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85화 (85/123)

85화

다이닝룸에 갑자기 들이닥친 아스트릴라는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바로 어젯밤 데반이 체포됐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 게 분명했다.

나는 시녀에게 그녀를 응접실로 모시라고 한 뒤, 준비를 핑계로 다시 다이닝룸에 돌아왔다. 그리곤 여전히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펠로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죠? 황태녀 전하가 갑자기 왜 오신 걸까요?”

혹시 데반이 나를 대신해 끌려갔다는 걸 아는 걸까? 그래서 나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아니, 하지만 데반과 아스트릴라의 관계는 그다지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의 이유로…….

“설마 황태녀 전하도 신전과 손을 잡은 걸까요?”

속삭이듯 물은 내 질문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신전과 손을 잡을 분은 아닙니다. 다만…… 신전 쪽에서 먼저 찾아갔을 가능성은 있겠군요.”

“신전에서요? 왜요?”

“아까 전, 신전은 데반의 침입을 황위와 엮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었죠.”

“……네.”

불안감에 가슴이 요동쳤다.

“신전은 데반이 자신들의 권위에 반발했다고 몰아갈 겁니다. 그래서 신전에 몰래 침입한 거라고요. 더군다나 공교롭게도 데반은 하필, 신전에서 내린 예언으로 저주 받은 황족이 아닙니까.”

“그럼…….”

“신전의 예언을 부정한다는 게 뭘 뜻하겠습니까.”

예언을 부정한다는 건 곧 자격시험을 부정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황좌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

아스트릴라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펠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데반이 황태녀 전하를 몰아내고 황좌에 오르려고 했다……. 이번 신전 침입 역시 그와 관련된 사항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짜 맞추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수가…….”

안 그래도 데반에게는, 황좌를 노리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단순 신전 침입이 아니라 반역으로 몰린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불안한 눈으로 펠로스를 바라봤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신전에 침입했다는 것 하나로 엮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겁니다.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걸 알기에 황태녀 전하를 찾아갔을 수도 있죠.”

“그들이 또다시 뭔가를 조작하려고 하는군요. 데반이 황좌에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어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그 무엇으로도 조작할 수 있을 겁니다. 황태녀 전하의 힘이 더해진다면요.”

“황태녀 전하가…… 그분이 수락하셨을까요? 신전과 손을 잡을 사람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글쎄요.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펠로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의 얼굴에 착잡함이 가득했다.

“데반을 몰아낼 때까지의 일시적인 동맹이라면, 황태녀 전하로선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입니다.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하지만 펠로스. 그래도 둘은 혈육이잖아요! 설마…… 데반을 죽게 만들진 않을 거예요.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요.”

“이런, 레이디. 바로 그 점이 가장 위험한 거랍니다.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면 데반이 위협이 될 리도 없었을 테니까요.”

설마, 그럴 리가….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역의 증거가 나오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아스트릴라도 알고 있을 텐데.

입술을 짓씹으며 펠로스를 바라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시게요?”

“……이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순 없어요. 만나서 뭐라도, 어떻게든 설득을 해봐야죠.”

펠로스가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그래도 한 가지 우리에게 다행인 점이 있지 않습니까.”

“다행이라고요? 대체 뭐가요?”

“지금 이 별궁에 황태녀 전하가 스스로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자, 펠로스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건 그녀가 아직 협상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

“내가 왜 왔는지 묻지 않는군.”

먼저 입을 연 건 아스트릴라였다. 우리는 커다란 응접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식어갔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로 그녀가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거라면, 어떻게든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야 하니까.

“데반의 일 때문에 오신 게 아닌가요?”

“그래, 그렇지.”

아스트릴라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미형의 외모를 가졌다는 것 외에는 데반과 이렇다 할 닮은 점이 없었다. 그러나 꿰뚫는 듯한 시선 하나는 너무나 익숙했다.

당당해 보이기 위해 턱을 치켜들었으나, 그녀에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 대충 상황을 아는 것 같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지.”

팔짱을 풀고 테이블로 몸을 가까이 붙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일단 나는 데반을 죽일 생각이 없다.”

“……네?”

의연한 태도도 잠시, 아스트릴라의 입에서 나오는 의외의 말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정확히는 죽일 필요성이 없다고나 할까.”

