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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1화 (111/123)

111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저자를 죽여야겠습니다.”

대신관의 말에 다른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이어진 좁은 복도에는 보는 눈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흑마법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상대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약간의 소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당장 구슬을 빼앗기는 것보단 나았다.

빠르게 처리한다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신관들도 모두 같은 생각인 듯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저 하녀는 기껏해야 평민 나부랭이입니다. 죽는다고 신경 쓸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 찾는다 해도 힘과 돈을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았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순진한 하녀는 복도를 망설임 없이 걸었다.

“그럼, 항상 하던 방식으로 하는 게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그쪽이 시신이 남지 않으니…….”

“대신관님, 그럼…….”

대신관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기다란 소매를 걷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색의 마석이 들려 있었다.

그들이 입은 온통 새하얀 옷과 대비되어 마석은 더욱 눈에 띄었다.

하녀가 그들에게 점점 다가왔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도 함께였다.

“옆에 있는 자는…….”

“아까부터 함께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동료 하녀일 겁니다. 같이 처리하죠.”

하녀 둘은 우르르 몰려 있는 신관들이 이상한 듯 고개를 한 번 갸웃했으나 그게 다였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서로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정도의 저리였다.

“거기.”

한 손에 마석을 든 대신관이 고개를 까딱였다. 유니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콰앙―

대신관이 그대로 마석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굉음이 들리며 새까만 연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됐습니다!”

신관 중 하나가 이른 함성을 내질렀다.

“둘 모두 산산조각이 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연기로 가득한 사위를 손으로 휘저으며 신관들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완전히 해치웠다. 그 믿음을 보답받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던 그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게.”

대신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공기가 달라졌다.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바람이다. 바람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사방이 꽉 막힌 복도 안이었는데 지금은…….

채 사라지지 않은 검은 연기 사이로 수많은 눈동자가 빛났다. 모두 그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아무도 없는 좁은 복도가 아니었던가. 저희들과 하녀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런데 이 시선들은 대체…….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공간을 이동한 건가? 아니, 그런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곳과 완벽히 같은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그러다 시선 속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흑마법이다! 신전이 흑마법을 사용했다!”

그 목소리를 필두로 모두가 꿈에서 깬 듯했다. 와아― 높고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포보단 분노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잠, 잠깐!”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대신관은 오직 그 한 마디만 다급하게 내뱉곤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다른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대신관과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꼭 그와 자신은 다르다는 듯이.

“아니,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로 대신관은 습관처럼 변명했다.

평소의 위엄 있는 모습과는 상반된 그 태도에 고함과 야유는 더욱 거세졌다.

그에 기름을 붓듯, 우렁찬 목소리가 소리쳤다.

“보아라, 신전이 흑마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무고한 하녀 둘을 죽이려고 했다!”

와와― 거리는 소리가 온통 거리를 에워쌌다.

“온 제국민이 평등하며, 신 앞에서는 그 어떤 신분의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대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었는가!”

대신관은 그제야 겨우 소리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황태녀, 아스트릴라였다.

그녀가 단상에 오른 채 목소리를 키워주는 마도구를 이용해 전 광장에 이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저 하녀는 기껏해야 평민 나부랭이입니다. 죽는다고 신경 쓸 사람은 없습니다.]

불과 몇 분 전 대신관이 했던 말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이게…….”

마침내 검은 연기가 모두 걷혔다. 대신관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까지 그들이 서 있었던 응접실의 복도, 그 복도와 단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져 있었다.

모두가 보고, 듣고 있었다.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제국민들 모두가…… 그들이 방금 전 하녀를 죽이기 위해 했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검은 마석을 바닥에 내리꽂았던 것도. 자신의 입으로 흑마법의 증거라고 수십 년간 떠들었던 검은 연기를 온 사방에 퍼트린 것까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마탑주에게 부탁해 이 자들을 모두 죽인다면……. 모두 몇 명이지? 건국제를 보기 위해 온 제국민이 모두…….

잠깐, 하녀는? 하녀는 어떻게 됐지?

대신관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검은 연기가 모두 걷힌 복도 맞은편에는 둘이 아닌 넷이 있었다.

유니스와 코델리아, 에블린과 데반.

“이럴수가…….”

대신관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코델리아, 코델리아였구나.

유니스의 옆에 있던 이름 모를 하녀가 그녀였다. 마도구를 이용해 외양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마도구가 없었더라도 못 알아봤을지도.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지금까지의 축 늘어진 생기 없던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분노가 가득한 또렷한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니스, 괜찮아?”

그 옆에 있는 에블린은 어떻고. 대신관은 오래 전, 그녀를 백작가에 입양시켰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를 다시 신전에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죽여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전 괜찮아요, 마님!”

