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저…….”
아름다운 진녹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코델리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아…….”
입을 벙긋거려 봐도, 제대로 된 말이 뱉어지질 않았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인데도 막상 현실이 되자 당혹스러움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심장이 꼭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박동했다. 아니, 정말로 토악질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어째서일까. 코델리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대신해 여주인공의 자리를 꿰찼다는 죄책감 때문에? 아니면…….
“누구…… 누구죠, 당신은?”
코델리아의 목소리에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갑자기 모르는 곳에서 눈을 떴고, 모르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뭐라도……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텐데. 당신을 위협하던 신관들은 이곳에 없다고. 나는 안전한 사람이라고.
겨우 꼴깍 침을 삼켰을 때였다.
쾅쾅― 우리 사이의 적막을 깨부수듯 다시금 굉음이 들렸다.
“레이디! 안에 안 계십니까?”
펠로스! 그래, 차라리 펠로스를 들이는 편이 나을 거다. 그라면 나를 대신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겠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서둘러 문에 다가갔다.
문밖에서 들리는 거친 소리와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듯, 코델리아가 앉은 채로 뒷걸음질쳤다.
나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짓했다.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었지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벌컥― 열자,
“레이디!”
펠로스가 넘어지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그 뒤로 멍청한 표정의 카렌이 보였다. 그는 한쪽 어깨를 뾰족하게 세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문을 두드리던 굉음의 출처가 그 어깨인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니, 그 존재는 대체 무슨 힘을 지닌 겁니까? 고작 눈을 감았다 뜰 만큼의 짧은 시간이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카렌 녀석과 저는 별궁 정문 밖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그 어떤 포탈도 마도구도 없이…….”
잔뜩 흥분한 펠로스가 말을 쏟아내듯 뱉어내다가, 멈칫했다. 내 뒤에 있는 코델리아를 본 탓이었다.
“저 분은……. 깨어나신 겁니까?”
“펠로스.”
나를 지나쳐 코델리아로 향하려는 그의 팔뚝을 서둘러 붙잡았다.
“레이디?”
내 얼굴을 본 펠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안색이 안 좋군요.”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가, 꾹 닫았다. 펠로스에게 이 모든 일과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조차도 이 울렁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니까.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코델리아를…… 부탁해요.”
“레이디?”
“많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나를 대신해서 설명해줘요. 신전과 이 별궁,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도, 펠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힐다와 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내가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전……. 전 잠깐 쉬어야겠어요.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카렌 녀석과―”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 있고 싶어요.”
영문을 모르고 있는 카렌을 지나쳐 나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
코델리아가 정말로 깨어나다니.
몇 주간 도맡아 관리한 탓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정원을 거닐며, 나는 마음 정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코델리아를 마주하고, 도대체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한 건지.
분명 그녀가 무사히 깨어난 건 기뻐할 일이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신전에 잠입했으니까. 또 신력을 비교해 데반을 구해올 돌파구도 생긴 셈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술렁거릴까. 어째서 그녀를 직접 마주하기가 두려운 걸까.
코델리아가 여주인공이라는 것이 실감 났기 때문에? 정말로 내가 그녀를 희생시켜 지금껏 살아왔다는 게 뼈저리게 체감돼서? 그게 아니면 내가 원래는 죽었어야 할 엑스트라라는 것 때문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내 기분이 이상한 건…….
무언가에 홀린 듯 주변을 돌아보다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하필 여기야…….”
그저 정처 없이 걸었을 뿐인데, 의도하고 온 게 아닌데.
발걸음이 멈춘 곳은 하필이면 내가 데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는 곳이었다. 오로지 그를 위해 따로 심어둔 꽃이 있는 장소.
드레스 끝자락에 흙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쭈그리고 앉았다.
그곳에 있는 건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들이었다.
정원 관리를 위해 읽었던 식물도감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던 꽃이었다. 너무나 데반이 생각나는 모양새라, 선물로 주기 제격이라고 생각해 어렵게 구해왔었다.
정원사나 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관리했는데, 그 덕분에 제대로 꽃봉오리를 틔운 것은 고작 한 송이뿐이었다. 난 한 번도 식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릎에 뺨을 기대고,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데반…….”