마음만 먹으면 죽이는 것 따위 어렵지 않다는 듯, 아스트릴라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말은…… 데반을 구해주신다는 건가요?”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 죽이지 않는다는 게 구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데반을 죽이지 않겠다는 건, 신전과 손을 잡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굳이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당연히, 나에게 요구할 게 있어서일 거고.

그러나 아스트릴라는 쉽게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저에게 제안하실 게 뭐죠?”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물었다.

“데반을 구해주는 대신,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테니까.”

나는 그녀의 번쩍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지지 않고 응시했다.

“…….”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스트릴라가 갑작스레 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심지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커다란 테이블이 부서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위력이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자, 곧 웃음을 갈무리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그대가 뭘 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단 많은 것을요.”

아스트릴라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글쎄, 내가 그대를 얼마나 믿어야 할까.”

“……데반을 믿으시던 만큼만요.”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고였다.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던 아스트릴라가 돌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꼭 자기를 위해 놓인 물건인 양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뭘 하려는 거지?

얼마 안 가 노크 소리가 들리고 노집사가 들어왔다.

“황태녀 전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이 쓸모없는 차는 치우고, 와인을 가져오지.”

노집사는 잠시 나에게 시선을 뒀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잔은 세 개 준비해주게.”

“예.”

분명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둘임에도, 노련한 집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어느새 다시 여유로운 태도로 팔짱을 낀 아스트릴라가 내게 물었다.

“술은 조금 하나?”

“뭐…….”

방금까지만 해도 팽팽했던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가볍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데반보다는 잘 하죠.”

다시금 하하하, 하고 아스트릴라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잔 하나는 누구의 몫이죠?”

“누구의 것일 것 같나?”

물어봐 놓고,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다. 나는 이곳에 제안을 하러 왔지. 어쩌면 내 멍청한 오라비를 구할 수도 있을 제안 말이야.”

“…….”

“하지만 그 상대는 그대가 아니야. 아니,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잔 하나는 그 상대의 몫이겠군요.”

“그렇지.”

제안을 할 사람이 내가 아니라니. 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처음 그녀가 협상을 하러 왔을 거라는 펠로스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제안이 대공가의 공식적인 입장과 관련 있을 거라 여겼다. 데반이 잡혀간 지금, 나는 대공비로서 대공가의 공식적인 주인이 됐으니까.

사실 그게 아니라면, 아스트릴라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원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제안할 사람이 내가 아니라니? 그 말은…… 이 협상이 대공가와는 관련이 없다는 소리일까? 만약 그렇다면…….

“……펠로스 키베온인가요?”

아스트릴라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집사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마치 이 극적인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듯 펠로스가 서 있었다.

“앉지.”

예상했던 것처럼 아스트릴라가 제안했다. 펠로스는 잠시 상황을 가늠하는가 싶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노집사는 와인병이 가득 담긴 트롤리를 테이블 옆에 두고, 와인잔 세 개를 각각 우리의 앞에 내려놨다. 그리곤 와인을 따르기 위해 하나 집어 들려고 했으나 아스트릴라가 저지했다.

“이만 나가보게. 내가 하지.”

노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빠르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응접실 안에는 나와 아스트릴라, 그리고 펠로스 셋뿐이었다.

“흐음.”

늘어지는 탄성을 내뱉은 펠로스가 여유롭게 물었다.

“황태녀 전하 덕분에 오늘 와인은 원 없이 마시겠군요.”

“그보다 인사가 먼저일 텐데. 그대의 방자함은 여전하군.”

나는 아스트릴라와 펠로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야 펠로스는 데반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황가에 자주 드나들던 귀족이기도 하니 아스트릴라와 조금쯤 안면이 익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 태도는…….

“두 분이 친하신가요?”

참지 못하고 묻자 아스트릴라가 짧게 웃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와인병에서 코르크마개가 퐁-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스트릴라가 세 개의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며 말했다.

“비슷한 부류는 끌리기 마련이니까.”

펠로스가 황당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를 전하와 비슷한 부류로 매도하지 마십시오.”

“끌린다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군.”

탁-와인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아스트릴라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 키베온, 저번에 채 끝내지 못했던 협상을 다시 시작해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