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신전과 접촉해 협상을 진행하는 건 에블린 디에고, 네 몫이다.’
“……저보고 직접 신전과 접촉하라고 했던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스트릴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묻자 펠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게 왜요? 황태녀 전하께서 이 일에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좋을 게 없어서 그런 거라고 하셨잖아요. 맞는 말이고요.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전하께선 신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죠.”
“뭐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또 밑질 거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로 협상에 임하라고 한 것 역시 당연한 거고요.”
“뭐어……. 네, 그렇죠.”
말을 질질 끌며 답답하게 구는 펠로스를 노려봤다. 마침내 항복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뭐…… 그런 겁니다. 레이디는 대공비지만, 또 디에고 가문의 여식이 아닙니까. 적어도 법적으로는요.”
“디에고?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디에고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두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이미 죽은 디에고 백작과, 킬리언 디에고. 당연히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킬리언? 킬리언과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
“황태녀 전하께서는 레이디에게 직접 신전과 접촉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라고요.”
“……그렇죠.”
“신관과 만나면 레이디는 하얀 마석과 데반을 교환하자고 제안할 거고요.”
“그래서요?”
“신전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야…… 고민하겠죠. 데반과 하얀 마석을 교환할지, 아니면 잡아뗄지. 사실 하얀 마석만으로는 신전에서 마물을 조종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 못하잖아요.”
“결정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 건 우리 생각이죠. 신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걱정할 겁니다. 혹시나 이들이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어쩌지? 레이디의 당당한 태도에서 특히나 그런 기색을 느낄 겁니다.”
“그럼…….”
“데반과 하얀 마석을 교환해야겠다, 애초에 그자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이 흘러갈 겁니다. 하지만.”
유난히 힘을 주는 펠로스의 마지막 말에 절로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하지만 쉽지 않겠죠. 어쨌든 그들은 황족을 황궁 감옥에 가뒀습니다. 착각했다는 말 한마디로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명분이 필요하겠군요.”
“맞습니다. 가령 이건 어떨까요? 데반을 체포한 것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제보를 받았을 뿐이다.”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건가요?”
펠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를 희생시켜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사람. 레이디와 데반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 누명을 씌울만한 사람…….”
설마…….
“그러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건 바로 자신들의 앞에 앉아있는 레이디겠죠. 에블린 디에고. 디에고 가문의 하나뿐인 여식. 불과 얼마 전 한 남자에 의해 결혼식을 망친 경험이 있는…….”
떨리는 눈빛으로 펠로스를 바라봤다.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신전에 얼굴을 내비추는 것만으로…… 레이디가 킬리언 디에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
익숙한 정문이 보이는가 싶더니, 침묵으로 가득한 마차가 마침내 멈췄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펠로스가 내게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를 청했다.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까부터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시군요.”
“당연하죠.”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내 손으로 킬리언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물론 킬리언은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나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를 죽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에 데반은 도대체 왜 이런 사실을 나에게 숨긴 걸까? 그가 말한 대로 했다가 킬리언이 사지에 몰리는 걸 알면, 설마 내가 킬리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릴 거라고 생각한 걸까?
마차에서 내리자, 유난히 뻣뻣하게 긴장한 듯한 병사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정문을 열어줬다.
“카렌 녀석 힘이 단단히 들어간 모양입니다. 하루에 한 번씩 호위 대열을 바꾸고 있다더군요.”
펠로스의 친절한 말에도 난 대답하지 않고 앞서 걸었다. 내 옆을 빠르게 쫓아온 펠로스가 물었다.
“바로 식사하러 가실 겁니까?”
“……글쎄요.”
“입맛이 없으십니까?”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펠로스를 돌아봤다. 잔뜩 구겨졌을 내 얼굴에 그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예.”
“데반은 만약에 제가 실패하면 어쩌려고 했을까요?”
“예?”
“그러니까 만약에…… 신관들이 저를 보고 킬리언을 생각해 내지 못하면요? 그래서 결국 데반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했던 걸까요?”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는지 펠로스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저한테 대놓고 말했으면 더 좋잖아요. 제가 은근슬쩍 신전에서 킬리언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까지 짐을 지우기 싫었던 거겠죠.”
짐이라고…….
