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어쩐지 사람이 좀 줄어든 것 같지 않아요?”
에블린의 말에 데반이 먼발치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곧 축포가 시작될 모양이군. 다들 그걸 보기 위해 가고 있는 모양이야.”
“되게 큰 행사인가 봐요.”
“그렇지. 일 년에 딱 한 번, 건국제에서 제국의 위엄을 보이는 일이니까. 우리도 갈까?”
“어디로 가는 건데요?”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싶은지 멀리서 봐도 괜찮은지에 따라 다르지.”
“으음…….”
데반은 에블린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곤 그녀가 여러모로 갈등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까이 가는 게 나을지 그냥 멀리서 볼지, 아니 애초에 축포를 보러 가도 되는 건지…….
이대로 뒀다간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속마음과는 다른 말을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앞자리는 다들 선점했을 테니, 멀리 가지.”
그래서 데반은 에블린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
머뭇거리던 에블린이 못 이기는 척 그의 뒤를 쫓았다.
“저, 어디 아는 곳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과는 정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걷는 데반의 옆에 따라붙으며, 에블린이 물었다.
“시야가 트인 곳을 알고 있거든.”
“데반은 많이 봤나 봐요.”
“아주 어릴 적 별궁 꼭대기 탑에서 딱 한 번. 먼 거리라 잘 보이지도 않았어. 거기다 그걸 들킨 이후론 건국제에 외출 자체가 금지됐지.”
“네? 어째서…….”
“붉은 눈의 황자가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증오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니, 두려워하는 게 맞으려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에블린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니 너도 나도 이번이 처음인 거다. 공평하지?”
짐짓 가벼운 투로 묻자 에블린이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대해. 제도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를 알고 있으니까.”
“건국제에 나와 보지도 못했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명색이 황족인데, 조금쯤 나은 점도 있어야지.”
사실은 네가 가판대를 구경할 때 펠로스에게 연락해서 물었다고, 데반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퍼엉― 펑― 커다란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에블린은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들은 번화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외진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사람보다 나무가 더 많은 곳이었고, 부지가 높아 축포가 아주 잘 보였다.
“저거 봐요, 데반. 건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요!”
평소보다 확연히 들뜬 표정으로 에블린이 말했다.
“그래.”
에블린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데반은 제 옆의 에블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축포가 터지면서 퍼지는 빛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다홍빛의 눈동자에 금빛 점이 알알이 박혔다.
퍼엉― 하나의 커다란 축포가 터지며 작은 불꽃들을 뿌렸고, 마치 새처럼 이리저리 날아간 불꽃들은 또 수많은 불꽃들을 뿌렸다.
아래로 떨어진 불꽃들은 꽃잎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사라졌다.
“너무 아름다워요.”
에블린은 바삐 눈동자를 움직이며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았다.
데반의 시선이 그녀의 크게 뜨인 동공에서부터 오똑하게 솟은 콧등, 콧망울을 지나 입술로 닿았다. 불빛 따위 없어도 내내 붉었던 입술로.
“……그렇군. 정말 아름다워.”
그는 제 입술을 아무렇게나 짓씹고, 서둘러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다채로운 불꽃들이 눈앞을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붉은 색만이 맴돌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러 개의 축포가 한 번에 터지며 밤하늘에 황금빛 사자를 만들어냈다.
사자는 마치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크게 포효하고,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이내 황궁 쪽으로 달려가며 사라졌다.
“이제 곧 연설이 시작될 거다.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사자가 지나간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데반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끝난 거예요?”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축포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놓고, 너무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아서.
다행히 데반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황가의 상징을 보여줬으니 이제 아스트릴라가 모습을 드러낼 차례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나에게 손을 뻗었다.
“건국제에 온 보람을 느낄 차례이기도 하지.”
건국제에 온 보람…….
내 쪽으로 곧게 뻗은 기다란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래, 우리는 신전을 무너뜨리기 위해 건국제에 온 거였다. 같이 길을 거닐거나, 분수대에 앉거나, 축포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괜찮아요.”
나는 데반의 손을 붙잡는 대신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드레스에 묻은 이파리들을 털어내는 척 시선을 피했다.
데반이 내민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더니, 아프도록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문득 일그러졌을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털어냈다. 더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럼 갈까요?”
아무렇지 않은 척 데반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곤, 언덕을 앞장서서 내려갔다.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왔다. 이제는……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아스트릴라가 연설을 시작함과 동시에 유니스가 움직일 것이고,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엘리운으로,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하루를 빠르게 곱씹었다.
머리 위로 쏟아졌던 햇살과 볼을 간질이던 바람결, 다디단 냄새들. 내내 붙잡았던 부드러운 손의 감촉, 낮은 웃음소리, 같은 곳을 향했던 시선들.
그중 하나도 잊고 싶지 않았다.
달콤한 꿈이었고, 사치에 가까운 하루였다.
모든 게 끝나기 전 이런 추억이라도 만들어서 다행이었다. 오늘 하루를 가지고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
어차피 기대한 적도 없었잖아. 내 곁에 누군가가 함께해줄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잖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혼자……. 그렇게 살아가면 족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살아남았잖아. 본래라면 십 년 전에 죽었을 목숨, 아등바등 살아남았잖아. 그러니 이 정도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비틀거렸다. 툭― 누군가가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고, 난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무작정 걸음을 옮겼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 주위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한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홍수처럼 끊을 수 없는 흐름을 만들었다.
“……데반?”
툭― 툭― 이리저리 밀쳐지며 어떻게든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 번 휩쓸린 인파에서 빠져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어쩌지?
“데반!”
무작정 소리쳤다. 그러나 들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나조차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움츠러드는 어깨에 힘을 줘 버텼다.
일단 이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가자. 그 후에 다시 데반을 찾는 거야. 그는 지금 화려한 금빛 머리칼을 하고 있으니 눈에 띌 거야.
만약, 만약 못 찾으면…….
퍽― 강한 힘이 또다시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몸 전체가 울렸다.
못 찾으면, 못 찾으면 어쩌지?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팔목을 아프도록 당겼다. 그리곤 강한 힘으로 나를 끌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채 깨달을 시간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뜨거운 품 안이었다. 누구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막 몸을 버둥댔을 때였다.
“하아…….”
한숨과도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만으로 긴장이 쭉 풀렸다.
“데반…….”
“나는 네가, 사라진 줄 알고…….”
맞닿은 몸이 나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울컥 저려 오는 마음에 데반의 등을 세게 부여잡았다.
“신전이 무슨 짓을…. 네게 무슨 일이 생긴 줄, 그런 줄 알고….”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데반의 팔이 내 몸을 아프도록 조여 왔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데반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겨있는 건 난데, 꼭 그가 내 품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다시는……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오만한 명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억눌린 목소리였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났다. 그는 오해하기 좋은 말을 정말 쉽게도 했다. 그의 등을 천천히 도닥거렸다.
“이제 괜찮아요. 안심해요, 데반.”
“에블린…….”
그가 나를 품 안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마주친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데반이 퍽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는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어두운 거리에, 데반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설마, 그가 나를……. 정말로…….
“에블린.”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말에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는 없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