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알겠습니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돌연 펠로스가 소리쳤다. 아스트릴라와 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알겠다니? 뭐를요?”
내가 아스트릴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얀 마석을 만지작거린 게 다면서. 갑자기 뭐를 알아냈다는 걸까?
펠로스가 들고 있던 마석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이 안에 든 신력이요. 이 신력의 주인에 대해 대충 알겠다는 소리입니다.”
“……네?”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펠로스가 말을 이었다.
“레이디가 각각의 신력에 특성이 있다는 말을 한 뒤로,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 특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요.”
“그래서?”
아스트릴라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새 또 신이 난 펠로스가 떠들어 댔다.
“그래서 실은 어제 신전에 잠입했을 때, 레이디의 신력을 감지해 봤습니다.”
“제 신력을요? 언제요?”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내 신력을 측정했다니? 우리 사이에 그럴 만한 접촉이 있었던가?
펠로스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어떻게든 했다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말을 계속 해보게.”
“아무튼 레이디의 신력을 감지해보면서, 저는 그 특성이라는 것에 특히 집중했습니다. 이건 제 직감이었는데, 신력이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주인을 닮은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주인? 그러니까…… 내 신력이 나를 닮았다는 소리인가?
“보통 마법사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법사의 성격에 따라 어떤 마법에 소질을 보이는지가 달라지죠. 신력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맞았나요?”
“예!”
펠로스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마석에 든 신력을 감지해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신력은 그 주인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신력이 나를 닮다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돼선 내 손을 내려다봤다.
“뭐, 향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요? 제 향기, 아니 제 신력은 어떻던가요?”
펠로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은근하게 웃었다.
“레이디의 신력은…… 꼭 바다처럼 청량하고 시원하지만, 가끔씩 높은 파도가 들이쳐서 방심할 수 없죠.”
“……네? 그럼 제가 바다라고요? 가끔씩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니 파도니.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설명에 황당한 얼굴을 하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저의 직감 같은 거니까요.”
“그딴 건 됐고, 그래서 이 마석은? 이 안의 신력은 어떻지?”
아스트릴라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금세 눈을 반짝거린 펠로스가 마석을 집어 들어 제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 안에 든 신력은…… 꼭 사막 같습니다.”
사막…….
“그것도 아주 메마른 사막입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그늘 한 점 없죠.”
방금 전 바다에 대해 들었을 때는 황당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도 사막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은 얼굴로 펠로스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게 틀림없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그늘 한 점 없는 메마른 사막. 절로 한 장면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코델리아의 얼굴.
*
아스트릴라는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며,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스스로가 매우 바쁜 사람임을 강조하더니, 다음에는 우리 쪽에서 찾아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다음’이란 물론, 코델리아를 깨우고 그녀의 신력을 감지해 그걸 마석과 비교한 뒤였다.
아스트릴라가 돌아가고 나서야 등장한 카렌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했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어쩐지 카렌은 그녀를 불편해하는 듯했다.
“뭐라고요? 그래서 황태녀 전하와 손을 잡으셨다는 소리입니까?”
전 제국에 우리의 협상을 소문내기라도 할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만 봐도 뻔했다.
“조용히 좀 하세요, 카렌 경.”
허리에 손을 올린 카렌은 응접실 문을 가로막은 채 떡하니 버티고 섰다. 펠로스가 가볍게 그의 옆으로 빠져나갔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레이디!”
곧바로 달려온 카렌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황태녀 전하가 어떤 분인지 알고는 계신 겁니까? 무려 제가 열한 살 때는―”
“데반을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또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뻔한 카렌의 입을 빠르게 틀어막았다.
“그 얘긴 그만 됐고, 코델리아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요. 카렌 경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죠?”
방금 전, 아스트릴라와 주고 받은 이야기를 모두 들었기에 카렌은 더 이상 군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리며 앞장설 뿐이었다.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펠로스가 저지했다.
“잠깐만요, 레이디. 괜찮다면, 이제 저는 그 존재를 좀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 존재요? 그게……. 아!”
힐다를 말하는 거구나. 아까 이야기만 끝내면 힐다를 만나게 해주려고 해놓고, 아스트릴라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잊고 있었다.
