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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3화 (113/123)

113화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함성? 그제야 내 눈에 수많은 제국민이 들어왔다. 단상 아래에서 지금껏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대공비 전하! 대공 전하!”

함성들 사이로 간간이 나와 데반의 이름이 들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선 데반을 올려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데반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눈을 맞춰 왔다.

“다 끝났어.”

다…… 끝났다. 정말로 다 끝났다고…….

내 손을 붙잡은 채 데반이 단상의 중앙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함성이 더욱 커졌다.

멍하니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한 명 한 명 눈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꼭 막이 내린 연극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적을 무찌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우리를 향해 관객이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우리의 편이었다. 그토록 신전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절대로 바뀔 것 같지 않았던 이 세계가…….

붙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데반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신전을…… 무너뜨렸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울컥 치솟는 무언가를 토해내고만 싶었다.

“에블린.”

검붉은 눈동자가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데반……. 입술만 벙긋거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 울어도 된다.”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한 손이 내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는 울고 싶은 거구나.

호흡이 순식간에 밭아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꼭 제 감정의 정체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데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눈물이 흘렀다.

데반이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그 너른 품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얼굴을 묻자,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눈물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울면서 웃는 건 무슨 경우지?”

역시나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데반이 물었다.

“행복해서요. 그래서…….”

“……그래.”

행복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났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인공이어도 괜찮다는 듯, 모두의 환호 소리가 광장을 메웠다.

나는 데반의 품이 모두 젖을 때까지 펑펑 울었다. 지금까지 울지 못했던 그 모든 나날들을 대신하여 아주 오래도록.

*

현실은 연극과는 달랐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으로 막을 내린 커튼 뒤편에는 처리해야 할 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신전은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역사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단 하루, 단 한순간으로 그들을 완벽히 없애버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들이 그다지 유기적인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저 대신관 한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신관을 제외한 신관들은 한 마디로…… 아는 게 없었다.

그들이 아는 거라곤 하얀 마석으로 생명을 조종할 수 있고, 검은 마석으로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가까운 신관들에 한해서였다. 그보다 더 말단들이 아는 것은 그저 신력을 강탈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였다.

고작 그런 것 따위에…….

그들에게 신앙심이나 충성심 따위는 없었다. 그들을 연결시켜 준 건 오로지 돈과 권력, 명예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신관이 잡혀가자,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다. 지금껏 그랬듯 꼬리를 자르려는 속셈이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신전이 저지른 악행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그 주범으로는 대신관이 지목됐다.

대신관은 집요하리만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조사는 그 이상으로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아스트릴라는 모든 일에 앞장섰으며, 코델리아 역시 자신이 당한 일들을 증언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나와 데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계속해서 황궁에 불려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껏 있었던 일을 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밝힐 수 있는 모든 사실을 밝혔다. 어린 시절 신전에서 무슨 일을 당했으며, 함께 있었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디에고 백작이 나에게 한 짓과 그와 연루돼 있을 귀족들의 이름도 빠짐없이 말했다. 그에 신전뿐 아니라 신전과 유착관계에 있던 귀족 가문들도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내내 건국제를 떠올렸다. 그 꿈 같았던 하루를.

모자랄 것 없이 행복한 하루였다. 번화가를 구경하고, 축포를 보고, 신전과 맞섰다. 그 모든 일에 데반이 함께였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 자리가 내 것 같았는데…….

“레이디, 오랜만에 뵙는데 얼굴이 죽상이시군요.”

대뜸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펠로스?”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내 방이었고, 지금은 늦은 오후였고,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막 누인 참이었다.

“여기에 어떻게…… 아니 왜 온 거죠?”

“유니스가 들여보내 줬습니다. 당연히 레이디를 뵈러 왔고요.”

펠로스는 익숙하게 티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곤 제가 주인인 양 나에게 어서 앉으라며 손짓했다.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였다. 펠로스가 이런 짓을 벌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의 맞은편에 앉자, 준비된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리고 유니스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차와 쿠키가 들려 있었다. 오래전 펠로스가 내 방에 왔을 때 목이 막히도록 먹었던 그 쿠키였다.

“……유니스.”

“그게…….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슬쩍 노려보자 유니스가 멋쩍은 얼굴로 변명했다.

“마님께선 계속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싶어 하셨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귀엽게 웃으며 그녀가 차를 세팅했다.

유니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 일의 가장 중심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신전은, 특히 대신관은 황제보다도 위에 군림하던 자였다. 그런 자가 무너져 내렸으니…….

황제와 고위 귀족들 모두가 이 일에 어떻게든 관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신전의 부재로 생긴 권력의 한 귀퉁이를 어떻게든 얻어 내려고 한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신전의 악행을 폭로한 게 누구인지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권력뿐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신전을 경쟁적으로 끌어내리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펠로스 당신이 뭔가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렇다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당사자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그야 물론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겐 명석한 두뇌와 잘난 얼굴 등 써먹을 게 아주 많지요.”

눈을 가늘게 뜨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이번에 써먹은 건 키베온 가문입니다만.”

확실히 키베온 가문은 제도에서 가장 권세가 센 공작 가문 중 하나였다. 펠로스는 그곳의 차남이었으니 흘러들어 온 정보를 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키베온 가문과 연을 끊을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끊을 때 끊더라도 얻을 건 얻어야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돼 가고 있어요?”

유니스가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유니스, 너도 앉지 그러니.”

“네? 그래도 돼요?”

“그럼.”

이제 유니스는 하녀라기보단 우리와 함께 모든 일을 치른 동지에 가까웠다. 사실상 이번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기도 했었고.

뿌듯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유니스가 다시 물었다.

“얼른요, 신관님. 신전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신관은 처형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처형……. 대신관이 죽는다고…….

“뭐랄까…. 놀랍네요. 그자가 한 짓에 비하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신관의 한 마디에 벌벌 떨던 자들이 처형을 거론하니 우습긴 하죠.”

“……네. 그렇네요.”

“권력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한 번 삐끗하면 동전 뒤집듯 돌아가 버리지요. 하지만 신전 그 자체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어찌 됐든 신력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제국민들에게 그건 곧 신의 증거가 아닙니까.”

“하지만 신전은 뿌리부터 썩었어요. 대신관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물론 우리 생각은 그렇죠.”

펠로스가 낮게 혀를 찼다.

“좀 애매하게 됐습니다. 모든 게 초대 대신관, 그러니까 마르시오텔리오스 1세가 벌인 짓이라는 게 밝혀졌거든요.”

“그자 혼자서 벌인 일이라고요?”

“그 검은 마석 말입니다. 하얀 마석은 아이들, 특히 레이디 코델리아의 신력을 빼앗아 만들었지만, 검은 마석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몰랐지 않습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검은 마석에 든 것은 힐다의 힘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없었고.

“마르시오텔리오스 1세의 힘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자가 검은 마석을 무한히 많이 만들어뒀다더군요.”

그 자가…….

그 순간 신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처럼 상성이 잘 맞는 어떤 이가, 우리와 우리의 힘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과연 어떻게 했을까?’

‘누군가는 지배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한단다.’

그게 초대 대신관이었구나. 두 가지 힘 모두와 상성이 맞는…… 욕심 많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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