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저 혹시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아시나요?”
뭐? 코델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대공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데반을 왜 찾는 거지? 설마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본능적인 끌림, 운명적인 무언가라도 느낀 건가?
“그건 왜 묻는 거죠?”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코델리아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아…….”
다시금 기가 죽은 얼굴을 바라보자 죄책감이 들었다. 코델리아는 지금껏 신전에 갇힌 채 지내왔다. 뭔가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혼자 예민하게 굴어선…….
입술을 지그시 씹고 있는데,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식사를 하던 펠로스가 끼어들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감옥에 갇히셨답니다.”
“……네?”
“펠로스!”
갑작스러운 말에 그를 홱 노려보자, 펠로스가 와인을 한 모금 꼴깍 삼키곤 웃었다.
“농담입니다.”
코델리아가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데반은 일면식조차 없긴 해도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농담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는 게 당연한데…… 왜 저 모습마저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까.
내가 괜히 모든 걸 삐뚤게 보고 있는 거겠지…….
“……인사는 됐어요.”
“……네?”
코델리아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따로 인사할 필요 없다고요. 대공 전하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하게 빛나는 진녹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난 서둘러 등을 돌렸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붙잡을 시간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
그 이후로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다시 코델리아를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코델리아는 평생을 신전에서 지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머물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의 신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별궁에서 지내는 게 맞았다.
머리로는 그 모든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코델리아가 별궁에 있는 게 달갑지 않았다. 자꾸만 원작의 내용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그녀와 데반이 별궁 이곳저곳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던 장면들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상상이 끊임없이 이어져 머릿속을 장악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절여진 채 이틀이 쏜살같이 흘렀다.
마침내 신전에 찾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자, 갑옷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카렌이 내 앞에 서서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카렌 경은 안 타세요?”
“저는 말로 이동하겠습니다.”
단호하기까지 한 카렌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데반이 사라진 이후로 나를 꼬박꼬박 전하라 부르고 있었다. 장난스럽던 행동도 퍽 진지하게 변했다.
오늘 신전에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수십이나 되는 병사들을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였다.
그랬다간 신전 문턱에도 못 들어간다고 겨우 말려 그와 믿을만한 병사 몇 명만을 대동한 참이었고,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나를 안심시키듯 작게 웃은 카렌이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얼마 안 가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우…….”
작게 한숨을 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에게 직접 신전과 접촉하라고 말한 아스트릴라는, 그 날짜까지 지정해줬다.
이틀 뒤, 그러니까 펠로스가 구슬을 완성하기 하루 전. 그게 오늘이었다.
오늘 신전에게 내 패를 보이고, 하루의 유예기간을 줘야 했다. 그동안 그들은 데반 대신 킬리언을 희생시키겠다고 마음먹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리라.
아래로 떨어진 시선에 반지가 걸렸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데반이 줬던 얇은 오팔 반지였다.
자연스럽게 데반이 떠올랐다. 내 손을 감싸 쥐었던 새하얀 손가락, 적빛 눈동자, 오만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다시 신전에 가는 것도, 신관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모두 끔찍하기만 했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데반을 내 손으로 구해내고 싶었으니까. 더는 그를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신전의 하얀 첨탑이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섰다.
보기만 해도 손이 달달 떨릴 정도로 혐오감이 치솟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차에서 내리자,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온 카렌이 굳은 얼굴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정말 이렇게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와도 되는 겁니까?”
카렌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할 텐데요.”
“……황태녀 전하께서 그러라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내 생각에도 어차피 신전과 협상을 해야 한다면 굽히고 들어가는 것보단 당당한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짓밟는 것이 익숙한 자들은, 상대가 약해 보일수록 기세등등해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새하얀 문 앞에 멈춰 섰다. 장식 하나 없이 소박한 문이었지만, 그 실상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 발 앞으로 나선 카렌이 문을 활짝 열었다.
대외적으로 전쟁이나 군대, 병사 따위와 인연이 없는 신전에는 그 흔한 문지기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제국민에게 차별 없이 열려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겠지만, 실상 이 안에는 그저 그런 조각상과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모두에게 오픈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선 몇 개의 관문을 더 지나야 했다. 신관을 직접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제가 뒤를 호위하겠습니다.”
