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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88화 (88/123)

88화

“이걸, 이걸 어떻게!”

하얀 마석이라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다음엔 무의식중에 펠로스를 바라봤다.

하얀 마석을 실제로 본 적 없는 펠로스였지만, 내 반응으로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아스트릴라가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봤다.

“이건…. 그러니까…. 혹시 황태녀 전하께서도, 신전이….”

횡설수설 입을 열려다 말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협상을 하고 있었고, 우리의 정보는 곧 패였다. 쉽게 정보를 내보이지 않는 편이 현명하리라.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펠로스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펠로스 역시 입을 닫는 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몸이 들썩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혹은 기대감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아스트릴라가 신전을 무너뜨린다고 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하얀 마석을 가지고 있다니. 그녀와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정말로 신전을 무너뜨리는 것도…….

“이게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시지 않을 겁니까?”

펠로스가 하얀 마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아스트릴라가 잇새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대는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방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이게 무엇인지는 나보다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펠로스가 슬쩍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마석에 닿는 것보다, 아스트릴라가 다시 마석을 회수해 가는 게 더 빨랐다.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는 없네. 이젠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지, 말 건지 결정할 시간이야.”

나는 이미 이 협상의 키가 그녀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 펠로스를 바라봤다. 일견 무표정해 보였지만, 그의 속에서 수많은 계산이 왔다 갔다 하고 있을 게 자명했다.

아스트릴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속에서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둘이서 조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으나 아스트릴라의 반응은 차가웠다.

“하게.”

자리를 피해 주거나, 우리 둘을 내보내 줄 생각은 없는 건가. 하긴, 이미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진 협상 테이블을 굳이 뒤엎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나는 망설이다 결국 펠로스를 툭 건드렸다.

“펠로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펠로스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나는 아스트릴라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우리를 집요하게 살피는 시선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속삭이는 것을 포기한 채, 나는 결국 속마음을 내뱉었다.

“그냥…… 받아들여요.”

“레이디!”

펠로스가 배신이라도 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스트릴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민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펠로스가 아스트릴라의 사람이 되어 우리가 더 이상 신전을 무너뜨리는 일에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할까 봐.

하지만 아스트릴라 역시도 신전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잘 생각해봐요. 우리가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에요. 우리는 어차피 신전을 무너뜨릴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 힘이 필요해요. 황태녀 전하는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거고요.”

“나는 그대들을 도와준다고 한 적이 없는데. 그대들이 나를 도와주는 거지.”

아스트릴라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쨌든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펠로스, 굳이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펠로스, 솔직히 인정해요.”

나는 몸을 낮춰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실은 이미 황태녀의 제안에 끌리고 있잖아요?”

펠로스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떨궜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스트릴라가 신전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했을 때, 펠로스의 눈빛을 본 자라면 누구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펠로스는 어째서 스스로의 마음까지 부정하면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걸까? 이 자처럼 흥미 본위로 움직이는 사람이 도대체 왜?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듯 아스트릴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도 데반을 황위에 올리고 싶은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군.”

“그래요, 펠로스. 데반은 황위 같은 것엔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고요.”

아스트릴라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는 원치도 않는 짓을 할 바엔, 차라리 나와 함께 정통성을 제대로 깨부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얼핏 불가능해 보이고, 또 재미있지 않은가.”

“펠로스…….”

한 쪽에선 아스트릴라가 설득하고, 다른 한쪽에선 내가 부탁하고 있었다. 펠로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중얼거렸다.

“황제를 죽이고 대신관을 죽인다…. 언제부터 이어져 온지도 모르는 이 제국의 체제를 뒤바꾼다…. 정통성의 전복….”

그러더니 한쪽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이토록 초조해 보이는 펠로스는 처음이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정통성의 전복이 아닌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친 아스트릴라가 와인을 들이켰다. 마침내 우뚝― 다리를 떠는 것을 멈춘 펠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 정리는 다 끝났나?”

아스트릴라의 물음에 크게 한숨을 한 번 쉰 펠로스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그는 아스트릴라를 따라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텅 빈 잔을 탕―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겠다고요!”

“펠로스, 정말 잘 생각했어요!”

환해진 얼굴로 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펠로스가 나를 거칠게 털어냈다.

“젠장, 레이디는 제가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뭘 준비해온 건지도 모르시면서 해맑기도 하십니다. 거기에 레이디는 방금, 황후가 되실 기회를 영영 놓치신 거라고요.”

