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래서 모든 걸 대신관 개인의 짓으로 돌리고 신전은 계속해서 운영된단 소리인가요?”
따지듯 묻자 펠로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에게 그렇게 물어봤자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귀족들의 의견, 키베온 공작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나보다 더 화가 난 목소리로 유니스가 끼어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저는 분명 신전에 갇혔다고 증언했어요, 대신관의 자택이 아니라!”
그녀 역시 황궁에 여러 번 불려 가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만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구슬을 운반한 것뿐 아니라, 신전에게 납치당한 증인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거기에 코델리아 아가씨는 어떻고요! 그분은 아주 괴로워하시면서 모든 이야기를 하셨어요.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던 폭력과 방치를…….”
코델리아……. 문득 들려오는 이름에 몸이 움찔 떨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역시 백작 저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땐 손발이 절로 떨리곤 했었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학대당했는데……. 신전의 추악한 짓거리가 백작 저의 그것보다 덜할 리도 없었다.
펠로스가 유니스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래도 황태녀 전하께서 있으니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황태녀 전하께서는 당연히 신전을 없애실 생각이신 거죠?”
“물론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게 아닙니까. 데반 놈도 마찬가지고요.”
그날 이후로 나는 데반을 통 만날 수 없었다. 여러 진술과 증언을 할 때 스치듯 지나가며 본 게 다였다.
단순히 황족이기 때문에 더 바쁜 거라고 생각했는데.
“데반은 황태녀 전하를 돕고 있는 건가요?”
“예. 전하께서는 황위 찬탈을 위해 착실히 길을 밟고 계시거든요. 그 일을 돕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께서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알 필요도 없는 정치 다툼 같은 것 말입니다.”
황위 찬탈이라……. 이 난리 통에 그녀가 황좌에 오른다면 모든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신전을 무너뜨리는 일에 전면으로 나선 것도 모두 이런 것을 위해서였겠지. 정말로 그녀가 황위에 오르게 되는 걸까.
“하여튼 그러니…… 레이디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에 대해 생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뇨?”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펠로스가 눈을 찡긋거렸다.
“언제까지 제 호기심을 막을 순 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날 말입니다. 레이디 코델리아가 깨어났던 날. 이제는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차례입니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펠로스는 지금 내가 신과 만났던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죽어서 신력을 잃고, 다시 태어났던 그 날.
“모든 일이 끝났으니 말해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건…….”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검은 마석……. 세간에는 흑마법으로 알려진 그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만이라도요.”
내내 기다려 왔던 것처럼 펠로스가 강하게 설득했다. 옆자리에 앉은 유니스 역시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원으로 이루어졌다느니,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느니 하는 것들은 말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힐다의 힘이 무엇인지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이들은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줬으니 모든 일의 전말을 알 필요가 있었다.
대신관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 힘에 대해 아는 인간은 아마 나뿐일 테니까.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힘에 대해, 힐다에 대해 알려줄게요.”
펠로스의 낯빛이 흥분으로 상기됐다.
“다만, 그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
다음 날, 1층 구석에 있는 손님용 방 앞에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유니스조차 물리고 혼자 찾아온 곳은 코델리아의 방이었다. 누구보다 그녀에게 먼저 모든 사실을 밝히고 싶었으니까.
오늘이야말로 내내 결심했던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아니,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죄를 하는 것.
심호흡을 하다 노크를 하기 위해 막 손을 들었을 때였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에블린?”
반쯤 몸을 빼던 코델리아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는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코델리아.”
“무슨 일이에요? 나를 만나러 온 건가요?”
코델리아가 반가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얼굴이 많이 상해 있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황궁에서 반복적으로 증언을 한 탓이겠지. 비록 일이 좋은 쪽으로 마무리됐다고는 하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안타까움이 긴장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대신했다.
“혹시 지금 바빠요? 어딜 가려던 것 같은데.”
