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네가 두려웠다.”
내가, 두려웠다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역시 데반은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거겠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내가 미운 거겠지, 내가…….
“너에게 괜히 마음을 고백했다가, 네가 내 곁에서 떠나갈까 봐. ……그게 두려웠다.”
“…….”
떨궜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는 불과 몇 분 전 내가 힐다에게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고.
“하지만 막상 네가 사라졌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았어. 내 마음을 영영 전하지 않는 것보단 어떤 식으로든 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
“데반…….”
“후회하지 않는 만큼, 딱 그만큼 괴로웠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제야 데반의 얼굴이 많이 상해있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없는 두 달 동안 데반은…….
“네가 남긴 편지를 읽었다.”
움찔, 몸이 떨렸다. 그 안에는 내 구질구질한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했던 내 추잡한 속내가.
“……에블린.”
한 발자국 더 다가온 데반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네가 떠난 이유가 내 마음 때문이라면, 내가 싫고 증오스럽고 무서워서 떠난 거라면 나는 너를 찾지 않으려고 했어. 그게 널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얼굴보다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무릎, 아니…… 무릎에 얹어둔 손이었다. 정확히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오팔 반지.
“나는…… 왜 아닌 것 같지?”
“뭐, 뭐가요…….”
나도 모르게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왜…… 네가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지? ……내 착각일 뿐인가?”
“편지를…… 보셨다면서요.”
“그래.”
이어질 말이 두려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한평생 저주와 함께 살았다. 앞을 보지 못하고 보낸 시간이 앞을 보며 보낸 시간과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그래, 나에게 저주는 증오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족쇄였다. 너를…… 납치할 만큼.”
“……그래요. 그리고 나는 그 저주를 풀지 못했죠. 편지에 썼다시피 그건 모두 내가……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가, 내가 코델리아를 알면서도 거짓말했어요.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내 여신님은 너 하나뿐이라고.”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데반, 그런 건―”
“에블린. 예언이 어떻든, 저주가 어떻든. 설령 저주가 영영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데반이 크게 숨을 골랐다.
“나는 너라면 상관없어. 아니, 너여야만 한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느새 데반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데반.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데반, 일어나요!”
순식간에 낮아진 시선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둥대며 데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편지를 읽고 가장 먼저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아나?”
“그야…….”
증오스러웠겠지. 내가 미웠겠지.
“고마웠다.”
“……네?”
“살아줘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줘서. 고마웠어.”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았다. 고맙다고. 내가 살아있는 게…… 고맙다고.
“에블린. 네가 싫다면…… 이대로 자리를 떠도 좋아. 다시는 널 찾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저주니 예언이니 그딴 것 때문에 나를 피한 거라면…….”
데반이 나와 눈을 맞췄다. 붉은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검은 얼룩이 스멀대고 있었다.
그가 내 앞에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오팔 반지가 반짝거렸다.
“딱 한 번만, 나에게 널 행복하게 만들 기회를 주지 않겠나.”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내가…… 내가 뭐라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 사람은 나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이 세상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나와…… 다시 한번 결혼해 줘.”
데반이 내민 손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 듯 안겼다.
“미안, 미안해요. 나는…….”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들은 데반이 대답했다.
“괜찮아. 그게 뭐든 다 괜찮다. 내 마음에 대한 거절만 아니라면.”
“나는……. 나는, 절대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꼴사나울 정도로 헐떡거리며, 한 마디 한 마디 겨우 뱉어냈다.
“나는…….”
“에블린.”
진정하라는 듯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서둘러 말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데반, 내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겨우 눈을 마주했다. 데반의 붉은 눈동자 안에 내 볼썽사나운 얼굴이 비쳤다.
검은 얼룩은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를 속인 증거였다. 그리고 또, 내가 살아남은 증거이기도 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도, 그래도 되나요?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요?”
데반의 눈이 조금 크게 뜨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따듯한 감촉이 내 눈가에 와닿았다.
그의 입술이 내 눈물을 모조리 훑어낼 것처럼 눈가와 볼 위에서 배회했다.
“데반…….”
“얼마든지.”
그러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깊게 닿은 잇새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곧이어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치열을 훑었다. 입천장을 간지럽히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데반은 순식간에 나를 몰아붙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눈물이 섞인 입맞춤에선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입술을 맞댄 채로 데반이 말했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
별궁으로, 우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마차가 오는 걸 기다려야 했다.
데반은 급한 마음에 말을 타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 어떤 호위도 없이 혼자서.
마차가 오기까진 시간이 걸렸기에, 우리는 그동안 내가 지냈던 벽돌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말을 타고 가도 돼요? 눈이 많이 쌓여서…….”
“걸어가는 것보단 빠를 거다.”
데반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말 위에 앉히곤, 자신은 그 뒤에 자리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뒤에서 나를 껴안듯 팔을 뻗은 데반이 고삐를 쥐었다. 순간 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다룰 뿐이었다.
