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92화 (92/123)

92화

“평화로운 세상에 종교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결국 모든 게 지배를 위한 신전의 농간이라는 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흑마법에 관한 책의 저자가 모두 대신관일 때부터 이상했으니까.

“그럼…… 굳이 흑‘마법’이라고 한 이유는 뭐죠?”

황궁 도서관에서, 펠로스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질문을 물었다.

“글쎄…….”

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누군가 내 힘과 그 아이의 힘 사이에 연관성을 찾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닐까? 아예 다른 개념을 붙이고 싶었던 거겠지.”

하긴, 흑마법이 주는 단어의 인상 때문에 지금껏 누구도 힐다의 힘이 신력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정말이지 꼭 닮았단다. 내가 신이라면 그 아이도 신이고, 내 힘이 신력이라면 그 아이의 힘도 곧 신력이겠지. 아마 그들은 그게 불만이었을게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순수하고 자애로운 힘이었으니까. 파괴적인 힘은 신전이 추구하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잖니.”

“닮았다고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신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생김새부터 말투, 성격까지 둘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시작과 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치유와 파괴도 그렇고.

내 의문을 읽은 듯 신이 빙그레 웃었다.

“말했잖니. 시간은 동그란 모양이라고.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지. 하지만 그 누구도 어디가 시작이고 또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단다. 동그란 원의 시작이 어디인지 그 누가 알겠니.”

알쏭달쏭한 말에 다시 미간을 찌푸리자 신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테다. 인간에게 시간은 일직선으로 이해되고 있으니까.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요?”

“과연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네 시간이 일직선이라고? 잘 생각해 보렴.”

신의 말을 따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시간이 흐르는 것은…….

내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주고, 내 현재는 미래에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전생을 기억해서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했고, 코델리아 대신 데반에게 납치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전생에서 본 책은? 그건 무엇이지? 그 책에는 내 미래의 이야기가 적혀있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미래의 이야기를 과거에서 보지 못했더라면, 현재를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미래가, 내 현재를 바꾼 셈이 되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퍼뜩 고개를 들어 신을 바라봤다.

신은 내 생각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것 보렴. 네 시간 역시 동그랗지 않니.”

“…어떻게…. 아니, 왜….”

혼란스러운 얼굴로 신을 바라봤다. 모든 시간이 동그랗다고? 그럼 모든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소리인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럼…….

신이 내 생각에 대답하듯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단다.”

“그럼 어째서 나만……. 저만 느낄 수 있는 거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원의 크기 때문이지. 그들의 원은 너무나 커다랗단다.”

신이 손을 들더니 공중에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손가락이 지나가는 길에 새하얀 연기 같은 게 나오더니 곧 동그란 원이 나타났다.

“상상해 보렴. 이 커다란 원이 한 사람의 시간이라고 했을 때, 바로 이곳에 있던 기억이…….”

신이 원의 한 쪽을 툭 건드리자, 그곳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곳에 있는 기억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이번에는 신이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툭 건드렸다. 원에 반짝이는 두 개의 점이 생겼다.

“이 두 가지 중 무엇이 시작에 가까운 기억이고 무엇이 끝에 가까운 기억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단다.”

“뭐가 과거이고 뭐가 미래인지…….”

“그래. 알지 못하는 거야. 그건 원 한 바퀴가 너무나 긴 시간이기 때문이지. 어쩌면 몇백 년, 몇천 년, 몇만 년, 몇억 년……. 모든 것을 잊기에 충분하지 않겠니. 인간으로선 절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

손가락을 들어 반짝거리는 지점을 손으로 콕 찔러봤다. 원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네 원은 다르단다.”

신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원은 다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곤 그 자리에 조그마한 원이 대신 자리했다.

나는 꼭 점처럼 보이는 작은 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방금 전의 원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이게…… 제 원이라는 건가요?”

“그래.”

신이 이번에도 원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원이 작게 반짝거렸다. 아마 아까처럼 그 원의 어딘가 두 가지 반짝이는 점이 생긴 거겠지.