“레이디께서는 디에고 백작이 죽은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시는 분이 아닙니까. 만약 레이디가 정말 스스로의 손으로 킬리언 디에고를 사지로 몬다면, 그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실 게 뻔하고요. 그러니 레이디는 모르는 채로 일이 진행되길 바랐던 게 아닐까요.”
“실패했다간 데반이……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데도요?”
펠로스가 쓰게 웃었다.
“뭐, 원래는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가 꼭 데반처럼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더니 앞장서 걸었다. 서둘러 그를 따라 발을 맞췄다.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 해도, 신전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자신도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죠.”
“황태녀 전하께서…… 데반은 황궁 감옥 중에서도 중범죄자가 수감되는 곳에 갇혀있다고 했어요. 즐거운 듯 얘기하셨지만, 데반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고도 하셨고요.”
차갑고, 어둡고, 축축한 곳이겠지. 힐다가 묘사했던 감옥이 떠올랐다. 아마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을 테다.
“고작…… 제게 죄책감을 지우는 게 싫어서 그런 곳에서 버티겠다고요? 정말로 그게 다라고 생각하세요?”
어느새 도착한 다이닝룸 앞에서 펠로스가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요?”
다급하게 묻자 펠로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데반은 레이디의 마음속에 킬리언 디에고가 너무나 큰 존재가 되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네?”
“그 감정이 죄책감이든, 혐오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요. 레이디가 킬리언 디에고를 떠올리는 것 그 자체가 싫었을지도요.”
또 그 소리를 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데반이 나를 좋…… 좋아한다는 그 소리.
“펠로스.”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부르자,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알아요, 압니다. 그만 입을 다물죠.”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저는 데반이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는 것과 레이디가 데반의 마음을 인정하는 것 둘 중 뭐가 더 빠를지 기대되는군요. 내기라도 하실래요?”
“누가 그런 걸로 내기를 해요!”
“저랑 레이디요?”
어깨를 으쓱인 펠로스가 다이닝룸의 문을 활짝 열었다.
“내기를 한다면 저는 펠로스가 언젠가 그 입 때문에 큰일을 당할 거라는 쪽에 걸고 싶…….”
무심코 그를 따라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아…….”
멍청한 탄식이 뒤를 이었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앞에 코델리아가 서 있었다. 방금까지 식사를 하고 있었던 듯, 테이블에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부르는 코델리아를 뒤로하고, 나는 펠로스를 홱 바라봤다.
굳이 식사를 하자고 다이닝룸에 들어온 이유가 설마 코델리아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서였나?
그러나 펠로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코델리아의 앞에 가 앉더니, 시종을 불러 식사를 차려 달라 말했다.
“레이디도 드실 거지요?”
“……전 됐어요.”
코델리아가 깨어나고 이틀. 그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마주한 적이 없었다기보다는…… 기를 쓰고 피한 쪽에 가까웠다.
깨어난 그녀를, 그 진녹빛 눈동자를 바라보면 울컥거리는 마음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그녀를 희생시켰다는 죄책감, 그녀가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게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데반과 그녀가 마주칠 것에 대한 질투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서둘러 등을 돌렸을 때였다.
“저기……!”
코델리아의 가냘픈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굳어 다이닝룸을 빠져나가지도, 그렇다고 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코델리아는 이런 내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저를 깨워주셨다고 들었어요. 그…… 이분께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펠로스를 지칭하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완전히 사라진 힐다를 대신해, 펠로스가 그녀를 돌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돌본다는 핑계로 그녀의 신력을 기록하고 연구할 요량이었다.
“……고마워요.”
고맙다고?
심장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내가 아니었다면 신전에서 모진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사지로 몰아놓고 죽기 직전에 구해줬다고 감사 인사를 받을 만큼 뻔뻔한 성격은 못 됐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저, 그리고…… 여기서 지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대공비 전하시라고…… 들었어요. 그, 제가 잘 몰라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신전 안에서 지금까지 이십여 년을 갇혀 지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거겠지…….
다른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제치고 그녀에 대한 동정과 죄책감이 마음을 가득 메웠다.
천천히 등을 돌려 코델리아를 겨우 마주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코델리아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지더니, 이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아시나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