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재미가 하나도 없었어! 죽은 듯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재미가 있을 리가. 정말, 정말! 지긋지긋하게 지루했다고!”
힐다가 표효하듯 소리쳤다.
“……그럼 그만 지켜보고 떠나지 그랬어.”
“내 말이!”
발을 쾅 구른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다시 어리광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자꾸 네가 눈에 밟히는 거야!”
“힐다…….”
“날 좀 재밌게 해보란 말야!”
소리치던 힐다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모닥불을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쏘아보더니, 이내 숨을 골랐다.
“내 말의 요지는, 그러니까 여기 좀 처박혀 있지 말라고. 이제는 행복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지금껏 널 지켜본 보람을 느끼게 해달라고.”
행복……. 자꾸만 목 끝에 턱턱 걸리는 단어였다.
“내가 보증한다잖아. 너는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니라, 그저 새로운 미래를 개척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내내 걸렸던, 내가 엘리운에 도망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예언의 주인공은?”
“뭐?”
“데반의 저주를 고칠 수 있는 예언의 주인공 말이야. 그건…… 그건 여전히 코델리아잖아. 나는 데반의 저주를 고칠 수 없었어. 그의 눈에는 여전히 검은 얼룩이 남아 있다고.”
이번에는 힐다 역시 말문이 막힐 줄 알고 물었던 것이었는데, 외려 그녀는 지금까지 중 가장 답답한 얼굴을 했다.
“이 바보야, 그건 그냥 내 힘일 뿐이야!”
“……뭐?”
“그 녀석을 치료할 때 너는 몇 번이고 나를 느꼈잖아.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고 너 스스로 생각했잖아. 아니야?”
“그랬…… 었지.”
“애초에 저주니 예언은 모두 신전에서 만든 것에 불과해. 그들이 황족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지. 너도 알다시피 그건, 어느 정도 막대한 신력만 있다면 쉽게 풀 수 있고!”
그래, 그랬었다. 그런데도 데반의 것은 풀리지 않았었지. 그래서 나는……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저주를 풀지 못 했다고 생각한 거였고.
하지만 저주니 예언이 모두 신전의 농간이라면…….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거야? 그놈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던 건 그때 내 힘이 너보다 강했기 때문이었어.”
<미안하지만 넌 날 몰아낼 수 없을 거야.>
장난기 섞였던 그 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힐다의 힘이 내 속으로 침투했었지.
“하지만 이젠 달라. 이제 너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단 말이야. 그날, 대신관 놈이 내 힘이 든 마석을 가지고 널 공격했던 일 잊었어?”
대신관이 나를 공격했던 일?
건국제 날, 대신관이 검은 마석을 들고 달려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데반의 앞을 막아섰었고, 마석은 내 몸에 닿아 순식간에 색을 잃었었지.
“내가 아까 말했었지. 너는 완벽한 에블린 디에고로 다시 태어났어. 그 후로 막대한 신력을 가지게 됐고. 얼마나 막대한지 내 힘을 정화시킬 정도였다고!”
“내 신력이 마석을 정화시킨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그 신력으로 다시 해 봐. 지금 다시 한다면, 분명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데반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다. 예언의 주인공이 아닌 내가…….
“너밖에 못 하는 일이야! 지금 이 제국에서 가장 신력이 센 건, 아니 지금까지 중 가장 센 게 널걸? 거기다 네가 읽었던 미래에서 코델리아가 치료한 그 저주는 내 힘이 아니라 정말 단순한 저주일 뿐이었거든.”
슬쩍 손을 쥐었다. 내 몸속에 가득한 강력한 신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원래 단순한 저주였다면 지금은 왜 다른 건데? 왜 네 힘이 데반의 눈에 들어있는 건데?”
“너에게 흥미가 생겼다고 했었잖아. 죽어야 할 네가 죽지 않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흥미가 생겼거든. 내가 이 모든 일에 끼어든 건 모두 너 때문이었어.”
