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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0화 (110/123)

110화

“찾아야 될 게 정확히 뭡니까?”

어두운 방 안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행색을 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은 구슬입니다.”

개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이는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얀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신비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겁니까.”

질문보단 질책에 가까웠기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공대했으나, 대화의 우위를 점한 자는 분명했다.

“생각해 둔 건 있는 겁니까?”

“그게… 구슬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테이블에 앉은 다른 이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 구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는 겁니까? 별궁입니다, 별궁! 거기에 쳐들어가기라도 하자는 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마법사를 하나 고용한다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 대공이 바보입니까? 분명 찾을 수 없는 곳에 꽁꽁 숨겨 뒀을 겁니다.”

“하지만 대신관께서는 마탑주와도 친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 무슨 마법이라도 뚫을 수 있을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대신관에게로 향했다.

“이미 저번의 일로 빚을 진 상태에서 또 부탁을 하라는 겁니까? 그것도 도둑질을?”

대신관이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차마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때,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젊은 여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신관님, 제게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정보?”

“그들이 건국제에 맞춰 구슬을 운반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건국제라고?”

테이블이 술렁였다.

“어디서 얻은 정보입니까?”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준 자와 같은 자입니다.”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다른 사내도 끼어들었다.

“제 쪽의 정보원도 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건국제는 확실한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건국제라면 고작 삼일 뒤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짧은 정적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생각에 빠져있던 대신관이 문득 말했다.

“어째서 건국제지?”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테이블 위의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손을 들었던 여자가 다시 말했다.

“건국제에는…… 매년 황족이 연설하는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연설?”

“그 연설은 제국민들 모두가 주목하는 커다란 행사입니다. 그곳에서 구슬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아닌지…….”

그럴듯한 이야기에 다시금 모두가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이번엔 한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연설하는 건 황태녀가 아닙니까. 황태녀는 우리와 척을 질 생각이 없을 텐데요.”

순간 대신관의 하얀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황태녀라고? 그는 처음 데반 란티모스를 붙잡았을 때, 황태녀에게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

데반을 확실히 끝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우리 역시 그녀가 차후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었지.

어차피 그녀가 황태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신전의 예언 덕분이었다.

이 제국에서 신전의 힘이 그 정도였다. 똑똑한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대신관은 그날 그녀가 보여주었던 은근한 미소를 떠올렸다. 제안을 들은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즐거운 미소…….

그리고 황태녀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황태녀가 대공과 손을 잡았을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맞습니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연설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건국제일지…….”

술렁이는 소음 사이로 대신관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함정이다.”

“예?”

황태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 적도 없었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그녀는 우리를 버리고 멍청하게도 데반 란티모스와 손을 잡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관은 이를 악물었다. 하얀 마석이니 뭐니 협박을 당해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황태녀가 우리를 배신할 생각입니다!”

테이블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녀가 어째서…….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그 정신 나간 자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소!”

“그렇다면 정말로 연설에서?”

그들의 머릿속에 비슷비슷한 장면들이 스쳐 갔다.

모든 제국민의 시선을 받으며 단상 위에 오른 황태녀, 그 손에 들린 구슬, 어쩌면 그 옆에 서 있을 코델리아까지…….

“막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다른 이들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막죠?”

갈 곳을 잃은 시선이 하나, 둘 대신관에게로 향했다. 도움을 구하는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대신관이 분노로 붉게 물든 눈을 치뜨며 대답했다.

“연설이 시작되면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겁니다. 기회는 그때뿐입니다.”

*

퍼엉― 펑― 축포가 터졌다.

잠시 후면 아스트릴라의 연설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그 이후엔 신관들의 설교가 이어질 거였다.

때문에 그들은 연설이 이루어질 단상 바로 뒤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응접실은 간소하게 꾸며졌으며, 신관들뿐 아니라 몇몇 고위 귀족들도 함께였다.

개 중 긴 수염을 늘어트린 대신관은 품 안에 숨긴 마도구를 이용해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고 있나.’

마도구 건너편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녀 하나와 함께 이동 중입니다. 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다.