얼마 안 가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편하게 기대도 되는데.”
“……아니, 괜찮아요.”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곤, 안 그래도 뻣뻣하던 허리를 더욱 뻣뻣하게 폈다. 뒤에서 작게 데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힘주다 다친다.”
슬쩍 힘을 풀긴 했지만 그렇다고 데반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댔다가는… 데반의 탄탄한 가슴팍이 내 등에 닿을 거고… 그럼 꼭 껴안은 것처럼 보일 거고….
몸서리치는 나를 데반이 뒤에서 꾹 붙잡았다.
“위험하대도.”
“……미안해요.”
불과 몇 분 전의 키스를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온도, 감촉 따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자 고개를 번쩍 들고 차가운 공기를 맞았다.
“그나저나 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는 건가? 얼어 죽지 않은 게 용하군.”
“생각보다 다닐 만해요. 많이 추워요?”
얇게 입은 데반이 걱정돼 한 말이었지만 데반은 짧게 혀를 찼다.
“나 말고, 너.”
“……저 근데, 데반. 여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내내 궁금했었다. 절대로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온 건지. 그것도 그렇게 정확한 장소로…….
“글쎄, 직감이라고 할까.”
“네에?”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이곳에 네가 있을 거라는 게…… 이상하리만치 강하게 느껴졌거든.”
“그럴 리가…….”
퍼뜩, 머릿속에 힐다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당장의 행복은 내가 조금 도와줄게. 마지막 선물이라고 해두자.’
“마지막 선물…….”
힐다였구나. 힐다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선물?”
“힐다요. 그 아이, 그 힘이…… 나를 지켜 주고 있었어요. 지난 두 달, 아니 지금까지 계속이요. 당신에게 이곳을 알려준 것도 힐다일 거예요.”
“지켜 줬다라…….”
“그런데 마지막 선물이라고 한 건…….”
“잘됐군. 드디어 사라질 모양이지.”
데반의 음성이 신경질적이었다. 하긴, 힐다는 나를 지켜 줬을지는 몰라도 데반에게는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겠지. 그를 오래도록 괴롭혔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없어져도 내가 있잖아.”
“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려다 순간 휘청한 나를 데반이 재빨리 붙잡았다.
“지켜주겠다고. 지금처럼.”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뺨을 에는 듯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도 내 얼굴은 속절없이 달아올랐다.
데반이 들어오자 안 그래도 작은 내 벽돌집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그는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을 듯했다.
“이런 곳에서 지낸 건가?”
그는 불만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마저도 한 번의 고갯짓으로 충분했다.
“나름 좋아요. 얼른 이리로 와서 불 쫴요.”
서둘러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말하자 데반이 다가와 앉았다.
“익숙하군.”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지냈다니…….”
“그래도 이젠, 이젠 쭉 같이 있을 거잖아요.”
부끄러운 소리를 하자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벽난로 핑계를 대기 위해 괜스레 더욱 열심히 불을 피웠다.
뒤에 앉으라는 내 말에도 데반은 굳이 불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게 뭐예요?”
“같이 있자며. 그러기 위해 꼭 사라져야 할 물건이지.”
그러더니 종이를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집어던졌다. 순식간에 종이로 옮겨 붙은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네? 뭔데요?”
당황하여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한 데반이 답했다.
“네가 편지와 함께 남겨둔 거.”
편지와 함께 남겨둔 거? 내가 뭘…….
“아…….”
멍청하게 탄식했다. 이혼장을 말하는 거구나.
“그게…….”
“그만하고 뒤로 오지.”
들고 있던 불쏘시개를 빼앗아 정리한 데반이 나를 끌고 카펫 위로 갔다.
“좀 쉬어.”
우리는 카펫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불을 쬈다.
무릎을 껴안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대자, 내내 긴장하느라 쌓여있던 피로가 쏟아졌다.
“맞다, 데반……. 혹시 그 꽃도 당신이었어요?”
“꽃?”
“왜 저 테이블 위에…….”
손을 들어 가리키고 싶은데 온몸이 물이라도 먹은 듯 축축 쳐졌다.
난 그제야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데반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는 거지……. 보고 싶은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이것도 그자의 소행인 모양이군.”
그자라면…… 힐다? 꽃을 보낸 게 힐다라고?
“네가 사라지고…… 꽃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지. 네 머리칼과 똑같은 황금빛 색의 꽃만을.”
어쩐지 다 황금빛이더라……. 데반의 낮은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게 자꾸 한 송이씩 사라졌다. 누구 짓인가 했더니 그자였나 보군.”
“아아…….”
웅얼거리며 대답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말을 내뱉자 데반이 한 번 더 웃었다.
카펫에 아무렇게나 놓인 손 위로 그의 손가락이 옭아 들어왔다.
따듯하고 포근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잘 자, 에블린.”
낮은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면 이런 게 행복일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