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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94화 (94/123)

94화

나는 펠로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구슬을 빤히 바라봤다.

“여기에 신력을 기록한다……. 확실히 좋은 방법인 것 같긴 한데, 이게 공신력이 있을까요?”

펠로스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레이디, 잊으셨습니까? 우리에게 공신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신력을 가지고 협박만 하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신력으로 협박하기 위해선 공신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닙니다. 그저 공신력이 있어 보이기만 하면 되죠.”

있어 ‘보인다’?

“레이디도 아시다시피, 이 마도구는 조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과연 신전에서 그 점을 지적할 수 있을까요?”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신전이 데반을 체포하며 내세운 증거가 바로 이 마도구였다. 그리고 그건… 분명하게 조작된 증거였고.

“그 점을 지적했다간, 신전의 증거도 무용지물이 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마도구를 조작하지 않았고, 그들은 조작하지 않았습니까. 불리한 건 그쪽입니다. 신전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펠로스……. 당신 정말 똑똑하긴 하군요.”

진심으로 감탄이 나와 한 말에 펠로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그야 물론 아니죠.”

그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덧붙인 뒤, 나는 테이블 위의 마도구를 들어 올렸다. 이 작은 구슬과 데반을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래. 지금은 나약한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코델리아가 깨어났을 때부터 어수선했던 마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그래서요? 기록은 언제 하는 거죠? 코델리아가 깨어났고, 하얀 마석도 있으니 당장 할 수 있겠죠?”

“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죠?”

“신력의 특성을 기록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거든요. 애초에 특성이 있다는 것부터 비밀이었으니 당연하지요.”

“아…….”

“이 마도구에 적용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조급하게 물었다. 힐다는 데반이 황궁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었다. 축축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곳이라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고도 했었다.

물론 그녀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펠로스가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 저에게 딱 닷새만 주십시오. 그 안에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닷새……. 모르긴 몰라도 이제껏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성공시키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데반이 갇혀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기도 했다.

“더 빨리 할 수는 없나요?”

“원래 일주일이라고 하려다, 레이디의 표정을 보고 줄인 겁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반 놈이 걱정되는 마음은 알지만 고작 닷새입니다, 레이디. 그놈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별궁에서 혼자 지낸 건 알고 계시겠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별궁은 황궁 감옥보다도 환경이 열악했답니다.”

“하지만…….”

“그리고 데반은 이제 다 큰 성인이죠. 어쨌든 황족이기도 하고요. 신전이 아니라 황궁 감옥이지 않습니까. 닷새 안에 별일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펠로스가 말을 늘어놓았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고작 닷새……. 닷새만 기다리면 데반을 구할 수 있다…. 그를 별궁에 데려올 수 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데반이 별궁에 온다는 건 곧 코델리아를 만난다는 것과도 같은 뜻이었으니까.

내 표정을 예민하게 포착한 펠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죠?”

“네?”

“뭐가 문제입니까, 레이디? 또 안색이 좋지 않군요.”

“아니에요, 그냥…… 데반 걱정을 했을 뿐이에요.”

서둘러 변명했지만, 펠로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네?”

“저와 카렌이 그 알 수 없는 존재의 힘에 의해 쫓겨난 뒤에 말입니다. 다시 돌아갔을 때 레이디는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고, 코델리아는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나는 고개를 떨궜다. 생각해보니 신과 나눴던 대화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둥글고, 끝과 시작이 겹쳐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했다간, 내가 코델리아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언젠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할 때가 올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펠로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후, 레이디의 신력이 달라진 것은 물론 알고 계시겠죠?”

또 언제 감지를 한 건지는 몰라도, 펠로스는 거의 바닥났던 내 신력이 다시 넘칠 정도로 회복된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모두 좋게 끝났거든요.”

“그건 역시나 그 존재와 관련된 일입니까?”

“……네.”

“지금 레이디의 몸에 가득한 신력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게 확실하고요?”

