 서로에게 저주를 기원하는 행사라도 하는 겁니까?”

“펠로스, 왔군요.”

대기실로 들어오며 펠로스가 빈정거렸다. 그는 내가 떠난 이후 아스트릴라가 있는 황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들었다.

신전이 사라졌으니 신관의 신분도 물론 사라졌고.

“제 평생 이런 행사는 처음이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주라니?”

“레이디께선 설마 아직 못 보신 겁니까?”

그의 눈빛에 순간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닥쳐, 키베온. 에블린은 식이 시작하면 그때 볼 거니까.”

불쑥 옆으로 다가온 데반이 펠로스를 노려봤다.

저주를 기원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도대체 식장에 무슨 짓을 해 놨길래…….

“걱정하지마, 에블린. 마음에 쏙 들 거다.”

“네에…….”

“드레스도 마음에 들었잖아, 안 그래?”

“네에…….”

그의 말대로 드레스는 뭐…… 나쁘진 않았다. 데반의 심미안에 비해 이 정도면 선방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마도 노집사의 도움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저, 뭐 식순이라든가 그런 건 없나요?”

어떻게든 결혼식을 예상해 보기 위해 슬쩍 물었으나 데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형식은 필요 없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아, 네에…….”

“우리는 같이 입장해서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내내 같이 있을 거야. 정해진 건 그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대기실도 데반과 내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저번에 신전에서 했을 땐 각기 다른 방이었는데.

“하객들은 다 도착한 건가?”

데반의 물음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에게 물으면 어찌 아나.”

“왜 모르지? 하객이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설마 전에 말했던 목록이 정말이란 말인가?”

펠로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맞다면 다 도착했을 걸세.”

“잘됐군.”

입꼬리를 올린 데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다란 손가락과 거기에 끼워진 오팔 반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럼 갈까?”

“……좋아요.”

손을 맞잡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모든 불안감을 없애 주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식은 지체 없이 진행됐다. 모두를 앞장세워 보낸 뒤, 우리는 별궁 정문에서부터 정원에 마련된 식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단둘이 걸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따사로웠고, 꼭 맞잡고 있는 손은 든든했다.

결혼식이 아니라 데반과 그저 산책을 나온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데반.”

“그래.”

“우리 내년 건국제에…… 아니다, 언제든 번화가로 다시 놀러 가지 않을래요?”

“물론이지.”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데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분수대에 앉아서 맛있는 것도 먹고, 축포는 건국제 때만 하는 거라 못 보겠지만 밤 구경도 하고요.”

“원한다면 축포 정도야 언제든지 보여 주지. 아, 머지않아 아스트릴라의 제위식이 있을 테니 그때 가는 것도 좋겠군.”

“그것도 좋고요. 그냥…….”

“그냥?”

“같이 있으면 다 좋아요.”

“……그래.”

데반이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아 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꽃과 천으로 장식된 아치가 보였다. 그 뒤로 식장의 전경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데반.”

“마음에 안 드나?”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아무도 못 보게 한 이유가. 펠로스가 저주를 기원하느냐고 비아냥거렸던 이유가.

쭉 뻗은 길 양쪽으로 황금색과 검은색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이리저리 뒤섞인 그것들은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보석 같기도, 밤하늘에 떠 있는 별 같기도 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확실히…… 다른 이가 본다면 서로에게 저주를 건다고 오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서로의 머리색을 꼭 닮은 꽃이라니.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애정의 증표였다.

“당연히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의자도 준비돼 있지 않아서, 하객들은 선 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로스는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카렌은 마냥 좋다는 듯 웃으며 손에 쥔 와인잔을 높게 들었다.

노집사는 감동을 받은 듯 연신 눈물을 훔쳤으며 그 옆에 선 유니스는 즐겁게 박수를 쳐 주었다.

정무가 바빠 오지 못한 아스트릴라를 대신할 새빨간 화환도 보였다. 그 역시 머리칼과 똑같은 꽃이라니. 데반의 짓이 틀림없었다.

그 옆으로 미소 짓고 있는 코델리아가 보였다. 몸이 거의 회복된 그녀는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다며 곧 별궁을 나갈 거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길을 떠나겠다며,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이 자리에 오진 않았지만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떠나간 힐다도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은 언젠가 또 다른 만남으로 찾아오리라.

첫 번째 결혼식처럼 신전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하객은 없었지만, 축복은 그 이상이었다.

그 무엇보다 우리다운 결혼식이었다.

엄숙하지도, 신성하지도 않았다. 지켜야 할 형식은 없었고, 대신 충만한 마음이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티끌 하나 없는 데반의 붉은 눈동자 가득 애정이 들어차 있었다.

“사랑해. 사랑한다, 에블린.”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맞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평범하기에 무엇보다 특별한 하루였다.

해피엔딩은 필요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 본편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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