“내가…….”
“모두 네가 만든 거야, 에블린. 이 미래는 네 것이라고.”
나는 힐다가 어느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그녀가 나를 동정한다거나, 그래서 없는 말을 지어낸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위해주고 있다는 걸.
나를 바라보는 갈색의 동그란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빛을 담고 있었다.
“코델리아가 신이 선택한 예언의 주인공일지 몰라도 내 주인공은 너야, 에블린.”
그 순간, 울컥 눈물이 터졌다. 고작 담담한 그 한 마디에.
지금껏 그 누구도 나에게 주인공이라고 해준 적이 없어서일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죽어버리는 조연, 사라져야 할 엑스트라 같은 게 아닌 이 세계 한 명의 인간으로.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난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스스로를 불행 속에 가두는 일은 이제 그만해.”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는 나를 비웃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달래 줘야 할 아이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너무나 성숙한 태도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너는 그저 두려운 거야. 행복을 몰랐던 때라면 모를까, 한 번 행복을 맛봤다가 다시 불행 속으로 처박히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내 마음을 모조리 꿰뚫는 듯한 말에 잠시 멎었던 눈물이 다시 뚝뚝 흘렀다.
그래, 난 두려웠다. 빼앗길 행복이라면 영원히 모른 채 살고 싶었다.
“데반이…… 그 사람이 언젠가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모든 게 착각이었다고 한다면? 버림받으면 어쩌지?”
“가진 적이 있어야 버릴 수도 있지. 지금 넌 가져본 적도 없는 주제에 버려질 걱정을 하고 있는 거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힐다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렸을 때는 신전이, 조금 더 큰 후에는 백작이, 그리고 지금은 누가 널 괴롭히고 있지?”
“…….”
“너 스스로야, 에블린.”
쿵, 머리가 울렸다.
“시간은 수많은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너희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도, 언젠가 헤어질지도 모르지. 그건 누구도 몰라.”
“……그래. 나는 그게 두려운 거야. 그가 나를 떠날까 봐, 우리가 헤어질까 봐.”
울음을 삼키고 말하느라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말했잖아. 미래의 너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야. 현재의 너.”
현재의 나…….
“지금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거야. 평생 그 오만한 녀석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다시는 그 녀석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단 소리지.”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힐다가 불쑥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찾으렴. 그럼 내일의 행복은 자연히 따라올 거야.”
“힐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무언가에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됐니? 행복해질 준비가 된 거야?”
“난, 난…….”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내 마음을 모두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장의 행복은 내가 조금 도와줄게. 마지막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탁― 튕겼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만이 가게 안을 채우고 있었다.
“……힐다?”
여전히 눈물은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혹시…… 내가 환상을 본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게, 힐다는 꼭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행복해지라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고개를 떨구자 한 번도 몸에 떨어트려 놓은 적이 없던 오팔 반지가 보였다.
정말로 데반의 곁에 있어도 될까? 그가 나를 용서해 주긴 할까? 저주를 치료해 준다고 해도…….
반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말 한마디 없이 떠나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돌아간다 한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천막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힐다가 다시 온 걸까? 아니면 혹시 진짜 헤론 아저씨?
퍼뜩 고개를 드는 순간, 천막이 걷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너무나 익숙한 새하얀 손이었다. 그다음에 보인 건 엘리운과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차림이었고, 그다음엔…….
“에블린.”
데반이었다. 선물처럼,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새하얀 눈을 등진 채 허름한 가게 안에 그가 서 있었다.
“……거짓말.”
겨우 내뱉은 한 마디가 이거였다. 너무나 거짓말 같았다. 이건, 이것도 환상인 건 아닐까?
“……에블린.”
데반이 천막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정말로, 그였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다고, 그렇게 도망쳐 버려서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었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만이 벽면에서 일렁거렸다.
“에블린, 나는…….”
데반은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우리 사이로 숨도 쉬기 힘든 정적이 흘렀다.
“나는…… 네가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