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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1화 (101/123)

101화

“대공비 전하, 오랜만에 머리를 틀어 올릴까요?”

“글쎄…….”

요 며칠 유니스에게 자리를 빼앗겨 통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전담 시녀가 물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뒤로, 침구를 정리 중인 유니스가 보였다.

“유니스.”

“네,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유니스가 고개를 쳐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그건 그만하고 옆에 서서 머리하는 거나 구경하렴. 너도 언젠가 하게 될 일일지도 모르잖니.”

유니스의 얼굴이 환해지고, 반대로 시녀의 얼굴은 구겨졌다. 평민의 신분인 유니스를 제대로 교육 받은 황궁 시녀와 비교한 탓이었다.

“물론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계속 제도에서 지내고 싶은 거라면 열심히 배워 봐.”

“네, 마님!”

이번엔 슬쩍 전담 시녀를 띄워주자 분위기에 활기가 돌았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시녀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유니스에게 향유나 머리 장식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열띤 표정으로 배우는 유니스를 곁눈질하다 나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어울리지 않게 치장을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 저녁에 데반의 복귀를 축하하는 조촐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연회라고 해봐야 익숙한 사람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나마 특별한 점을 찾으라면, 아스트릴라가 참석한다는 정도겠지.

그러니까 사실 연회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 자리였다.

어제 낮, 데반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로 나는 끊임없는 고민에 휩싸였다.

데반에게 모든 것을 말할 것인가, 혹은 숨길 것인가.

나는 신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었고, 힐다의 힘에 대해서도 알게 된 상태였다. 그건 곧 지금껏 미지의 힘으로 여겨지던 흑마법의 정체에 대해 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데반의 저주를 완벽히 풀 방법도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코델리아가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만 밝히면…….

하지만 문제는 이 사실을 말한다면 내 전생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랬다간 내가 그들의 앞길을 어떻게 방해했는지도 말해야겠지.

“하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두 쌍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마님?”

“……아니야.”

“곧 연회인데 웃으셔야지요. 고민은 나중에 생각하세요.”

유니스의 해맑은 얼굴을 보다, 슬쩍 따라 웃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당장은 신전을 무너뜨리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모든 게 정해진 수순 대로 흘러가는 거라면, 내가 진실을 당장 알려주지 않더라도 미래는 변하지 않는 게 아닐까?

데반의 다정함을,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이 아슬아슬한 평온함을 조금은 더 즐겨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허락하듯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전을 무너뜨린 다음에 생각하자. 데반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건 그 후로 미루자.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데반의 곁에 있는 거야.

그리고 모든 걸 고백한 뒤에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이 제국을 떠나자. 다시 엘리운으로 돌아가는 거야.

시녀가 매만지는 대로 거울에 화려한 금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불과 어제 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데반의 기다란 손가락이 떠올랐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밟기라도 한 듯,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

다이닝룸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태피스트리와 화려한 꽃들을 나를 반겼다.

오랜만의 연회에 노집사가 신이 난 게 틀림없었다. 하긴, 제도에 돌아오고 나서 기쁜 일이 통 없었으니까.

기다랗게 이어진 테이블 끄트머리에, 데반과 펠로스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에블린.”

인기척을 눈치챈 데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옆의 의자를 빼줬다.

“고마워요.”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데반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안색이 괜찮아 보이는군.”

“……그런가요?”

“적어도 어제보다는. 어제는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하여튼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뭐, 어제보다는…… 낫네요.”

“뭔가 결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레이디?”

펠로스가 끼어들었다.

결정이라. 굳이 따지자면 모든 걸 뒤로 미뤄버리겠다고 결정 내긴 했지.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있자, 펠로스가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별로 궁금하진 않으시겠지만 킬리언 디에고는 황궁 감옥에 갇혔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이름에 다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이야기는 뭐 하러 하는 거지?”

데반은 대화를 차단하듯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얼른 대꾸했다.

“황궁 감옥이요? 그 말은 어쨌든…… 죽지는 않는다는 건가요?”

“어이쿠, 아직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어깨를 으쓱한 그가 떠벌리듯 말했다.

“아마 죽을 겁니다. 신전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죽이고 싶겠죠. 살려둬 봐야 혹시 모를 약점을 남겨두는 것일 뿐, 이득될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장 죽일 명분이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제대로 된 구색을 갖추기 전까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뜻인가?

내 생각을 읽은 듯 펠로스가 덧붙였다.

“만약 그자가 죽기 전에 우리가 신전을 무너뜨린다면, 감옥에서 빼 오는 것도 가능하겠죠.”

