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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0화 (100/123)

100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코델리아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이도 저도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데, 그 뒤로 카렌이 뒤따랐다.

“레이디!”

카렌은 마치 데반이 자리를 비운 닷새 동안 보여줬던 진중한 태도가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렌 경…….”

대답을 원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어느새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카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 레이디 코델리아와는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뵙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우연히 만났다고……. 절로 표정이 굳었다.

코델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데반을 번갈아 바라봤다. 난 그제야 그와 내가 아직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데반이 감옥에 다녀온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토록 유난스러운 환영 인사가 있을 줄도 몰랐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타이밍에 들어왔다는 건…….

서둘러 데반의 손을 털어내고 몇 발자국 떨어졌다. 코델리아의 등장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데반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코델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데반의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데반……. 부르잖아요.”

더욱 묘하게 변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데반을 쿡쿡 찌르며 말하자, 마침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추긴 건 나면서, 막상 데반의 눈길이 나에게서 떠나 그녀에게 향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원작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이.

아주 찰나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초월적인 힘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운명 같은 것.

백작가에 입양되지도, 데반에게 납치되지도, 그를 치료해주지도 않았는데…… 코델리아는 돌고 돌아 이곳에 있었다.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존재만 돌연변이일 뿐, 다른 모든 건 원작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순간 마음이 선득해졌다. 지금껏 발버둥 쳤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는 결국 살아남았지만, 저 두 사람은 너무 오랜 시간 길을 잃고 헤맨 게 아닐까.

오직 살아남고 싶다는 내 욕심으로 인해.

멍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데, 코델리아가 쥐어 짜내듯 말을 꺼냈다.

“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무표정에 가까웠던 데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드는 게 보였다.

“뭐가?”

나를 향한 게 아니었음에도 절로 몸이 떨릴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코델리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다 나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에블린?”

“두분이서…… 대화 나누세요.”

“어딜 가는 거지?”

“잠깐 잊고 있던 일이 있어서…….”

“뭐?”

지금껏 데반을 기다린 주제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자리를 피하다니.

애초에 어쩌자고 그를 끌어안아 버린 걸까? 이렇게 될 걸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데, 데반만 무사하다면 그가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져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데반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잠깐, 잠깐이면 돼요.”

“무슨…… 에블린.”

팔을 붙잡으려 하는 데반을 피해, 나는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

응접실을 빠져나와 봐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없었다. 그대로 방에 가는 건, 데반에게 찾아오라고 시위를 하는 꼴이었으니까.

고민하다 결국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정원이었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데반과 코델리아가 눈을 마주쳤던, 그 찰나의 시간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데반의 싸늘했던 목소리도.

정처 없이 정원을 거닐다, 익숙하게 구석으로 향했다.

데반을 위해 심어둔 꽃이 있는 쪽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찾아오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한 송이 꽃은, 어느새 꽃봉오리가 반쯤 벌어져 있었다.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꽃은 비교적 기다랗고 얇은 줄기 끝에 넓은 꽃잎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모양새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꽃잎부터 수술, 줄기까지 온통 새까만 색이라는 점이었다.

“……데반.”

데반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항상 입는 제복, 온통 새까만 검과 처음 만날 때 눈을 가로지르고 있던 검은 안대까지.

데반이 꽃이라면 꼭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 큰 고민 없이 그의 선물로 낙점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꽃을 과연 데반이 좋아할까.

책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꽃은 정말 빛 한 자락 들지 않을 것처럼 새까맸다.

자신감이 없어져서인가. 처음 심을 때만 해도 차분하고 분위기 있어 보이던 색이, 어쩐지 불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 꽃을 보는 목적이 심신의 안정이라면, 적어도 이 꽃으론 목적을 이루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데반의 오른쪽 눈에 남아 있는 저주 역시 검은 얼룩이 아니던가.

……데반에게 검은색이란 풀지 못한 저주의 흔적일지도 몰랐다. 없애고 싶고, 잊고 싶은 것.

거기에 검은 얼룩은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그의 저주를 완벽히 풀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이런 꽃을…….”

헛웃음이 나왔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게 응접실을 나온 건 어떻고.

자꾸만 그 어색한 공기와 분위기가 떠올랐다. 데반의 눈빛과 목소리도.

내가 도망치듯 나온 건, 단순히 데반과 코델리아의 만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데반의 태도 때문이었다.

데반이 코델리아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 그녀보다 나에게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그게 나에게…… 바보 같은 기대를 품게 해서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대로 평생 그를 속일 수도 있지 않을까. 코델리아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계속 숨긴 채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바보 같은 기대.

그와 동시에 두려워졌다.

진실을 알게 된 데반이 달라질 모습이.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치던 손이 코델리아의 허리를 받치고, 내 어깨를 도닥이던 커다란 손이 코델리아의 어깨를 도닥이고, 내 이름을 부르던 낮은 목소리가 코델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향하던 눈길이 코델리아에게로 향한다면…….