“황후의 자리에는 관심 없어요. 그보단 데반의 목숨이 중요하죠.”

정말로 그런 지위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말하자, 펠로스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무사히 데반놈을 구하게 되면, 그 이야기 꼭 면전에다 대고 해주십시오.”

“……뭐예요, 그 말투는.”

“됐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펠로스가 다시 아스트릴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래서요? 저는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약속드리죠. 이 시간부로 데반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전하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뿐 아니지.”

“예, 예. 그뿐 아니라 전하를 도와 황위에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하고 그 뒤의 일도 책임지겠습니다. 선황을 죽이는 건 뭐……. 별 관심없지만요.”

“아주 든든하군.”

사람 하나를 죽인다는 말을 이들은 왜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하는 걸까.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서둘러 물었다.

“저기, 두 분 이야기 다 끝나신 거면 방금 그 마석이요. 그거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방금 전 얼핏 본 게 다였으니 기왕이면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역시 이게 뭔지 아는 모양이군.”

아스트릴라가 품속에서 다시 하얀 마석을 꺼내 건넸다.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역시 확실했다. 어릴 때 신전에서 봤던, 그리고 불과 얼마 전 마물에게 박혀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하얀 마석이었다.

심지어 마석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안에 아직 미약한 신력이나마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저도 보여 주십시오, 레이디.”

방금까지 풀 죽어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금세 흥미로운 얼굴이 된 펠로스가 말했다. 그는 빼앗아가듯 내 손에서 마석을 가져갔다.

“그래서 자네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펠로스가 마석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을 때, 아스트릴라가 내게 물어왔다.

“음, 뭐……. 전하의 말씀대로 어릴 때 신전에서 자랐으니까요.”

이 정도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녀가 눈썹을 까딱 들어올렸다. 서둘러 화제를 돌리고자 물었다.

“전하께서는요? 이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신전이 이것을 사용해 마물을 조종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역시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구하신 거죠?”

“뭐…….”

아스트릴라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그녀가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얼마 없는 취미 생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취미 생활이요?”

크흠, 괜히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제 허리춤을 툭툭 건드렸다. 거기엔 꼭 아스트릴라의 머리색을 닮은 검붉은 검이 있었다.

취미 생활, 검, 마물……?

단어 사이의 연관성을 찾다가,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설마 취미로 마물 사냥을 하는 건가? 꺼림칙한 표정을 보아하니 허가되지 않은 곳인 듯했고……. 그러다 우연히 신전에서 조종하던 마물을 죽였고, 마석을 얻었다…….

“자네는?”

“네?”

다시 들리는 아스트릴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네는 뭔가 더 알고 있나?”

“으음…….”

말해도 되는 걸까. 슬쩍 펠로스의 눈치를 봤지만 그는 여전히 마석을 살피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미 아스트릴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게…… 사실은 각 신력에는 특성이 있어요.”

“특성이 있다고?”

아스트릴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하얀 마석 안에 남아 있는 신력과 코델리아의 신력을 비교해 보고, 만약 둘이 동일하다면 신력 강탈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하려다 나는 모든 전말을 말해야만 그녀가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는 어렸을 때 신전에서 지냈는데요…….”

나는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신전에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했는지, 또 우리가 어젯밤 신전에 잠입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제국민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아스트릴라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이미 신전을 부수고 싶을 만큼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호오, 그래서? 그 코델리아라는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자네의 말이 맞다면, 그 여자의 신력이 마석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지금 당장이라도 신력을 감지하지.”

“사실은 지금 이 별궁 안에 있어요. 다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선 신력을 정확히 감지하기 어렵기도 하고, 또 그녀가 증인이 돼줄 수도 없을 테니까요.”

아스트릴라가 얼굴을 구겼다.

“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네의 신력으로도 불가능한가?”

“그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코델리아를 회복시킬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나에게 남아 있는 모든 신력을 쏟아 붓는 것.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녀가 살아날 거라는 확신은 없었고, 살아난 그녀의 신력이 하얀 마석에 든 것과 동일하다는 확신도 없지 않은가.

또 설령 모든 게 맞다고 해도 신력을 모두 쏟아내면 나는…….

“왜 그러지?”

이런 사정까진 차마 말할 수 없어 망설이자, 아스트릴라가 재촉하듯 물어왔다.

“그게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돌연 펠로스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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