그러나 원이 너무나 작은 탓에 그 점들이 어디에 생긴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떠니? 두 개의 점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할 수 있겠니?”

“……아뇨.”

이제야 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전생과 현생 사이에 차마 인지할 수 없는 수억 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과 달리, 나의 시간은 너무나 조그맣던 거였다.

그래서 전생을 기억했던 거고.

“두 개의 점뿐 아니란다. 너의 원은 너무나 작아, 시작과 끝도 지나치게 가깝지.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겹치게 되었단다.”

시작과 끝이 겹쳤다……. 신이 다시 손을 휘저어 조그마한 원을 흩트렸다. 테이블 위에서 서서히 흩어져가는 연기 사이로 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너는…… 채 끝이 나지 않은 채, 다시 시작해버린 아이가 되었어.”

<아하……. 너, 끝나지 않은 아이였구나. 그러니 시작도 하지 못했지.>

<그래, 네가 바로 섞여 있는 아이구나.>

언젠가 힐다가 했던, 그리고 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것도 모두…….”

“그래.”

“왜……. 왜죠? 왜 제 원은 그토록 작은 건데요?”

신이 쓰게 웃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 많단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렸다.

“이제 더 궁금한 건 없니?”

신이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간이 거의 다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궁금한 거…….

“……힐다는 왜 절 죽인 거죠?”

“죽이다니?”

“제 신력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신력을 제거하면, 제 안에는 그녀의 힘이 가득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저는 죽을 거라고요.”

“왜 네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왜냐고? 그야…….

“그 힘이 끝의 힘이라고 하셨잖아요.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다고요.”

빙그레 미소 지은 신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주 작은 원을 가지고 있다고 했잖니. 시작과 끝이 지나치게 가까워, 겹쳐져 있다고.”

“……그래서요?”

“너는 저번 생을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고, 때문에 이번 생을 완벽하게 시작하지 못한 거란다.”

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스르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테이블과 찻잔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멈칫하며 올려다보자, 신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 아이가 널 왜 좋아했는지 알 것 같구나.”

“……네?”

그 아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신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지 않겠니.”

툭― 이마가 밀렸다.

*

“허억!”

벌떡,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게 다 뭐지?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침대에 얼굴을 반쯤 기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는 코델리아가 누워있었다.

다시…… 돌아온 건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코델리아와 나를 연결하고 있던 하얀 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꿈을 꾼 건…… 아니겠지?”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진짜 일어난 것인지, 꿈인지, 내 망상인지, 혹은 힐다의 장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고…….”

나는 신과의 대화를 복기해 봤다.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이고, 신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그 말은…….

한 번 죽음으로써, 진정한 이번 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했는데…….”

몸 이곳저곳을 움직여 봐도 전과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어째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 걸까?

그러다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쩐지 몸이 너무나 가벼웠다.

뭐지? 설마…….

나는 슬쩍 주먹을 쥐어, 몸 안의 신력을 감지해 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몸 안에…… 신력이 가득 차 있었다.

힐다를 만나기 전보다 더, 데반을 치료하기 전보다 더……. 아니, 어쩌면 내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많은 양의 신력이었다.

분명 코델리아를 살리기 위해 이 방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신력이 거의 바닥나 있었는데.

“시작……. 이번 생을 완벽하게 시작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정말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온몸에 힘이 넘치고,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될 것만 같은 기분.

그럼 힐다가 정말로 나를…… 도와준 거야?

가득 차 넘쳐흐를 것만 같은 신력을 온몸으로 느끼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코델리아!”

힐다는 분명 나를 도와 코델리아를 깨워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지? 여전히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을 때였다.

쾅쾅―

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굉음이 들렸다.

“레이디!”

그와 더불어 펠로스의 목소리까지. 쫓겨났다가 이제야 돌아온 건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펠로스에게 말하면 무언가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

그 순간,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뻣뻣한 목덜미를 겨우 돌려, 뒤를 바라봤다.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코델리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작에서 수도 없이 묘사됐던, 아름다운 진녹빛 눈동자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