카렌이 문에서 비켜서며 말했다. 앞장서서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새하얀 것도 모자라, 창문마다 백색의 커튼까지 나부끼고 있었다.
조명 하나 없었음에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군데군데 의자에 앉거나 서서, 혹은 바닥에 엎드린 채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향했다.
“이 안에 신관이 있을 거예요.”
소박한 하얀 문 앞에 멈춰서 말했다. 카렌이 잽싸게 문을 두드리자, 곧 신관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내는 퍽 선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자는 신전의 어두운 면을 모두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일까.
둘 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내가 취해야 할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그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봤다.
“대공비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카렌이 짐짓 엄하게 말하자, 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바로 나를 향하는 시선에 숨길 수 없는 적의가 가득했다.
“대공비 전하시라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신분을 듣자마자 적의를 보이는 신관이라니. 내가 누구인지, 신전과 어떤 관계인지 아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보여줘야 할 건 당당하고 오만한 모습이었다. 턱을 살짝 치켜들며 입꼬리를 올리자, 신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사람 좀 불러 줄래요? 그게 누구든, 내 일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미리 약속을 잡으신 게 아니라면―”
한 발자국 더 나서자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신관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오라고 전해요.”
신관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하얀 마석에 관련된 일이니까.”
“……무슨!”
몇 발자국 물러난 신관이 나를 한 번, 카렌을 한 번 바라봤다. 방금 전의 선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위협적인 표정이었다.
아랑곳 않고 미소 지으며 슬쩍 뒤를 턱짓했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기도 중인 제국민들이 가득한데, 그런 표정을 지어도 되느냔 의미로.
신관은 주먹을 꾹 쥐고 나를 노려보다, 이내 홱 등을 돌렸다.
“전하, 쫓아갈까요?”
“아니, 곧 돌아올 거예요.”
하얀 마석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면, 나를 이대로 돌려보낼 리 없겠지.
내 말대로 신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의 눈엔 여전히 적의가 가득했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정중한 척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그를 따랐다. 카렌이 내 뒤를 바짝 쫓았다.
몇 개의 방과 기나긴 복도를 지나고, 마침내 아치 형태의 문 앞에 다다랐다.
오래전 데반이 보여줬던 신전의 도면을 떠올렸다. 꽤나 구석까지 온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신관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겠지.
앞장선 신관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한 번 돌아봤다. 그러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뻗는 순간―
카렌이 불쑥 끼어들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게 무슨!”
방 안에 있던 자들과 우리를 안내해준 신관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카렌의 무례를 미처 막지 못한 신관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 안을 훑어봤다.
방은 역시나 테이블까지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 익숙한 얼굴의 신관이 앉아 있었다. 별궁에 쳐들어와 데반을 체포해간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만 나가보게.”
싸늘한 말에 겁을 집어먹은 듯, 우리를 안내해준 신관이 서둘러 사라졌다.
나는 카렌을 제치고 나서서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렌은 역시나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참…… 반가운 얼굴이군요.”
노크도 없이 들어와 무례하게 구는 태도에 신관이 빈정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고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이었으니,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앉아 있는 신관의 뒤로 두 명의 신관이 더 서 있었는데, 겉으로는 똑같은 신관복을 입고 있었지만 대충 봐도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저들이 호위인 듯했다.
“밤중에 별궁에 찾아오셨을 때…… 저도 참 반가웠답니다.”
마찬가지로 빈정거리자, 신관이 입매를 비틀었다.
“마치 그때 저희들의 태도와 지금 대공비 전하의 태도가 같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다른가요?”
“대공비 전하께서 뜬소문을 듣고 온 게 아니라면 같을지도요.”
뜬소문이라……. 하얀 마석 자체를 부정할 요량인 듯했다.
“신전이 그토록 허술한 곳이던가요?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시는 일이 뜬소문으로 떠다닌다니요.”
“숨기고 싶어 하다니. 누구 들으면 오해할 말씀을 하시는군요.”
“숨기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면 아주 상냥한 성격이신 모양이죠?”
“뭐요?”
여유를 가장하던 신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일그러진 표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나와 얼굴을 비춰주시니 말입니다. 하얀 마석을 숨기고 싶어 안달복달하시는 게 아니라면, 아주 상냥한 성격이신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