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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9화 (119/123)

119화

<“그렇게 놀라워?”>

쨍-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잔이 시끄러운 파열음을 냈다.

“너, 너…….”

힐다가, 힐다가 여기에 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는 학습 능력이 참 없구나.”>

헤론의 얼굴에서 힐다의 말투가 들리자 영 느낌이 이상했다. 주춤거리자, 한숨을 푹 쉰 힐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수염이 난 사내에서 주근깨 가득한 소녀로 겉모습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두 갈래로 들리던 목소리도 내가 알던 하녀 힐다의 목소리로 변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곳에 정말로 이 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정말 기막힌 우연일 뿐이라고?”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너, 그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헤론 아저씨가 다 너였다고?”

“그건 아냐. 그저 내가 우연을 만들어 냈다 이 소리지. 헤론이 이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하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로 멍하니 있자 힐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네가 만났던 자는 헤론이 맞다고. 대부분.”

“대부분?”

“뭐……. 가끔 들어와서 본 적은 있지. 네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힐다가…… 내 곁에 있었다고? 웃기게도 그 말을 듣자 무섭다기보단 안심이 됐다. 그동안 혼자인 줄 알았더니…….

“뭘 그러고 서 있어? 앉아. 할 얘기가 아주 많으니까. 아니, 이야기보단 잔소리에 가깝겠지만.”

어쩐지 힐다가 평소처럼 장난기 많은 어린애가 아니라 연륜 있는 여인처럼 느껴졌다. 늘 그녀를 따라다니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탓일까.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자 그녀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일단 첫 번째.”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겨 바닥에 쏟아진 잔을 원상 복귀시킨 그녀가 내 손에 잔을 쥐여줬다.

“도대체 왜 도망친 거야?”

“그건―”

“너 그놈 좋아하잖아. 그놈도 너 좋아하고.”

미처 변명할 새도 없이 힐다가 말을 쏟아 냈다.

“그 더러운 놈들도 해치웠고, 코델리아도 괜찮다고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됐는데 도대체 왜 도망을 친 거냐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도대체 뭐가?”

“난 이미 정해진 운명을 봤는걸.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전생에서 이미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는 걸.”

“허!”

힐다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정말로 고작 그런 이유에서라고? 네가 본 게 정해진 운명이라서?”

“내가 모든 걸 망친 거잖아. 너도 그렇게 말했던 거 잊었어? 나 때문에 코델리아가 죽어 간다고,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네가 죽기 전 얘기지! 널 다시 태어나게만 만들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더니.”

죽기 전……?

“그 녀석과 만난 거 아니었어? 모든 얘기를 다 들은 거 아니었냐고.”

“그 녀석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신 말이야. 그날 내가 널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해 줬잖아.”

“아…….”

힐다는 코델리아를 살리기 위해 내 신력을 쏟아붓고, 신에게 전말을 들었던 그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만났어.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고.”

“그런데? 그런데도 왜 아직까지 운명 운운하고 있는 거야?”

왜 운명을 운운하고 있느냐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미래가 내 과거와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건 들었어. 시간이 동그랗다고……. 그러니까 내가 본 게 결정된 미래가 맞다는 거잖아.”

“아니, 그건 그저 수많은 미래 중 하나일 뿐이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친 힐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이내 진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건 맞아. 하지만 현재 역시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안 그래? 네가 도망치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으니까, 지금 이 추운 곳에 처박혀 있는 것처럼.”

“……그래서?”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네. 시간에는 수많은 가지가 있어.”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을 높게 올리더니,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다.

“무슨!”

바닥으로 떨어져 깨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잔은 그대로 둥둥 뜬 채였다. 힐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그 안에 있던 찻물이 잔에서 새어 나와 허공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물이…….”

꼭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물이 스스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시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 시간이 원이라는 건 들었대도? 그 덕에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자, 자세히 봐.”

힐다가 손짓하자, 물로 만든 원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보라니……. 그렇게 말해도 그저 여전히 소용돌이치는 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 물은 꼭 하나 같지. 하지만―”

탁― 손가락을 튕기자,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꼭 수십 개의 실로 만든 실타래 같았다.

“이번엔 몇 개 같아?”

