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5화 (105/123)

105화

펠로스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 데반이 이번엔 반사적으로 에블린의 손을 붙잡았다.

반사적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지도 몰랐다. 데반은 방금까지 펠로스가 붙잡고 있던 그대로, 에블린의 손을 꼭 부여잡았으니까.

“깜짝이야!”

거칠게 손을 잡아채인 에블린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데반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펠로스 대신 저에게 잡혀 있는 에블린의 손은 묘한 뿌듯함을 줬다.

뿌듯함이라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는 대신 얼굴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운 얼굴의 에블린을 대신해 대답한 건 펠로스였다. 그는 얄밉게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였다.

“조종당하는 기분이 뭔지 느껴보고 싶어서 말이야. 레이디께서 원한다면 짧게 맛보여보신다고 했을 뿐이네.”

“하.”

데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둘이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던 게 신력 때문이라고?

데반은 오래전 대공 저에서 그녀가 제 손을 잡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였을 뿐이었고, 손잡는 것 따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펠로스의 손을 잡은 것도 고작 그런 일에 불과했다. 펠로스는 원체 호기심이 많은 놈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어이가 없군.”

데반은 제 생각과 입이 따로 노는 걸 느꼈다. 제가 뱉어놓고 그는 실수했다는 듯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뭐가 어이가 없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펠로스가 물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떻게 조종이 되는지 설명만으론 이해가 안 돼서 직접 겪어보려고 한 게 그렇게 안 될 일인가, 응?”

펠로스의 말에 에블린도 덩달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데반은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입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내 말은……. 에블린은 불과 얼마 전에 신력이 없어 쓰러졌었다. 고작 네 호기심 따위를 채우자고 신력을 낭비시킬 수 없다는 소리야.”

푸핫, 하고 펠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는 게 역력한 얼굴이었다.

“레이디께서 실험을 위해 이틀 간 쉬지 않고 신력을 사용한 건 알고 있고?”

“그건……. 그것 역시 내가 말렸던 걸로 아는데.”

“저, 데반…. 저는 괜찮아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지만 제 신력이 많이 돌아와서….”

싱글거리는 펠로스의 옆에서 에블린이 난감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해명했다.

“이거 봐, 레이디도 괜찮다고 하지 않나?”

데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사실은 제 변명이 조금은 빈약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에블린이 신력을 사용하는 것에 화가 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데반은 여전히 쥐고 있는 에블린의 손을 차마 놓지 못했다.

“데반, 이젠 코델리아가 있잖아요.”

“……뭐?”

뜬금없이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혹시 제가 무슨 일이 생겨도 코델리아가 저를 대신해줄 거예요.”

에블린이 뒤쪽을 눈짓했다. 다이닝룸에 들어온 이후부터 코델리아는 계속 구석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실험을 하면서 깨달은 건데 코델리아도 조종을 아주 잘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쓰러지더라도 이 일에는…….”

“하…….”

데반의 입에서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너는 지금 내가…….”

“……네?”

내가 이 일이 틀어질까 봐 걱정한다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가? 데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내가 조금 늦었군.”

노크 한 번 없이 다이닝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것은 아스트릴라였다.

그녀는 데반과 에블린, 펠로스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셋이서 우애가 참…… 좋군?”

“그렇죠?”

우애? 우애라고? 흉흉한 데반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펠로스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거기에 펠로스는 상석으로 향하는 아스트릴라를 졸졸 쫓아 근처에 자리까지 잡았다.

데반을 황제로 만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아스트릴라의 편이 됐다더니, 정말로 몸도 마음도 모두 준 모양이었다.

“실험은 잘 끝난 건가?”

“그렇습니다.”

펠로스가 방금 전 에블린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데반은 황당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여전히 쥐고 있던 에블린의 작은 손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움찔거린다고?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에블린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네?”

“왜…….”

왜 도망가는 거지?

데반이 저도 모르게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을 때였다.

“아……!”

그저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에블린의 입에선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간 놀란 데반이 서둘러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에블린의 작은 손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황급히 빠져나갔다. 그녀가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얼른 앉아요.”

그러더니 급기야 저를 피하기라도 하듯 서둘러 테이블에 앉는 게 아닌가. 그것도 굳이 펠로스의 옆자리에.

삽시간에 혼자가 된 데반은 멍하니 서서 제 텅 빈 손바닥을 바라봤다.

도망가다니. 피한다니? 빠져나가는 손을 보고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잘못은 손아귀를 아프게 움켜쥔 저에게 있는데.

꾸욱― 데반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에 콕 박혔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쉬이 떨쳐 지지 않을 감정이라는 건 확실했다.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멍한 얼굴로 제 손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데반을 바라봤다. 얼른 앉자고 했는데도 왜 저렇게 우뚝 서선…….

