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펠로스 키베온. 그는 인생에 단 하나의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였다. 그 야망이라는 것은 너무나 이루고 싶은 것이라든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는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지키는 자였고 또한 자신의 친우를 위해…….
아니, 사실은 그저 그것이 자신이 아는 것 중 가장 허황되고, 그렇기에 가장 재미있는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데반 란티모스를 황위에 올리고 싶었다.
데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긴 야망이었다. 정확히는 데반이, 이렇게 웅얼거린 순간부터.
‘내가…… 황제가 되면 되잖아.’
펠로스는 그 말이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임을 알고 있었다.
‘난 정당성이라면 지긋지긋하거든. 네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이 펠로스가 도와주지.’
그러니 아마, 펠로스 역시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데반은 그게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생각한 반면 펠로스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펠로스는, 그를 황위에 올리는 게 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데반과 더욱 친해지면서 그런 생각은 공고해졌다.
펠로스는 데반이 황위에 어울리는 자라고 확신했다.
데반은 검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긴장하지 않았고, 지배자의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상 붉은 눈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데반의 모든 요소들은 그를 황제로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펠로스의 판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신전이었으므로.
데반은 자격 시험을 치렀고, 황제가 될 수 없다고 결정이 내려졌으며, 그대로 저주에 걸려 눈이 먼 채 변방으로 쫓겨났다.
카렌은 그를 따라 변방으로 갔지만, 펠로스는 그러지 않았다.
펠로스는 데반이 모든 의욕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저주를 풀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황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펠로스는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물밑작업을 했다. 데반이 황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아스트릴라에 대해 빠짐없이 조사했다.
제도를 떠나 부속 신전에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러다 저주가 풀린 데반이 나타났다. 에블린과 함께.
펠로스는 데반이 불쑥 찾아왔던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던 그가 사뭇 달라 보였던 그 순간을.
무언가 변할 것이다. 펠로스는 직감했고, 그 변화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저주를 풀다니, 정말로 저주를 풀다니! 펠로스는 환호했다.
저주를 풀었다는 것은……. 신전이 만들어낸 정통성을 부정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펠로스는 모든 것을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했고, 이 순간이 데반을 황좌에 올릴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펠로스는 그들과 함께 제도로 향했다. 이제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 위해.
*
“휴우…….”
펠로스는 화려한 황궁 복도를 지나며 낮게 한숨 쉬었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은 무겁고 불편했고, 방금 전 제 입으로 내뱉은 낯간지러운 말도 자꾸 떠올랐다.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아가씨께서.’
황궁에 잠입해 둘러보는 도중, 우연히 에블린과 부딪힌 탓이었다. 펠로스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시녀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자신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이 빚은 톡톡히 받아내리라, 결심하며 펠로스는 걸음을 바삐 옮겼다.
“황태녀 전하는 대체 어디에 계시려나.”
그가 찾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황태녀, 아스트릴라였다.
“불러놓고 시간과 장소도 안 알려주시다니, 원.”
펠로스의 혼잣말처럼, 그를 부른 것 역시 아스트릴라 쪽이었다.
저주가 풀린 데반과 만나고 제도에 오기까지 부속 신전에 머물렀던 며칠. 그 며칠 동안 펠로스는 데반을 황위에 올리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제도에 미리 심어뒀던 그의 정보원 몇몇에게 활동을 재개하라고 알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아스트릴라의 뒷조사를 하던 자에게서 의외의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숨어서 몰래 볼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아스트릴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마치, 펠로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
불만스러운 내용과 달리 그의 목소리엔 흥미가 가득했다.
사람을 시켜 아스트릴라의 뒤를 캐고 다닌 것을 알면서도, 죽이거나 잡아들이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다……. 심지어 시간도, 장소도 알려주지 않고.
그건 이쪽을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 아닌가.
펠로스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심지어 방금 전, 에블린과 마주친 것을 토대로 추론해 보건대, 아스트릴라는 데반과 에블린도 황궁에 부른 것 같았다. 그것도 그들이 제도에 온 바로 당일에.
제도에 온, 저주를 푼 데반을 아스트릴라가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펠로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제도에 온 첫 날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허를 찔렸어.”
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허를 찌르기 위해 제도에 온 첫 날, 아스트릴라를 찾아 황궁에 잠입한 참이었다.
어쩐지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군.
펠로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펠로스의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앉지.”
황궁을 두어 바퀴 돌며 근위대의 배치도를 파악한 뒤, 펠로스는 마침내 아스트릴라와 마주했다.