“어?”

탁― 그녀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자 물이 더욱 가늘게 나뉘어졌다. 투명하리만큼 얇은 물줄기들이 나타난 것이다.

멍하니 그 수를 세고 있자, 힐다가 한심한 얼굴을 했다.

“셀 수 없어. 물을 어떻게 세겠어. 네가 두 개의 잔에 나누면 물이 두 개가 되고, 백 개의 잔에 나누면 백 개가 되잖아.”

“……그래서? 이게 시간이랑 무슨 상관인데?”

“시간도 같다는 소리야. 시간은 꼭 하나 같지. 하지만 무수히 많아.”

무수히 많다…….

“네가 본 미래, 네가 읽은 이야기. 그래, 코델리아가 여주인공이던 그 이야기도 분명 미래 중 하나야.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 역시 미래 중 하나야. 그것들은 나뉘어져 있지만, 또―”

그녀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해졌다.

“하나이기도 하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내 얼굴을 바라본 힐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 마디로, 네가 본 이야기와 지금의 현실 그 무엇도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다는 소리야. 네가 읽은 게 본래의 것이고, 지금이 바뀐 게 아니라. 그저 똑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미래일 뿐이라고.”

제대로 이해하진 못 했어도, 그녀의 말이 코델리아가 한 말과 비슷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너는 지금의 너일 뿐이야. 물론 넌 죽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게 정해진 운명인 건 아니야. 그저 선택의 문제라고. 너는 이것과 그것 중 그것을 선택했고, 네 미래를 스스로 개척한 거야.”

원작이… 원작이 아니라고. 그저 내가 만든 미래와 똑같이, 하나의 가능성 있는 미래였을 뿐이라고….

그 말은…… 데반이 나를 사랑하는 감정 역시 착각 같은 게 아닌, 진심이라는 뜻인가?

“하지만, 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믿어도 될까? 아니,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데반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 그 원작 이야기가 기억나긴 해?”

“……뭐?”

“희미해지지 않았어?”

작게 입을 벌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코델리아가 원작 속 신전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된 건지도 알고 있는 거야?”

힐다가 턱을 약간 들었다.

“물론이지.”

“뭔데?”

“그건 말이야. 그게 사라진 미래라서 그래. 파기된 미래. 선택받지 못한 미래라서.”

“……사라진 미래?”

“쉽게 말해 없었던 일이 됐다, 이 말이야. 네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으니까. 그로 인해 다시 태어나 버렸으니까.”

“다시 태어났다는 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을 수 있다고 했잖아. 네 몸에서 신력이 모두 빠져 나가고, 네가 죽은 날. 그리고 네가 태어난 날. 그날 넌 네 전생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었어.”

그날……. 생각해 보니 그날이 분기점이었다. 그때부터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졌었다.

단순히 원작에 대한 것뿐 아니라, 전생에 겪었던 다른 일들조차.

내가 전생에 어떻게 생겼었는지, 이름이 뭐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든 게 이제는 정말 오래전 꾼 꿈처럼 희미했다.

“너는 완벽한 에블린 디에고가 된 거야. 그러니 기억도 희미해질 수밖에.”

완벽한…… 에블린 디에고. 죽기보다 싫었던 디에고였는데, 힐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 힐다가 손을 휘둘러 여전히 공중에 떠 있던 찻물과 잔을 멀리 치웠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한 거 맞아?”

불쑥 얼굴을 들이민 그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지켜봐 왔어. 네가 새로운 시간의 줄기를 만들어 뻗어 나가는 것도 그랬고, 끝과 시작이 섞인 아이는 처음이었거든. 흥미로웠지. 처음엔 그 정도였어.”

“…….”

“다 재밌어서 했던 거야. 너에게 힘을 빌려줬던 것, 너를 구해줬던 것, 놀리듯 네 앞에 나타난 것 모두.”

그래, 재미없는 건 싫다고 했었지.

“널 다시 태어나게 만든 것 역시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였어. 그리고 넌 생각대로 신전을 쓰러트리며 나에게 재미를 줬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지난 두 달간. 엘리운에 와서도 널 지켜봤어. 그리고 어땠는지 알아?”

힐다의 눈썹이 순간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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