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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90화 (90/123)

90화

순식간에 펠로스와 카렌이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방 안에는 그들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힐다가 손가락을 튕기고 그들이 사라졌다는 건…….

“힐다! 설마―!”

<“안 죽였어. 내가 그렇게 시시한 일을 할 것 같아?”>

힐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죽이는 게 시시한 일이라니……. 그래도 죽인 게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저 밖으로 보낸 것뿐이야. 너랑 단둘이, 아니지. 이 아이까지 셋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힐다의 시선이 다시 코델리아에게 향했다.

“……셋이? 셋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래. 너, 이 아이를 구하러 온 것 아냐? 이 아이의 신력과 하얀 마석에 든 신력을 비교할 생각이잖아.”>

힐다는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하면?”

짓씹듯 내뱉자, 힐다가 불쑥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내가 도와줄까 해서.”>

도와준다고? 코델리아를 구하는 걸? ……도대체 왜?

<“그러려고 지금까지 기다렸으니까. 그러려고 널 치료했던 거고.”>

“기다려?”

<“너, 지금 네 신력이 얼마나 남은 줄 알아?”>

내 질문은 무시하고, 힐다가 대뜸 물었다. 절로 몸이 움찔 떨렸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지?

내 몸에 남아 있는 신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잖아. 네 신력으로 이 아이를 깨우기는 부족해.”>

주먹을 움켜쥔 채, 나는 말 없이 힐다를 바라봤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힐다는 저절로 내 생각을 읽고 대답해줬으니까.

<“하지만 내가 도와주면 가능하지.”>

도와준다고? 도대체 왜?

<“왜인지가 궁금해?”>

“네가 날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이거 서운하네. 네가 내 힘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하고, 죽을 위기에서도 구해주고, 다시 너를 찾아와 ‘치료’까지 해주고 있는데.”>

“하지만 그 중 어떤 일도 나를 위해서 한 게 아니잖아. 네 재미를 위해서겠지.”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너 자체가 재밌거든. 너를 보는 것도, 너랑 있는 것도 재밌어. 네가 쉽게 사라지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란 소리야.”>

“그러니 나를 위한 일이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이해되지 않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힐다를 응시했다. 그녀가 코델리아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봐.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거야? 이 아이가 죽어가는데? 알고 있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이 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있을 거라는 걸.”>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수백 번도 더 한 생각이었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대놓고 내 탓이라는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었기에.

<“아니지, 정확히 말해서 네가 끝나지 않은 아이만 아니었다면…….”>

끝나지 않은 아이?

오래 전에도, 힐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아하……. 너 끝나지 않은 아이였구나. 그러니 시작도 하지 못했지.>

내 안에 처음으로 힐다의 힘이 들어온 날 했던 말이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워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러다 혹시나 내 전생과 관계가 있진 않을까 의심했던 말이었다.

내가 ‘끝나지 않은 아이’이기에, 코델리아가 죽어간다는 소리인가? 그 말은 역시…… 내 전생과 관계가 있는 건가?

“도대체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이를 악물고 한 질문에도 힐다는 가볍게 응수했다.

<“웬만한 건 전부 알고 있지. 네가 끝나지 않은 아이라는 것,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이 세계의 흐름을 바꿨다는 것……. 그리고 지금, 황궁 감옥에서 한 남자가 너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뭐?”

힐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가, 문득 들리는 단어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궁 감옥이라고?

“갑자기 황궁 감옥은 왜…. …설마, 데반을 말하는 거야?”

근위대병들에게 잡혀가 황궁 감옥에 있다던 데반이 생각났다. 힐다는 갑자기 왜 데반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그래. 그 건방진 아이. 영 어울리지 않는 곳에 앉아 있거든. 아주 축축하고, 서늘한 곳이지. 어떻게 생각해?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힐다가 떠보듯 말했다.

축축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곳……. 나는 그런 곳을 아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는 불타 없어진 백작가의 그 지하실이 바로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지새웠던 수많은 밤이.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어갔던 목숨들이. 나를 바라보던 떠돌이 개의 맹목적인 새까만 동공이 떠올랐다.

데반이……. 데반이 그런 곳에 있다고? 나를 대신해서?

<“응, 빨리 구해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내 생각을 모두 꿰뚫은 힐다가 싱긋 웃었다. 죽어? 데반이? ……나 때문에?