“하아…….”

거기까지 상상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처음 데반을 봤을 때만 해도, 그를 이용해 살아남을 생각밖엔 하지 않았는데.

데반 역시 처음엔 오만한 얼굴로 나를 죽이느니 어쩌니 협박을 일삼아놓고, 어느새 이렇게 다정해져 버린 걸까.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고, 걱정해주고…… 한평생 부모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감정을 일깨워준 그가.

내내 모른 척하고 있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코델리아에게 느꼈던 질투심도, 데반에 대한 걱정도, 고작 닷새 만에 생긴 사무치는 그리움까지…….

모두 어느새 내 마음 안에 그가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아…….”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인정하고 나자 꼭 마음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홧홧해졌다.

뭐라도 움켜쥐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감정이 마구 널을 뛰어 종잡을 수 없었다. 겨우 크게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여기 있었군.”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화드득 놀라 일어났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나를 데반이 슬쩍 잡아 왔다.

“데…… 데반?”

어깨를 으쓱한 그가 가볍게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았다. 아까 전 응접실에서 그의 손을 뿌리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마 데반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독에 절여진 몸을 이끌고 별궁을 한 바퀴나 돌았는데, 겨우 정원이라니.”

“그게……. 잠깐, 독이요?”

처음 듣는 말에 나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들자, 데반이 살짝 웃었다. 이제 보니 아까보다 더욱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독인데요? 신관들이 독을 주입했어요? 우리가 신전에 갔을 때 그 독이에요? 이젠, 이젠 괜찮아요?”

횡설수설하며 말을 쏟아냈다.

“진정해, 에블린.”

“제가 신력으로 치료할 수―”

“그래, 신력.”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내 말을 뚝 끊었다.

“아까 못했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신력은 괜찮은 게 맞나?”

“그건…….”

입을 꾹 다물었다. 신력은 그때 신을 만난 뒤로, 정확히는 다시 태어난 뒤로 멀쩡했다. 멀쩡함을 넘어서 차고 넘칠 정도였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하기엔 너무 길지만 어쨌든…… 괜찮긴 해요.”

나를 찬찬히 훑어보던 데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이야기는 언제든 편할 때 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겨우 진정시켰던 속이 다시 울컥거렸다.

“저…… 코델리아는요?”

“뭐?”

“코델리아와는 이야기를 끝내신 건가요?”

“갑자기 그 이름은 왜 꺼내는 거지? 너…… 역시 도망치듯 뛰쳐나간 게 그자 때문인가?”

순식간에 데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면 때문이었다. 나를 걱정하고 코델리아를 경계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내가 자꾸만 덧없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게 아닌가.

데반의 마음은 코델리아에게 향해야 맞는 건데.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원망하는 마음만 갈 곳 없이 떠돌았다.

“에블린. 정말 코델리아 때문인가? 그자 때문에 힘든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가늠하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괜히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그 김에 데반에게서 완전히 꽃을 숨기려는 목적도 있었다.

데반은 애초에 꽃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이 꽃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이미 신력 기록도 모두 끝났다고 들었다.”

펠로스가 하얀 마석의 신력과 코델리아의 신력을 구슬에 기록한 일을 말하는 거였다. 그는 약속대로 딱 닷새가 되는 날 완벽한 구슬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네가 불편하다면 그자를 쫓아낼 수도 있어.”

“……네?”

“코델리아. 굳이 이 별궁에 머물게 둔 건 쓸모가 있어서였어. 하지만 이제 그 쓸모도 다했고, 이유는 몰라도 네가 불편해하는 걸 보니…….”

“아니, 아니에요. 코델리아는 갈 곳이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지내게 해줘야죠.”

데반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그자를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피하는 것 같다가도, 자꾸만 챙겨주고 싶어 해. ……그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었지.”

데반은 어느 날의 마차 안에서 했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얼굴이 굳었다. 데반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할까 봐.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짓을 했길래 자꾸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하는지. 그로선 당연히 궁금해할 수밖에 없고, 나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에블린,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묻지 않아.”

“……네?”

꼭 내 마음을 읽은 듯 데반이 말했다.

“네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네가 그 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묻지 않겠다고. 아니,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하지 않다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아, 궁극적으론 데반을 이 꼴로 만들었는데도?

원래대로라면 완벽하게 저주를 풀고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졌을 당신의 인생을…… 내가 이렇게 휘저어 놨는데도?

“……그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물음을 꼭 듣기라도 한 것처럼 데반이 대답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네가 무슨 짓을 했어도 상관없어. 설사 그자를 신전에 가둔 게 너라고 할지라도, 아니 그보다 더한 짓을 했어도 괜찮아. 그러니…….”

데반의 기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금빛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니 내 앞에서 그렇게 두려운 얼굴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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