씩씩하게 말하는 유니스의 옆에서 에블린은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마치 구처럼 그들 주위를 감쌌다.

신력으로 만든 보호막이었다. 그게 흑마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준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저 정도의 신력이 남아 있는 거지? 저것만 있다면, 그렇다면 다시 엄청난 돈을…….

그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살아남아야 돈을 갖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대신관의 시선이 다시 단상으로 향했다. 잔뜩 신난 얼굴의 아스트릴라는 중계와 선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저질렀던 일은 마도구를 통해 영상과 음성으로 반복되어 온 광장에 퍼져 나갔다.

“젠장…….”

대신관은 차근히 상황을 가늠했다. 이 상황을 당장 수습하는 건 불가능했다. 무슨 말을 해도 분노에 가득찬 제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 후에 마탑주를 만나 모두를 죽이든, 모두의 기억을 지우든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다른 신관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가 만만해 보였다.

애초에 서로를 신경 쓸 사이도 아니었다. 우정도, 신앙심도 없었다. 그저 돈에 현혹돼 대신관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신앙심은 무슨.

신전은 돈을 쓸어 모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대신관, 그윈델라니오 유사브 볼테리아 폰 마르시오텔리오스 17세.

그가 대신관의 위치에 오르고 모두를 지배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마르시오텔리오스 가문에 내려오는 한 가지 지식 덕분이었다.

‘하얀 힘과 검은 힘. 두 개의 힘은 시작과 끝의 힘이며, 그 힘을 마석으로 봉인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고작 그게 다였다.

고작 그걸로 모두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래,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관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신관들을 버리자. 이들을 미끼로 삼아, 빠르게 도망치는 거다. 그 후에 다시 계획을 짜자.

이번에는 흑마법을 이용한 공포정치를 하는 것도 좋겠지. 어둠 속에 숨어 그럴듯한 꼭두각시 하나를 내세우기만 한다면 이 멍청한 족속들은 다시 그들에게 지배당하리라.

“자, 이제 쇼는 모두 끝났다!”

꼭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스트릴라가 번뜩 소리쳤다.

“전 근위대병에게 고한다. 당장 신관들을 잡아들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 뒤로 수많은 병사들이 줄을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관은 빠르게 제 품의 마석과 병사들의 수를 헤아렸다.

하얀 마석이 하나, 검은 마석이 둘 남아 있었다.

하나 남은 하얀 마석으로 스스로를 보호한 채, 검은 마석을 하나 사용한다.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테니 그 틈에 빠져나간다면…….

문득, 대신관의 시선 끝에 하얀 빛무리가 걸렸다.

에블린……. 젠장, 그녀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신력으로 모두를 보호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에블린을 먼저…….

대신관의 입매가 비틀렸다.

생각해 보면 모두 저 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저 애가 그 멍청한 디에고 백작가에 입양 가지만 않았어도 모든 일이 순탄했으리라.

코델리아가 신력을 잃었을 때도 금세 충전할 수 있었을 거고, 돈도 두 배로 벌어들일 수 있었겠지.

애초에 저 정도의 막대한 신력을 가진 자가 처음이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컸다.

죽이자. 에블린도 코델리아도 모두 죽여 버리는 거다.

저런 돌연변이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었다. 비록 저만큼의 신력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쉽지만 욕심을 버리는 거다.

외려 저들이 죽고, 신력의 희소성이 높아진다면 적은 신력으로도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죽이지? 지금 에블린의 신력은 눈으로 봐도 막대해 보였다. 검은 마석 하나로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약점을 잡아야 하는데, 뭔가를 뒤흔들어서…….

그러다 대신관의 눈에 에블린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데반 란티모스. 꼭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길게 뻗어진 손가락과 초조한 눈동자가.

그러고 보니 둘이 결혼을 했다고 했던가.

“재미있군.”

대신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아이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생기다니.

그걸 부순다면 에블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대신관은 이 모든 일에 에블린이 주도적으로 개입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대공이나 황태녀에게 이용당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애일 뿐이니까. 입양되지 않았더라면 그저 시키는 대로 신력을 뽑아내다, 얼마 안 가 죽어 버렸을 아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들끓는 복수심을 어찌하지 못했다. 외려 그렇기에 분노가 더욱 큰 걸지도 몰랐다.

고작 그런 아이가.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주제에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제 앞을 막아서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저 당당한 표정이 무너져 내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는 검은 마석을 손에 꼭 쥐었다.

“으아아!”

그리곤 주위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근위대병을 무시한 채 그대로 데반 란티모스에게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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