<“너희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단 하나잖아. 이 아이를 깨워, 신력을 비교하는 것. 그걸로 신전을 협박해 그 아이를 꺼내 줘야 되지 않나?”>

사라지지 않는 그녀의 미소가, 명백히 날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를 깨울 방법도 단 하나지.”>

“……네가 날 도와주는 것?”

<“그래! 어렵지 않을 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된대도.”>

나는 잔뜩 올라간 입꼬리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있는 힐다의 눈을 바라봤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로 순수하게 나를 도와주고 싶은 거라면, 그녀가 직접 코델리아를 깨우면 될 일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능력이라면 황궁 감옥에서 데반을 빼오는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나를 도와줌으로 인해 힐다가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다고?

문제는 이게 모두 힐다의 꿍꿍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머릿속 한켠에 자꾸만 데반의 모습이 일렁거린다는 점이었다.

황궁 감옥은 지하실과, 데반은 죽은 강아지와 겹쳐졌다.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떨쳐 내려고 해도 떨쳐 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죽는다면……. 그 강아지를 살리지 못했듯, 데반도 살리지 못한다면…….

또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버린다면…….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충동적으로 묻자 힐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광대까지 찢어진 입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저 이 아이에게 신력을 주기만 하면 돼! 부족한 건 내가 도와줄 거니까!”>

주춤거리는 내 시선이 코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죽은 듯 누워있는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내 남은 신력을 모두 그녀에게 준다면 나는…….

펠로스는 내 신력이 모두 떨어지면, 흑마법, 그러니까 힐다의 힘이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연히 죽을 거라고 했었고.

힐다의 목적은…… 나를 죽이는 건가?

내 생각을 모두 읽었을 게 뻔한데도, 힐다는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주위에서 킬킬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전엔 내가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하지만 나 하나 희생해서 코델리아와 데반 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주먹을 움켜쥐고 막 몸 안의 신력을 끌어올렸을 때였다.

<“결정했어?”>

“뭐? 아니―”

멈칫하는데,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양쪽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힐다의 얼굴이 내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무언가 빠르게 다가온다 싶더니, 툭-그녀가 검지로 내 이마를 밀었다.

이마에 작은 통증이 느껴지며 내 안의 신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게 느껴졌다.

“아…….”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원작을 아무리 바꾸려고 해봐야, 결국 나는 대체품으로 생을 마감하는 건가?

아무런 음성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던 힐다가, 이번엔 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너는 끝나지 않은 아이이고, 그러니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지.>

힐다의 목소리가 귀를 통하지 않고 내 머릿속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툭― 그녀가 검지에 힘을 주는 순간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 감각은…….

<이제는 새로 시작할 차례야.>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

나는 제 3자가 된 것처럼 허공에서 방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내 몸뚱어리와 침대에 누워있는 코델리아를.

내 몸과 코델리아의 몸 사이에는 하얀 끈이 이어져 있었고, 어느새 힐다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나는…… 형체가 없었다. 신전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자칭 신이라는 자를 만났던 그때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이게 죽음인가? 저번에 신을 만났던 것도 그럼 내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

잔뜩 당황한 채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순간 음성이 들렸다.

<또 만났구나.>

홱,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음성이었다.

‘……신?’

<그래.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런 이름으로 불렸었지.>

정말로 죽은 건가?

‘이게…… 이게 다 무슨 상황이죠? 제가 죽은 건가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하지만 이건 죽음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어찌 생각하면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끝은 아닐 것 같구나.>

‘죽음이지만, 끝은 아니라고요?’

알쏭달쏭한 말이 가득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끝은 모든 게 사라지는 거잖니. 너의 존재, 영혼, 기억 같은 것들이.>

‘그럼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소리인가요?’

<궁금한 게 참 많은 것 같구나.>

꼭 제가 키운 어린아이를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의 목소리가 퍽 인자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저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원래대로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 이전과 완벽히 같은 상태라면 힘들 것 같구나.>

‘힘들다고요? 그럼…….’

역시 죽는 건가?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끝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니.>

‘돌아갈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게 끝이 아니면 뭐죠?’

<네가 생각하는 끝은 일자로 이어진 시간의 한쪽이지. 하지만 사실 시간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단다.>

시간이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다고? 뜬금없는 말에 인상만 찌푸리고 있자, 신이 작게 웃었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소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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