“아뇨, 괜찮아요. 그냥…… 산책이라도 조금 할까 했어요. 요새 통 햇빛을 못 본 것 같아서.”
“그럼 같이 정원으로 갈래요?”
놀란 표정을 하고서도,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좋아요.”
자연스럽게 앞장서자, 코델리아가 나를 따랐다. 기쁜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더욱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마침내 우리는 긴 복도를 지나 정원에 다다랐다.
“앉아서 차라도 마실까요? 할…… 이야기도 있고.”
머뭇거리며 말했으나, 코델리아는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시녀가 금세 티테이블을 마련해줬다. 모두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한 뒤, 우리는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핼쑥해진 얼굴을 하고서도, 코델리아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나오니 좋네요. 앞으로도 자주 나와요. 물론…… 에블린만 괜찮다면요.”
자주라…….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꼬리만 겨우 올렸다.
“저…… 코델리아.”
“아, 할 말이 있다고 했죠.”
뭐든 괜찮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녀의 진녹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뒤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로 시선을 옮겼다.
이젠 정말로 말할 때였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망설여선 안 되는 일이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믿기 힘든 이야기일 거예요. 그리고 아마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네?”
동그란 진녹빛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에요. 당연히, 그럴 염치를 가지고 있진 않아요. 저는 그저 모든 걸 알면서 말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진정해요, 에블린. 천천히 말해도 돼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내 손등을 코델리아가 쓸어내렸다. 가슴께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토해내듯 고백했다.
“당신을 그 고통 속에 살게 만든 게 나예요.”
“……네?”
“모두…… 다 내 잘못이에요.”
테이블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핏대가 도드라진 코델리아의 작은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고, 죽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뒤바꾼 것부터.
강아지를 희생시키면서도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렇게 버티다 데반에게 대신 납치당한 일을. 그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다는 것을.
원래대로라면 내 자리가 바로 당신의 자리이고, 나 때문에 당신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까지 겪었다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신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신력과 흑마법의 정체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셀 수 없이 연습한 내용이었지만, 중간에 몇 번이고 말을 멈춰야 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렇게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코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모든 걸 내가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리예요. 원래 당신은 열한 살에 죽은 나를 대신해 백작가에 입양됐어야 했어요. 그 후엔 데반에게 납치를 당하고….”
“잠깐만요, 에블린.”
혼란스러운 얼굴로 코델리아가 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미래를 알고 있었고, 그 미래를 바꿨다는 이야기인가요?”
“맞아요. 그 미래에선 당신이 대공비였어요. 내가 모든 걸 빼앗은 거예요. 내가 다 바꿔 버렸다고요.”
“하지만…… 자신이 죽을 미래를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요?”
분노나 억울함을 한 조각도 담지 않은 진녹빛 눈이 깜빡거렸다.
“…그런 게 아니에요, 코델리아. 그건 이미 정해진 미래였어요. 나는 책을 읽은 거예요. 당신이 주인공인 책을요. 그 책에서 나는 금방 사라질 조연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럼 그 이야기 속에서 신전은 어떻게 됐죠?”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대공비가 되고 당신이 죽은 그 책에서 신전은 어떻게 되나요?”
원작에서 신전은…… 어떻게 됐더라?
데반과 코델리아가 사랑에 빠진 후, 데반은 그녀를 위해 신전과 백작가에 복수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어떻게 복수를 해서 어떤 결말을 맞았지?
“에블린?”
대답 없는 나를 바라보며 코델리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원작의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순히 신전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홱, 고개를 돌려 코델리아를 바라봤다. 그래, 신전뿐 아니라 알고 있던 원작의 내용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눈을 떠, 이 진녹빛 눈동자를 바라봤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코델리아가 대공비가 되고, 이 별궁에 살고, 데반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런 장면들이 머릿속에 선명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읽었던 책 <태양의 여신>에 대해서.
1권 표지는 디에고 백작 가문의 인장이었고, 2권 표지는 란티모스가의 인장, 그리고 3권, 3권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