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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6화 (106/123)

106화

회의는 예상외로 빠르게 끝났다.

이미 생각해둔 게 있다며, 펠로스가 그럴듯한 의견을 줄줄이 늘어놓은 덕분이었다. 실험 명목으로 나와 코델리아를 붙여 놓았지만 사실은 이미 실험이 성공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그의 작전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아스트릴라는 작전은 단순할수록 좋다고 말했고, 나 역시 그에 동의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도 그 이상의 작전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말로 삼 일 후, 건국제에서 작전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삼 일, 고작 삼 일이라니.

고작 삼 일 후에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모든 게 끝난다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시간이 빨리 흐르면 좋겠다가도, 꼭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는…….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하지. 아, 연락에는 마도구를 사용하도록 해.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까.”

마지막 말을 남기며 아스트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황태녀답게 그녀는 이 작전에 필요한 모든 비용이나 인원을 지원하겠노라 말했다.

한 번 연락하는 데 천문학적인 액수가 든다는 마도구를 아무렇지도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녀 덕이었다.

“자, 그럼.”

아스트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유니스는 집사와 함께 다이닝룸을 정리했고, 펠로스는 혹시라도 모를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봐야 한다며 곧바로 제 방으로 떠났다.

코델리아와 데반, 그리고 내가 다이닝룸에 멀거니 남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펠로스보다 먼저 나갔어야 했는데.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기라도 한 듯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쩐지 그 두 시선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둘 다 꼭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에블린.”

“에블린.”

겹쳐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이런 예상만 적중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코델리아가 데반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결국 선수를 친 건 데반이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이야기를 하자고? 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다이닝룸에 들어섰을 때부터 통 이상했던 데반을 떠올렸다. 어쩌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코델리아에 관한 거라든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에블린.”

재촉하듯 이름을 부른 데반이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빙 돌아오기 시작했다.

데반은 그저 이야기를 하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꼭 그가 사형선고라도 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코델리아에게 운명적 끌림을 느낀 거라면? 그래서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었는지 묻고, 그만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쩌지?

삼 일, 고작 삼 일만 지나면 나는 이 자리를 떠나줄 셈이었다.

그러니까 딱 삼 일, 고작 삼 일만. 아무 질타도 받지 않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 걸까?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고 이리저리 튀었다.

“에블린. 대체 왜 또 그런 얼굴을…….”

그사이에 내 앞까지 도달한 데반이 눈을 맞추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마님!”

다이닝룸의 열린 문틈 사이로 유니스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유니스!”

꼭 구세주 같은 등장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마님 방에 침구를 정리할까 해서요. 시간이 많이 늦어서 혹시…….”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유니스가 말을 흐렸다. 데반이 보란 듯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아, 그렇게 해줄래?”

나는 꼭 데반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 대놓고 티나는 눈초리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황급히 유니스에게 향했다.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얼른 쉬어야겠구나.”

“잠깐, 에블린.”

그러나 다이닝룸을 채 나서기 전에 데반이 내 팔목을 붙잡아 왔다. 움찔, 절로 몸이 떨렸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서둘러 데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팠다면 미안하군. 나도 모르게…….”

“……그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데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졸지에 난감한 입장이 된 유니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잠깐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는 건가?”

“그게…….”

그게 뭐든, 지금은 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혹여라도 그가 나를 밀어낼까 봐. 그게 아니면 섣부른 기대를 품게 할까 봐.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딱 삼 일, 삼 일만 버티면 됐다.

그와 이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싶었다. 비겁하다고 생각될지라도 당장의 이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오늘 신력을 너무 많이 써서…… 조금 피곤하네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변명일 게 분명한 말을 내뱉었다. 제발, 제발…….

“……그래, 알았다.”

피곤하다는 말에 차마 붙잡을 수 없었던 건지, 그게 아니면 내 기도를 읽은 건지 다행히 데반은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모순되는 아쉬움이 마음을 콕콕 괴롭혔다.

*

어떻게 해야 하지?

방으로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 누워, 나는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삼 일 뒤에는 건국제가 열렸다. 그때 우리는 신전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시행할 거고, 그게 성공한다면 모든 일이 끝난다.

신전은 전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무너질 것이며, 아스트릴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위에 오를 것이다.

