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이번 일에는 다른 누구보다 네가 필요하거든.”
갑작스러운 데반의 말에 연회장엔 정적이 흘렀다.
“……유니스가 필요하다고요?”
“뭐, 그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할게요!”
데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니스가 덥석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하겠다니.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바라보아도 유니스는 기운차게 눈만 반짝였다.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인 데반이 나 때문에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이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얻은 게 있다고 했었지. 그건 바로 신전이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조종한다고? 머릿속에 언젠가의 마물들이 떠올랐다.
하얀 마석이 박힌 채, 꼭 최면이라도 걸린 듯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던 마물들.
“설마 사람도…… 하얀 마석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아마도.”
데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것을 상상하고 있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한 사실인가? 어떻게 안 정보지?”
아스트릴라가 따지듯 묻자, 데반이 입매를 비틀었다.
“네 덕분인데 질문을 받으니 우습군.”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건지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해독제인가?”
“그래.”
해독제라고?
“정말 독이 있었던 거예요? 감옥 안에?”
데반을 향해 물었으나 대답은 아스트릴라 쪽에서 들려왔다.
“아주 진동을 하더군. 나조차 겪어본 적 없는 특이한 종류의 독이.”
아스트릴라도 겪어본 적 없다면, 역시 신전에서 사용하는 독이라는 뜻이었다. 나와 데반도 당했던…….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해독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달래는 듯한 데반의 말에 이번엔 아스트릴라가 코웃음 쳤다.
“그래봐야 닷새를 버틸 양은 아니었지. 그러니 네 낯빛도 그 모양인 걸 테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데반이 화제를 돌렸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해독제의 양이 부족했던 건 사실인 듯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의 요지는 신전은 내가 독에 취해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는 거다.”
“아하, 방심한 그들의 입에서 저절로 정보가 흘러나왔다는 소리군.”
갑작스럽게 끼어든 펠로스를 향해 데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신전이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과 유니스가 필요하다는 건 설마…….
“데반, 설마 유니스를 미끼로 쓰겠다는 소리예요?”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놀란 내 표정과는 달리 데반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래, 유니스에게 구슬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다. 그 정보 역시 아스트릴라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릴 테고.”
“하지만 그랬다간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구슬을 얻기 위해 공격하겠지.”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말에 초조한 표정으로 유니스를 바라봤다.
“데반……. 설마 그들이 유니스를 조종하게 만들겠다는 건가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조종한 뒤에 쓸모없어진 유니스가―”
“전 괜찮아요, 마님!”
새된 비명 같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유니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몰린 관심에 마른 침을 삼키는가 싶더니, 이내 당당하게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마님께 도움만 될 수 있다면……. 어차피 저는 한 번 신전에 잡혀가서 죽을 뻔한 걸요. 그런 저를 살려준 건 마님과 이 분들이시구요!”
“그렇다고는 해도―”
“진정해, 에블린.”
내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보내겠다는 말은 아니야. 애초에 정말로 그녀가 조종당한다면 구슬만 뺏기는 셈이 되는 거니까.”
“그 말은 유니스가 조종당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인가요?”
“아예 조종당하지 않게 하거나, 혹은 조종당하기 직전에 막아야겠지.”
“어떻게요?”
“그건…… 다 같이 생각해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그제야 이 회의의 궁극적인 목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니스를 미끼로 쓰되, 그녀가 조종당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신전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방법까지 알아내야 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펠로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신전이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조종하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라면 뭔가 해결책을 밝혀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만약 사람을 조종하는 것도 마물과 마찬가지로 하얀 마석이 필요한 거라면, 허를 찌를 순간이 많지 않을까요?”
“가령?”
아스트릴라가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가령 그들이 유니스에게 마석을 심는 장면을 잡는다든가……. 아니면 마석을 가짜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니스를 조종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가짜인 거죠.”
“흐음…….”
데반이 고심하는 얼굴로 턱을 쓸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겠군. 잘하면 그들이 유니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포착할 수도 있고.”