개인 침실에 불쑥 들이닥쳤음에도, 그녀는 놀란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스트릴라는 와인병을 가득 쌓아둔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펠로스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펠로스가 말했다.
“제가 올 것을 아신 모양이군요. 시간도 장소도 정하지 않았는데요.”
“그저 나라면 그랬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네. 실망시키지 않아 기쁘군.”
의사도 묻지 않고, 아스트릴라는 펠로스의 앞에 놓인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펠로스는 그녀에 대한 호감이 더욱 짙어지는 걸 느꼈다.
“저야말로 기쁩니다. 이토록 말이 잘 통하는 상대가 얼마 만인지요!”
황태녀를 향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말에도, 아스트릴라는 그저 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와인을 몇 잔 주고받았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건 아스트릴라였다.
“이제 슬슬 말해보지. 내 뒤를 왜 캔 건가?”
와인을 물처럼 들이키며,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일 것 같습니까? 전하였다면 왜일지, 생각해보셨을 텐데요.”
“생각해봤지. 하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네.”
“그것참 의외군요.”
아스트릴라가 자신의 잔에 와인을 다시 콸콸 채웠다.
“딱 하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긴 했지.”
“그게 뭡니까?”
연신 미소를 지은 채 펠로스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스트릴라는 와인을 한 모금 크게 마시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나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약점을 잡는 것.”
펠로스가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더군.”
“어째서입니까?”
“도대체 자네가 왜 나를 황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저 야망이 아니겠습니까.”
“야망? 야망이라고?”
아스트릴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키베온. 내가 생각하건대……. 나와 그대가 다른 점은 딱 하나네. 정통성.”
푸핫― 큰 소리를 내며 펠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스트릴라는 정말로 그와 소름 끼칠 정도로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정통성을 타고났지. 하지만 그대는 키베온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네. 장남이 아닌 차남. 그 덕에 얻을 수 없었던 게 아주 많더군.”
“바로 그렇습니다.”
“정통성을 빼앗긴 자들은 두 부류로 자라나지. 모든 걸 뒤엎을 정도의 야망을 가지거나, 혹은 체념하거나. 내가 보기에 그대는 후자야.”
“이것 참 서운하군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펠로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야망이 가득한 사내인데요.”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트린 아스트릴라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자네의 앞에 야망이 가득한 여인이 있네. 그 여인은 곧 황위에 오를 거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지. 그리고 그 앞에 앉은 한 사내가 있네. 그 사내는 뭐랄까……. 물에 빠지면 물살을 타고, 불이 나면 미련 없이 재가 될 것처럼 보이는군.”
하하하― 펠로스가 허리까지 꺾어가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스트릴라가 너무나 완벽하게 본질을 꿰뚫은 탓이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사내에게도 인생에 하나의 야망쯤은 허락될 수 있지요.”
“그 야망이 나를 황위에서 끌어내려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전하, 전하께서는 아직 황위에 오르시지 못하셨으니 끌어내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손한 언사에도 아스트릴라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펠로스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대신, 그녀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아직 황위에 오르지 못했다. 굳이 그 사실에 초점에 맞춘다는 것은…….
“아하, 이제 알겠군. 그대는 내 오라비와 친구 사이였지.”
“아, 하필이면 왜 그런 놈과 친구가 됐을까요! 저도 그 점이 아주 통탄스럽답니다.”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펠로스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대는 데반을 황위에 올릴 생각이군.”
펠로스는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아스트릴라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사내를 죽여 싹을 짓밟을 것인가, 혹은 그 싹을 제 아래에서 꽃피우게 만들 것인가.
전자가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사내는 짓밟기엔 너무나 탐이 나는 존재였다. 그녀 역시, 이토록 말이 잘 통하는 상대가 무척 귀했으므로.
“이건 어떤가. 내가 그대의 야망을 다른 쪽으로 채워주지.”
“다른 쪽이라면?”
“나를 황위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태라는 뜻이네.”
“전하.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야망은, 얼핏 불가능해 보이기에 재미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건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것 역시 정통성의 문제이지요.”
“정통성이라.”
“거기에 솔직히,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스트릴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데반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게 가시밭길이라면, 그녀의 길은 오솔길이었으니까. 그것도 지름길이 가득한.
그녀는 펠로스를 응시하며 와인잔을 툭툭 건드리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내가 다른 야망을 만들어주면 어떻겠나?”
“이를테면 어떤 것을요?”
“정통성을 깨부수는 일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데반이 황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 당연히 그만큼 재미있을 테고.”
펠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저와 협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