정말로 그녀가 제 아비를 죽일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황위를 찬탈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뭐, 그런 것들은 애초에 이 제국을 떠날 나에게는 하등 관련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야 할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다시 국경을 넘어 엘리운으로 떠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전보다 나은 상황은 그나마 내 수중에 돈이 꽤 많다는 점이었다. 현금이 아니더라도 보석이나 드레스 따위가 있었으니 언제든 융통이 가능했다.

거기에 그때보다 사리에 밝아졌다는 것도 이점이었다. 이 나라의 화폐 단위부터 엘리운까지 가는 방법, 그곳에서의 생활도 익숙했다. 여러모로 상황이 괜찮았다.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저번보다 낫다는 소리였다. 혼자서 제국을 건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내 마음도 저번과는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던 저번과는 달리,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으니까.

“마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피곤하다며 일찍 누워놓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를 보곤 유니스가 물었다.

침구 정리를 끝마친 그녀는 방 안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너는 걱정 안 되니?”

“뭐가요?”

“고작 삼 일 뒤잖아. 직접 움직여야 하는 건 사실상 너고.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유니스가 테이블을 닦던 걸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걱정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잖아요.”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를 수도 있잖니. 대책이 생길 수도 있고.”

“으음……. 그건 신관님께서 저보다 훨씬 잘해주시지 않을까요? 저보다 모든 종류의 지식에 밝으시니까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나는 대신 몸을 조금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유니스가 청소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문득 물었다.

“유니스.”

“네, 마님.”

“너는 만약 네가…… 누군가에게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유니스가 다시 청소를 멈추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용서받지 못할 짓이요?”

“응, 큰 잘못을 한 거야.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그런 짓을.”

“사과해야죠.”

사뭇 진지하게 물었으나, 유니스의 응수는 가벼웠다.

“사과할 수 없으면?”

“왜 할 수 없는데요?”

“말했잖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래도. 사과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는 거야.”

그래. 원래대로라면 몇 년이나 빨리 신전에서 구출돼, 운명의 상대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코델리아의 인생을 빼앗았다.

고작 사과 몇 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유니스는 내 말에 조금 더 고심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그건……. 만약 상대방이 그 사실에 대해 모른다면?”

“제 잘못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령 제가 마님의 보석을 하나 훔쳤는데, 마님은 그걸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훔친 건 보석이 아니라 인생 전부지만.

“으음……. 일단은 잘못을 고백해야죠. 그 후에 사과하고요.”

“……유니스.”

너무나 도덕적이고 판에 박힌 듯한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마님. 마님께서는 만약 제가 보석을 훔쳤다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받아주지 않으실 건가요?”

“물론 네가 보석을 훔쳤다면 용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심한 짓이라면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르잖니.”

“으음…….”

입술을 삐죽인 유니스가 조금 더 고심하더니 말했다.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사과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용서를 바라는 사과는 저를 위한 사과잖아요. 용서 받는다, 라는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닌가요? 그치만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과는 이득 없이 하는 사과잖아요.”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과…….

“생각해 보세요. 마님의 보석을 훔친 것만으로도 나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이득을 얻기 위해 사과를 한다면 그보다 나쁜 일이 있겠어요?”

“…….”

“만약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평생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속죄라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고백이 아닐까요?”

“하지만……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엄마가 해주신 말씀인데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대요. 아마 언젠가는 알게 될 거예요. 몇 년이 지난 뒤 문득 보석함을 보다 허전함을 느끼실 거라구요.”

그 말에 불현듯, 백작가에서 지낼 때 나를 대신해 죽었던 강아지가 떠올랐다.

미안해서, 두려워서,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서…….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속죄를 몇 년이나 미뤘던가.

강아지의 까만 눈망울과 진녹빛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잘못을 마주하는 게 결국 스스로에게도 좋을 거예요.”

작게 미소 지은 유니스가 이내 청소를 재개했다. 여전히 침대에 상체를 기댄 채,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려고 해선 안 됐다. 아니,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사과가 먼저였다. 적어도 코델리아에게는 이 모든 일에 대해 말해야 했다.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해야만 했다. 외려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과를 해야 했다.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코델리아만을 위해서.

모든 일이 끝나고 고백하자.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는 거야.

침대 시트를 꾹 말아 쥐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건국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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