“그래요.”

따가울 정도로 빤히 나를 바라보던 펠로스가 마침내 눈에 힘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레이디가 무사하다니 넘어가죠. 언제까지 제 호기심을 막을 수 있으실진 모르겠지만, 당장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고마워요.”

“됐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구슬을 집어 품에 넣더니, 펠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시는 건가요?”

“닷새 안에 기록을 끝마치려면 서둘러야죠.”

금방이라도 방을 나설 것처럼 일어나놓고,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펠로스가 나를 내려다봤다.

“흐음…….”

“……왜요?”

“그냥…… 닷새 후 데반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안색을 회복하셨으면 좋겠군요.”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가? 슬쩍 두 손으로 볼을 매만지자, 펠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특히나 코델리아의 앞에서 말입니다.”

“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부러 피하고 계신 것 다 티 납니다. 그분이 불편하신 거죠?”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데반 앞에선 티 내지 마세요. 그랬다간 그놈이 코델리아를 별궁에서 쫓아낼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리가요.”

황당한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도 레이디는 데반 놈을 잘 모르나 봅니다. 아무튼 저는 이만 가보죠.”

*

축축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는 황궁 감옥 안, 차가운 돌바닥에 데반 란티모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등불이 걸려 있는 벽에 기대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어 꼭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 스스로의 바보같음에 대해, 그리고…… 에블린에 대해.

에블린, 에블린 채스터.

데반은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다 보면 학습된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전으로 향하는 굴을 파기 위해 몇 주간 별궁을 비웠을 때 처음 시작된 행위였다.

어째서 그 이름을 떠올리고, 그 얼굴마저 떠올렸는지 데반은 스스로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떠올리는 것이 떠올리지 않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떠올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그녀와 가까이 있을 때가 더욱 그랬고.

그러니 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무릎을 베질 않나, 팔베개를 한 거겠지.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데반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마 제가 대신 잡혀간 것에 대해 자책하고 있겠지. 그 이후엔 카렌과 펠로스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을 테고…….

어쩌면 벌써 자신을 구할 방법을 모색했는지도 몰랐다.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것과 달리, 사실 에블린은 놀랍도록 강인했으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에 골몰하던 그는, 조금씩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감옥에 갇힌 이후로 계속 그랬다. 팔다리는 무겁게 축 처졌으며,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미처 막아볼 새도 없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독 때문이었다.

데반은 이 축축한 황궁 감옥 안에 옅은 독이 공기처럼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모르게 서서히 섭취시켜 이내 정신을 잃게 만드는 종류였다.

그러나 데반에게는 통하지 않는 독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통하지 않는 독.

그는 이미 신전에서 경험한 적이 있었으니까. 에블린과의 결혼식 전날, 정화의식을 위해 찾아갔던 신전에서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데반은 어릴 적부터 수많은 독에 대해 내성 훈련을 받았고, 그 덕분에 한 번 경험한 독에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는 이미 수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데반은 독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최대한 적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에블린을 떠올리는 것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으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신전의 침투력이 상당하군.

데반은 언짢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신전이 아닌 황궁 감옥으로 데려오기에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던 터였다. 아무리 감옥이라고 해도 어쨌든 황궁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전과 같은 종류의 독을 황궁 감옥에 푼 걸 보면 이곳 역시…… 신전의 손에 넘어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데반이 낮게 혀를 찼다. 독을 풀어 행동을 통제하려고 드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제아무리 내성이 있다 한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정신을 잃지 않는 것 정도였으니까.

직접 감옥을 빠져나가거나, 감옥 밖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무리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걸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신전은 데반이 독에 내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잘만 이용하면 역습을 위한 발판으로 만들 수 있을 지도…….

곰곰이 생각하던 그 순간, 덜컹― 시끄러운 마찰음이 들렸다.

데반은 서둘러 몸에 힘을 빼 정신을 잃은 척 가장했다. 여러 명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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