이것마저 죽어버리면 어쩌지? 데반은 벌써 선물에 대해 알고 있는데…….
기분이 가라앉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괜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정원사에게 부탁하는 게 나았으려나.
아니, 데반이 좋아하긴 할까? 솔직히…… 꽃을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하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괜한 짓을 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 괜한 짓을 한 게 확실했다.
꽃 따위를 준다고 데반이 기뻐할 리가 없는데. 그저 귀찮은 짐을 떠안았다고 생각하겠지.
귀찮은 짐……. 어쩌면 꽃이 아니라 나조차도…….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 스스로를 상처입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 발걸음이 왜 이쪽으로 향했는지. 코델리아가 깨어난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왜 그렇게 심란했는지.
데반……. 데반 때문이었다.
코델리아가 깨어난 이 상황에, 데반이 별궁으로 돌아온다면? 그 둘이 만난다면? 서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녀가 진정한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걸 데반이 눈치챈다면? 그렇게 되면…….
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될까?
철렁,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거처나 대공비라는 신분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반에게, 그에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데반.”
‘적어도 남자 주인공인 데반은 너에게 넘겨줄게, 코델리아.’
언젠가 자신만만하게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도.
*
식사도 거른 채 방에 들어와 혼자 쉬고 있는데, 똑똑― 경쾌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레이디.”
그에 맞춰 경쾌한 목소리도 뒤따랐다. 펠로스였다.
“들어와요.”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말하자, 곧 문이 열리고 펠로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트롤리를 끄는 시녀가 뒤따랐는데…….
“유니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 있는 건 불과 어제까지 신전에 붙잡혀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한 얼굴을 한 유니스였다.
“마님! 아니지, 대공비 전하!”
유니스가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이 시녀가 함께 오고 싶다고 해서요. 보석상에서부터 느꼈지만, 꽤 일을 잘하더군요.”
당황한 내 얼굴을 본 건지 펠로스가 부연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유니스는 대공 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었지. 보석상에서 펠로스를 도와 마루를 보수하는 작업을 했다더니 별궁으로 함께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은 거니?”
벌써 일을 해도 되는 걸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유니스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님! 저는 걱정 마세요!”
“정말 대공 저로 내려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또 무슨 일을 당했다간…….”
“괜찮아요!”
내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가 유니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마님. 그저……. 저는 제도가 좋아요. 그리고 마님도요. 곁에 있고 싶어요. 물론 허락 해주신다면요…….”
금세 풀죽은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가 좋다면 물론 있어도 좋아.”
유니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마님! 아, 대공비 전하!”
“호칭은 편한 대로 하렴. 그럼 차를 내어줄래?”
“네, 마님!”
유니스가 서둘러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뭐해요? 당신도 앉아요.”
여전히 문가에 우뚝 서 있는 펠로스에게 말하자,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자리에 앉고서도 통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 텐데 왜 말을 안 하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 나는 펠로스가 유니스를 힐끔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으음……. 유니스, 차는 우리가 마실 테니 이만 나가볼래?”
“네?”
선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다가, 유니스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네! 얼른 나가볼게요!”
그리곤 아주 빠른 걸음으로 트롤리를 끌고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펠로스가 내내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휴, 드디어 말을 시작할 수 있겠군요.”
“유니스가 들어선 안 될 말을 하려고 왔나 보죠?”
“그야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펠로스가 품 안에서 반짝이는 구슬을 꺼냈다. 구슬?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생김새가 신전에 잠입한 증거로 신관이 꺼내 보여준 것과 같았다.
“그건……. 위치 추적기 아닌가요?”
“아닙니다.”
탁― 펠로스가 테이블 위에 구슬을 올려뒀다.
“이 구슬은 기록용 마도구랍니다. 물론, 위치 추적을 기록하는 데에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죠. 하지만 다른 것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펠로스의 말이 빨라졌고, 얼굴엔 흥분의 기색이 보였다. 난 그가 뭔가를 알아냈다는 걸 눈치챘다.
“기록이라면……. 신력에 대한 기록도 가능하다, 그 소리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얼굴에 기세등등한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고민했습니다. 코델리아라는 자의 신력과 하얀 마석에 든 신력이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그러다 떠오른 게 바로 이 마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