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지금 저와 협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펠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스트릴라는, 더 재미있는 야망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데반을 버리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 제안하고 있었다.
“협상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아스트릴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펠로스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이미 지금까지의 대화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스트릴라라는 사람 자체에 흥미가 동한 게 컸다.
그런 와중에 더 재미있는 일을 제안받는다면? 정말로 덥석 수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막말로 데반은 펠로스가 자신을 황위에 올리려고 이토록 열심히 노력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은가.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황위에 올리는 것보다야, 이토록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
거기까지 생각하다 펠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스트릴라가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내 제안을 듣지도 않고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황태녀 전하. 다만…… 그 제안을 들었다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펠로스의 말에 아스트릴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그러기엔 제가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한 일이 아까워서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끄응, 소리를 내며 펠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없습니다. 없어서 문제입니다, 거참!”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에 아스트릴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전하.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 것 같군요.”
펠로스는 그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쾅-거센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라곤 없는 방문이었다.
아스트릴라는 인사 하나 없이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사내였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그럼 키베온, 저번에 채 끝내지 못했던 협상을 다시 시작해볼까?”
아스트릴라가 와인병을 테이블 위에 탁-내려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눈만 깜빡거리며 바라봤다. 저번에 끝내지 못했던 협상이라고? 둘 사이에 나는 모르는 어떤 말들이 오갔던 게 틀림없었다.
곤란한 얼굴을 한 펠로스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왜 보좌관을 시켜 저를 부르셨나 했더니, 그때 그 제안 얘기입니까? 죄송합니다만 전하, 저는 그 제안을 거절한 걸로 압니다.”
“첫째, 그대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네. 애초에 듣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둘째,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그대일 텐데.”
펠로스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상황이 달라졌다니요? 설마하니,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데반 놈을 구해주시겠다는 소리입니까?”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달라진 상황은 데반이 잡혀간 것 외엔 없었다.
펠로스는 아스트릴라가 대공 저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했었지. 그게 이거였다면? 펠로스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그 대신 데반을 구해주겠다는 소리라면?
침착하게 상황 파악을 끝낸 뒤 나는 아스트릴라를 홱 바라봤다.
“그 제안이라는 게 뭐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제가 대신 받아들일게요.”
“뭐?”
그녀가 황당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자네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다지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거기에 그렇게 된다면 족보가 꼬일 것 같은데.”
“……족보요?”
“내가 원하는 건 뭐랄까, 한 마디로…… 내 사람이 되는 거라서. 대공비가 내 사람이 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내 사람? 나는 다시 펠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펠로스는 부정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지금까지 큰 도움을 줬고.
그런 그가 아스트릴라의 사람이 된다는 건 그러니까…… 앞으로 신전을 무너뜨리는 일에도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소리인가? 손끝이 떨려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일단은…… 제안을 들어보죠.”
“펠로스!”
당황한 표정으로 펠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하는 그때 분명 저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정통성을 깨부수는 일이라고 하셨죠. 그게 단순히 전하의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펠로스는 보기 드문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데반을 구해주실 방법은 있으신 겁니까? 아무리 황태녀 전하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신전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아스트릴라가 제아무리 근위대병을 통솔한다 해도, 상대는 신전이었다. 황제조차 제 아래에 두고 있는 신전.
아스트릴라에게 따로 방법이 있는 걸까?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내가 그대에게 취할 것만 취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저는 단지 서로에게 솔직해지자는 소리입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펠로스가 말을 이었다.
“제가 먼저 하죠. 솔직히 말해서, 데반을 황위에 올리는 것보다야 당연히 데반의 목숨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살려놔야 황제가 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거기에 저와 레이디는, 데반을 구할 방법도 어느 정도 생각해 뒀습니다.”
“호오…….”
아스트릴라의 흥미로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며 동요하지 않은 척했다.
우리가 생각한 방법이라고 해봤자 하얀 마석에 든 신력과 코델리아의 신력을 비교하는 것뿐이었다. 아직 하얀 마석조차 구하지 못했으니, 말 그대로 어느 정도 ‘생각’ 까지만 한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펠로스의 지금 말은 허세였다.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하던 아스트릴라가 말했다.
“내가 데반을 구해줄 수만 있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그 방법이 그대들이 생각해 낸 것보다 믿을 만해야 한다는 거군.”
“바로 그렇습니다. 이젠 전하께서 솔직해질 차례인데, 어떻습니까?”
아스트릴라가 와인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우리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됐다.
“……일단, 나는 당연히 그럴듯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네. 물론 그게 그대들의 것보다 믿음직한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뭐―”
내가 덥석 끼어들었을 때였다.
“하지만.”
아스트릴라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내 제안에 대해 말해야겠군.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그 제안과 데반을 구할 방법이 서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건가?
긴장한 채 아스트릴라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춰 왔다. 꼭 나를 신뢰해도 괜찮을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펠로스에게 하는 제안이라고 했으니,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겠지만……. 데반을 구하는 일에 내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선을 모른 척하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데반에게도 한 말이니 숨길 필요 없겠지.”
데반에게도 한 말이라고?
“나는 황제가 된 후에, 선황을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대신관을 죽여 신전을 완벽히 무너뜨릴 생각이야.”
“…….”
“…….”
……뭐?
응접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선황을 죽인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아니, 그보다 신전을 무너뜨리겠다는 건…….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거든. 도대체 대신관이 무엇이길래 황제 위에 군림하느냔 말이다.”
내가 받은 충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아스트릴라가 말을 이었다.
제도에 처음 온 날, 아스트릴라를 만난 뒤에 데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거란 소리다.’
피바람이란 이걸…… 뜻하는 거였나? 데반은 그럼 그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가?
“자아, 나는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말한 것 같은데.”
아스트릴라가 펠로스를 향해 물었다.
“그대의 대답은 무엇이지, 키베온?”
펠로스는 나와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나와는 조금 결이 달라 보였다.
펠로스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신전이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하얀 마석에 신력을 주입해 마물을 조종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방금 전 힐다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지금…… 매우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흥분을 숨기느라 억눌린 게 분명한 목소리로 펠로스가 말했다.
“대답을, 대답을 드리기엔 아직 부족합니다. 데반을 구할 방법이 무엇인지, 아직 이야기 해주지 않으셨잖습니까.”
“아, 그렇군.”
아스트릴라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그 꿰뚫는 시선을 마주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대공비예요.”
“그래, 누가 뭐라고 했나?”
“……그러니까 자리를 피해드리진 않을 거예요. 데반의 일은 제 일이나 다름없어요.”
그녀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 터진 헛웃음 같기도 했다.
“그새 그렇게 애틋한 사이가 된 줄은 몰랐군. 데반이 돌아오면 꼭 말해 줘야겠어.”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리고 딱히 자네가 자리를 피해주길 원했던 건 아니네. 그저, 자네가 데반의 저주를 풀어줬고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바라본 거지.”
“……네?”
“신전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 디에고 백작가에 입양됐다지?”
“……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순간 떠오른 의문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는데, 꼭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스트릴라가 말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 대해, 자네가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녀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손에 쥐어 끄집어냈다.
“내가 데반을 구할 방법은 말하자면 물물 교환이다. 신전의 약점을 잡아, 그들을 협박한다. 약점을 폭로하지 않는 대신 데반을 풀어달라고 말이야.”
말이 쉽지. 신전의 약점을 잡는 게…….
그 순간, 아스트릴라가 쥐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탁-올려뒀다. 절로 시선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걸, 이걸 어떻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릴라가 꺼낸 것은, 하얀 마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