‘계속 주시하게.’

―예.

그들이 감시하고 있는 건 유니스였다.

구슬의 운반책이 그녀라는 건 이미 입수한 정보였다.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대공 저에서 데려온 하녀였다. 황궁의 사람이 아니니 믿을 만하고, 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

대신관은 보이지 않게 비웃었다.

머리를 꽤나 썼지만 그게 다였다. 그들은 이미 모든 전말을 꿰뚫고 있었다.

유니스는 아스트릴라에게 구슬을 전달할 테고, 아마도 그건 연설을 시작하기 직전이리라.

그때 그녀를 조종해 구슬을 황태녀가 아닌 자신에게 가져오도록 하면 된다.

그들은 하얀 마석을 이용해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 대공들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고,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지금, 정말로 구슬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외려 당할 수도…….

대신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대신관님.

마도구가 웅웅거리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무슨 일이지?’

―하녀가 구슬을 꺼냈습니다.

움찔,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물건이 확실한가?’

―확실해 보입니다. 조종할까요?

‘그래, 시작해.’

―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의 입꼬리가 점차 올라갔다. 혹시 그 하녀가 구슬을 운반한다는 게 틀린 정보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하긴, 그놈들이 그렇게 머리를 쓸 수 있을 리가.

감히 신전을 협박해? 대신관은 이를 갈았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대공과 황태녀를 가만 두지 않으리라. 이 참에 황제를 끌어내리고, 아예 황권을 가져오는 것도 괜찮겠지.

자신이 군림한 제국을 상상하며 그는 음습하게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대, 대신관님!

‘무슨 일이지?’

―이상합니다. 조종이…… 마석이 안 먹힙니다!

‘뭐?’

그럴 리가. 대신관은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접실 안, 몇몇 신관과 귀족들의 시선이 꽂혔다.

대신관은 겨우 침착함을 유지한 채, 신관들에게 눈짓했다.

“잠시…… 얘기 좀 해야겠군요.”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관의 눈짓에 따라 나머지 신관들도 우르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황급히 단상과 죽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단상에 올라 설교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신관들의 얼굴도 모두 제국민들에게 익숙한 자들이었다.

이를테면 결혼식에 주례를 보는 신관, 돈을 주면 신력을 쓸 수 있는 아이와 연결해 주는 신관, 황제에게 대신관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관…….

“무슨 일입니까?”

그중 하나가 대신관에게 물었다. 대신관은 복도를 슬쩍 둘러보다 조금 더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종이 되지 않는다는군요.”

“……예?”

신관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얀 마석이 들지 않는다는 소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드래곤도 움직이는 것인데, 그깟 여자 하나를…….”

“신력이 부족한 건 아닙니까?”

“어쩌면 그들이 무슨 수를 썼을 수도…….”

답답한 말에 대신관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조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설령 마탑주가 오더라도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이리저리 떠드는 목소리로 복도가 술렁거렸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죠?”

그러다 한 신관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대신관은 새하얀 수염을 쥐어뜯을 듯이 쓰다듬으며 고심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상황은 어떻답니까?”

그가 서둘러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나.’

―아무리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석이 들지 않아요. 혹시나 해서 다른 마석을 사용했지만…….

‘하녀는 어디로 가고 있지?’

―단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계속 뒤를 쫓는 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대신관님!”

마도구와 주위에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대신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퍼엉―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곧 축포가 끝납니다. 그 후엔 황태녀의 연설이에요!”

그리고 그 연설에 구슬이 등장한다면…….

―하녀가 단상 뒤 건물로 들어갑니다. 이제 곧입니다.

“대신관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문을 열려고 합니다. 따라갈까요?

대신관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단상까지 연결된 길은 이 복도가 유일했다.

이제 곧 그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 놓친다면 구슬이…….

“대신관님, 이러다 끝납니다!”

그 순간, 복도 끝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으로 갈색 머리칼의 하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대신관님?

“대신관님!”

순진한 얼굴의 하녀를 빤히 바라보며, 대신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저자를 죽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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