펠로스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어디에 있죠?”
“어…. 글쎄요? 아마도 방에 있을 것 같은데….”
“나를 따라오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이번엔 카렌이 가로막았다.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힐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 존재인지 힐다인지……. 도대체 뭐가 뭔지는 몰라도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데요? 카렌 경은 어떻게 알아요?”
“그야……. 레이디 코델리아와 함께 있으니까요.”
카렌의 말은 정말이었다. 힐다와 코델리아는 함께 있었다.
그것도 힐다의 방 안에서, 그녀가 나를 치료해준답시고 눕히곤 했던 침대 위에 코델리아가 누워 있었다.
나와 펠로스, 카렌, 힐다에 코델리아까지. 이렇게 맞닥뜨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다섯 사람이 한 방에 모이게 된 셈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지? 힐다는 왜 코델리아와…….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깬 건 펠로스였다.
“이것 참 놀랍군요!”
망설임 없이 힐다에게 다가간 펠로스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무례한 태도였다.
“뭐야, 이건?”
힐다가 답지 않게 황당한 얼굴을 하며 주춤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펠로스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양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탐색을 끝낸 그가 손뼉을 짝― 쳤다.
“정말이지 완벽한 인간으로 보입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마법사의 변신술을 코앞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데요. 고양이를 인간으로 변신시킨 걸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나는 고양이 따위가 아니니까.”
힐다가 질색하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펠로스의 머리를 툭 밀었다. 가벼운 접촉이었음에도 펠로스는 꼭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뒤로 쭉 밀려났다.
“호오……!”
힐다의 손이 닿았던 제 머리를 문지르며 펠로스가 눈을 빛냈다. 그가 지치지도 않고 거리를 좁히려고 하자, 힐다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머리가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멍청하네.”
“……설마 이미 저를 아시는 겁니까?”
펠로스의 표정이 환해졌고, 그럴수록 힐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대로 비위를 거슬렀다간, 그녀가 금방이라도 손가락을 튕겨 모든 기억을 지우거나, 어쩌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머리가 좋은 줄 알았다는 말은…….”
“펠로스!”
힐다가 손을 움찔하길래, 서둘러 펠로스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그리곤 힐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보다 힐다, 너는 왜 코델리아와 같이 있는 거야?”
“코델리아? 아, 이 아이?”
다행히 화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건지 힐다의 시선이 침대로 향했다. 코델리아는 신전에서 본 것과 똑같이 죽은 듯 누워 있었는데, 그때보단 혈색이 조금 좋아 보였다.
장소가 바뀌어서인가? 아니면 설마 힐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힐다가 다시 얼굴을 구겼다.
“걱정하지 마. 해로운 일은 하나도 안 했으니까.”
해로운 일을 안 했다는 건 뭔가를 하긴 했다는 건가? 힐다가 코델리아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문득, 힐다가 코델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진짜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걸…….
힐다가 지금까지 보여 준 전지전능함을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힐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지금의 현실을 뒤바꿨다는 것까지 모두 다 알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코델리아를 대신 희생시켰다는 걸?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힐다를 바라봤다. 만약 그녀가 이 모든 일을 데반에게 말하기라도 한다면…….
<“에블린.”>
그 순간, 힐다가 내 이름을 나직이 내뱉었다. 두 갈래로 나뉘는 음성에 생각이 뚝 끊겼다.
힐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얼른 다른 생각으로 몰아내야…….
<“소용없어. 어차피 다 읽었으니까. 아니, 읽지 않더라도 알고 있기도 했고.”>
“읽다니, 대체 무엇을요?”
펠로스가 우리 둘 사이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나저나 흥미로운 발화 방식이군요.”
“하아…….”
다시 한 갈래로 바뀐 목소리로 힐다가 말했다.
“이 정신 사나운 놈은 좀 내보내는 게 좋겠어. 저 덩치만 커다란 놈도.”
“이 정신 사나운 놈은 손 한 번만 잡게 해주신다면 나갈 의향이 있습니다.”
힐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펠로스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펠로스.”
힐다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서둘러 그를 저지하는데, 그 순간 힐다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리고…….
“뭐, 뭐야?”
순식간에 펠로스와 카렌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