우리가 먼저 신전을 무너뜨린다면……. 찬찬히 생각을 가늠하고 있는데 옆에서 데반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을 무너뜨리든 말든 죽게 놔둘 생각인데.”

어쩐지 부루퉁한 기색이 느껴져 웃음이 터졌다.

데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킬리언은 여러모로 데반의 일을 방해했었으니까. 더군다나 제 아비를 죽인 죄를 저질렀고, 우리의 결혼식을 방해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딴 이야기는 됐고, 도대체 카렌 위보우는 언제 오는 거지?”

나 역시 딱히 킬리언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할 생각은 없었기에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대신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까지 이 넓은 다이닝룸에 사람이라곤 나와 데반, 펠로스, 그리고 노집사와 유니스뿐이었다.

“황태녀 전하께서도 오신다고 하셨죠?”

“그래. 나란히 늦는군.”

그 순간 꼭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이닝룸의 문이 열리고 아스트릴라와 카렌이 들어왔다.

붉은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아스트릴라의 모습에 데반이 짧게 혀를 찼다.

“연회의 뜻이 뭔지 모르나?”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내뱉은 데반의 빈정거림에도 아스트릴라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에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멀끔해진 얼굴들을 보니 보기 좋군.”

“네 갑옷 차림은 영 보기 껄끄럽지만.”

꿋꿋이 데반의 말을 무시한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가장 상석에 가 앉았다. 데반이 못마땅하게 다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카렌 역시 펠로스의 옆에 앉고 나자, 마침내 연회가 시작됐다.

그저 그런 형식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테이블 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회라는 형식의 작전 회의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그 긴장감을 가장 먼저 깨트린 건 펠로스였다.

예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꼬를 튼 그가 테이블 위로 구슬 두 개를 내려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모양새의 작은 구슬은, 꼭 투명한 구 안에 연기가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평범한 하얀색의 연기가 아니라 여러 빛깔로 변하는 연기.

연기는 반짝이는 모래사장 같았다가, 보기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 텁텁한 흙색이었다가, 별이 반짝일 것 같은 진청색으로 쉴 새 없이 변했다.

“이게…… 신력을 기록했다는 그 구슬이군.”

데반이 흥미로운 눈으로 구슬을 바라봤다.

“그래, 이쪽이 하얀 마석에 남아 있던 신력이고 다른 한 쪽이 코델리아의 신력이지.”

설명이 이어졌지만 두 구슬은 차이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 보였다.

“결국 두 신력이 같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거면 증거로 충분하죠.”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펠로스가 구슬을 가지고 손장난을 했다.

“거기에 레이디 코델리아의 증언까지 합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신전을 무너뜨린다는, 상상만 했지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일이 코앞으로 불쑥 다가온 기분이었다.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도 들었다.

“다음은?”

데반이 아스트릴라에게 눈짓했다. 이미 와인이 가득한 잔을 몇 번이나 비운 그녀가 한 모금 더 목을 축이더니 입을 열었다.

“구슬에 대한 정보는 신전에 무사히 들어갔네. 우리가 하얀 마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신전으로선, 신빙성 있는 정보일 수밖에 없겠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게 우리라는 것까지 알린 건가요?”

의아하게 묻자 데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신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하얀 마석을 무사히 회수해 축포를 터트리다, 저희들이 속았다는 걸 알고 순식간에 장례식 분위기가 됐겠지.”

“도대체 어떤 함정을 파실 생각이신 거죠?”

자신만만한 표정의 데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끼를 이용할 생각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닷새 동안 내가 얻은 게 조금 있거든. 신전이―”

“잠깐만요.”

서둘러 데반의 말허리를 끊었다.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아스트릴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대답 대신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방 안에는 우리뿐 아니라 여전히 노집사와 유니스도 있었다.

노집사야 데반을 아주 어릴 때부터 보필했고, 이 모든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괜찮지만 유니스는…….

그녀 역시 신전에 잡혔던 과거가 있고, 우리를 도와 보석상을 보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함정을 판다는 건 신전을 완벽히 속여야만 가능한 작전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괜히 이 일에 개입되었다가 혹 문제라도 생긴다면…….

난감한 얼굴로 유니스를 바라보자 진지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녀가 황급히 들고 있던 트레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아, 걱정 마세요! 저는 나가볼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런데 의외로 유니스를 막아선 건 데반이었다. 다른 속셈을 품은 듯한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번 일에는 다른 누구보다 네가 필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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