도통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데반은 항상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른 자였는데.

“거기, 우애 없는 하나도 와서 앉지?”

아스트릴라가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데반을 불렀다.

“누군지 모르겠는 너도.”

그다음엔 코델리아였다.

아, 내가 코델리아를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그녀가 천천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모두가 앉자 데반도 결국 내 맞은편에 앉았다.

“네가 바로 그 자인가? 신전의 생존자?”

아스트릴라의 시선이 코델리아에게 향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코델리아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아스트릴라가 황태녀라는 것을 알진 않을 텐데, 풍기는 위압감을 느낀 모양인지 겁을 먹은 듯했다.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어요.”

그녀를 데리고 온 건 나였으니.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시선은 계속해서 코델리아에게 고정한 채, 아스트릴라가 물었다.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지?”

“그녀는 신력을 쓸 줄 알아요. 만에 하나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일을 대신 끝내줄 수 있겠죠.”

“그리고?”

“그리고…… 신전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그들의 수법이나 행동원리를요. 우린 아직 신전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제대로 상의하지 않았잖아요. 코델리아가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스트릴라는 코델리아를 샅샅이 훑어봤다. 겁먹은 얼굴을 하고서도 코델리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아스트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작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군.”

그녀의 시선이 펠로스에게 향했고, 나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릴라가 인정했으니 이젠 누구도 코델리아를 반대할 수 없으리라.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코델리아가 반드시 이 일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직감 같은 게 들었다.

“저 하녀가 구슬을 운반하는 것 외엔 아직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건가?”

다이닝룸을 오가며 열심히 음식을 나르던 유니스가 저를 지칭하는 말에 우뚝 멈춰 섰다. 난처한 얼굴을 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자, 유니스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유니스는 제 몫을 잘 해줄 거예요.”

펠로스의 말에 내 앞에 그릇을 내려놓던 유니스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런 그녀를 슬쩍 곁눈질하고 물었다.

“하지만 펠로스. 신전이 유니스를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지. 안 그런가?”

내 말을 끊어먹은 아스트릴라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데반에게 향해 있었다.

데반에게 방법이 있다는 소리인가?

내 시선도 자연히 데반을 향했지만, 그는 여전히 다른 생각에 몰두한 듯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아스트릴라가 언짢은 얼굴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그제야 고개를 든 데반이 물었다.

“날 부른 건가?”

“그래. 신전을 무너뜨릴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말했던 방법 말이야.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지?”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넋을 놓은 거지?

확실히 아까부터 이상한데……. 혹시 코델리아를 데려와서인가?

이번으로 데반과 코델리아는 총 세 번째 만남을 가진 셈이었다. 어쩌면 뭔가 느껴졌을지도…….

이미 다 각오한 일인데도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반은 아스트릴라의 마지막 물음을 가볍게 무시한 채 대꾸했다.

“그래, 그때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세한 작전까진 없어도 결국 신전을 무너뜨릴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펠로스가 데반의 말을 가로챘다.

“아주 오랜만에 우리의 생각이 일치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닌데.”

코웃음을 친 데반이 말을 이었다.

“신전을 무너뜨릴 방법은 현장을 잡는 것뿐이다. 사실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치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장을 잡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그래서 말인데.”

어느새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묻은 아스트릴라가 말을 받았다.

“마침 내가 딱 좋은 날을 알고 있네.”

아직 상세한 내용도 모르는데 좋은 날이라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장 삼 일 후, 건국제가 있다. 온 제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행사지. 아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거다.”

“……잠깐, 삼 일이요?”

불쑥 끼어들자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문제 있나? 실험은 완벽히 끝났다고 들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작전도 없고…….”

“질질 끌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삼 일 안에 생각해내지 못할 작전은, 석 달이 가도 생각해낼 수 없지.”

연륜이 느껴지는 말에 나는 그녀가 근위대를 통솔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 일은….”

“두려운 건가?”

절로 입이 꾹 다물렸다.

두렵냐고? 그야 당연히 두려웠다.

작전이 실패하거나, 신전이 허튼짓을 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고작 삼 일 후면 이 모든 일이 끝난다는 것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데반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그게 두려웠다.

이미 결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코델리아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질투를 넘어섰을 때부터, 그녀가 단순히 원작의 인물 중 하나가 아니라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을 때부터.

내가 빼앗았던 것들을 돌려주고, 이 모든 일들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두려운 마음은 미련에서 기반한 것일까.

삼일, 이 자리를 지키고, 데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삼일…….

어느새 테이블 위의 시선들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차마 그 눈동자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