“그래, 유니스는 그들의 말을 따르는 척하면서 뒷통수를 치는 거다.”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커요.”
둘 사이에 끼어들자 데반이 잔뜩 구겨졌던 미간에 힘을 풀고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명령을 어떤 식으로 내리는지를 모르잖아요. 만약 최면같이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아하, 그랬다간 정말로 조종당하지 않는 유니스는 신전이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 알 수 없겠군요.”
“맞아요. 실제론 조종당하지 않고 있다는 게 금세 들통날 거예요. 그랬다간 유니스가 위험해질 거고요.”
펠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돌연 아스트릴라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거 참 답답하군. 저 아이 스스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빠른 길을 놔두고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 마, 맞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마님.”
나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트릴라를 빤히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신전을 무너뜨리면, 그들과 다를 게 뭐죠?”
“뭐?”
“몇 명의 아이들을 희생시켜서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줄 수 있다……. 그들의 논리와 다른 게 뭐가 있느냐고요.”
무례한 태도에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그러나 나 역시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더 이상 아무 죄도 없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건 지긋지긋했다.
테이블 위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펠로스가 갑자기 밝은 얼굴로 박수를 짝― 쳤다.
“자, 일단 진정들 하세요.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그동안 방법을 생각해보면 되지요. 누군가를 희생시키니 마니 하는 건 레이디의 말대로 가장 마지막에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마지막에도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고집스럽게 말하자, 펠로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 저도 우리 쪽에서 뭔가를 잃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랬다간 신전을 완벽히 이겼다고 볼 수 없으니까요.”
“맞는 말입니다. 우리 쪽을 희생시켜 얻는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내 조용히 있던 카렌 역시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쑥 두둔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건 한때 아버지의 명으로 사설 기사단에 들어갔을 때의 일인데 하필이면 물이 부족한 사막 지역이라 인접한 기사단과 싸움이 난 적이 있었죠. 우리는 물을 얻기 위해 광산 소유권을 포기해야만 했고…….”
“하!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주절주절 이어지는 카렌의 말을 툭 끊으며, 아스트릴라가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리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자,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분명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예요.”
달래는 펠로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
아스트릴라가 와인을 세 병째 비우고, 내 앞에 찻잔이 식었다가 교체되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동안 펠로스의 입에선 지금껏 존재도 모르고 있던 마도구가 줄줄이 나열됐고, 아스트릴라의 입에선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듯한 의견을 한 번도 내지 못한 카렌은 어느새 제 검을 꺼내 손질하고 있었고, 유니스는 제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 그럴듯한 방법이 떠오르긴 할까.
큰 기대 없이 테이블이나 툭툭 두드리고 있는데, 그 순간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혹시요.”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대를 품지 않은 지친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어쩌면…… 신전이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
“……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멀뚱한 눈빛들을 받고 있는데, 펠로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겁니다, 레이디!”
그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이닝룸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분명히 거기에 뭔가가 있을 겁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뭔가가요!”
“하지만 신전은 하얀 마석을 통해 조종하는 게 아닌가? 우리에겐 마석이 없고.”
가늠하는 표정으로 데반이 물었다.
“그건…… 그들이 직접 신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아닐까요? 그러니까 남의 신력을 마석에 넣어서, 그 마석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조종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직접 쓸 수 있으니까…….”
“마석 없이 신력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조종할 수 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요.”
“흐음…….”
테이블 주위를 빙빙 돌며 무언가 중얼거리던 펠로스가 쾅-테이블을 내리쳤다.
“이건 어떻습니까? 만약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을 조종하려고 한다면요?”
“네?”
“레이디도, 신전도 모두 유니스를 조종하려고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동시에 조종을 한다고?
“혼선이 오지 않을까요? 어쩌면 신전의 조종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신전이 유니스를 조종하려고 하는 타이밍에 맞춰 나 역시 그녀를 조종한다면…….
“아니, 잠깐만요.”
그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은가.
“신전이 유니스를 조종하기 전에, 제가 먼저 한다면요?”
경악을 담은 펠로스의 눈이 잔뜩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