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바로 이게 두 시간 전, 대공비 전하께서 신전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신관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다시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나를 데반이 저지했다.
“제국법상 위치 추적이 가능한 건 그 마도구의 주인뿐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저희가 위법을 저질렀다 이 말이십니까?”
신관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감히 대공비 전하를 연행해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빈정대며 나를 바라보는 신관의 시선에도 무어라 반응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주인만이 마도구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신전이 어떤 마도구를 통해 내 위치를 추적했고, 그 마도구는 현재 이 별궁에 있고, 그것의 주인은 신관이라고?
나는 신관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이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내게 위치 추적 마도구를 붙여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신관은 방금 떳떳하지 못한 방식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만약 그랬다간 어차피 차후에 밝혀질 테니까.
나를 잡아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나중에 신전이 위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오히려 신전 측에 손해였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내가 가진 물건 중에, 정확히는 지금 별궁에 있는 물건 중에 어떤 것이 신관의 소유라는 건데…….
퍼뜩, 펠로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전에서 킬리언 디에고를 이용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마도구의 주인이… 반드시 신관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저 신전의 편에 선 누군가이기만 하면….
만약 킬리언이 마도구의 주인이라면? 그러니까 킬리언이 나에게 줬던…… 그 펜던트로 위치 추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데반을 바라봤다. 그 펜던트를, 데반이 어떻게 했다고 했더라?
‘……그래도 찝찝한데, 그냥 부수지, 왜요?’
‘……어딘가 쓸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부수거나 없애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은…… 지금 이 별궁에, 펜던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고.
경악 어린 눈동자로 데반을 바라봤다. 여전히 화가 난 듯한 그는 내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데반…….”
떨리는 손으로 겨우 그의 팔뚝을 꾹 쥐었다.
“에블린?”
데반은 그제야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홱-고개를 돌려 신관을 바라본 데반이 차갑게 말했다.
“잠깐 자리를 피해 주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신관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둘 중 누구도 연행되지 않았고, 우리의 신분은 그대로니 무리한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계속되는 엄포에 결국 신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다른 신관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마침내 둘만 남은 방에서, 데반의 고개가 다시 나에게 향했다.
“데반, 저…….”
“일단 진정해.”
그러나 내 손을 토닥이는 데반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역시 마도구가 무엇인지, 누구의 짓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킬리언, 그자의 짓이군.”
“데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외에는 달리 없지 않나. 신전에서 그자를 이용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펠로스의 추측이 사실이었어.”
“하지만…… 그게,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러니까, 그 펜던트의 주인은 저잖아요!”
나도 모르게 따지듯 묻자, 데반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도구의 주인은 그런 식으로 정해지는 게 아냐. 마법이 걸리는 시점에 물건의 소유권을 가진 자. 그자가 주인이 된다.”
“그럼 결국, 그 물건을 실제로 가진 자가 누군지와는 상관없는 거예요? 선물을 받거나 한다면…….”
“보통은 소유권을 넘겨주기 마련이지. 네 경우엔 아닌 것 같지만.”
아무래도 마도구와 위치 추적에는 내가 모르는 조건이 가득한 것 같았다. 데반은 경험자에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대공이니만큼 그런 조건이나 법에 대해 박식한 것 같았고.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물었다.
“……지금 그 펜던트는 어디에 있죠? 정말로 별궁에 있는 게 맞나요?”
“그래, 아마도…….”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데반이 낮게 신음했다.
“젠장…….”
“하지만 이상해요. 우리가 그걸 들고 신전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신전에 있었다고 나왔을까요?”
그래, 만약 그 펜던트로 위치를 추적한 게 맞다면 내내 별궁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신전에 잠입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거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데반이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됐군.”
“데반?”
“위치 추적은…… 빠져나가기 힘든 증거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으로 말을 이었다.
“대체적으로, 위치 추적은 조작이 불가능해.”
나는 움찔 손을 떨었다. 대체적이라는 말은…….
“신전은…… 조작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래. 신전의 돈과 권력, 거기에 마탑주와의 인맥까지 동원한다면……. 더군다나 그들은 너를 잡는 것에 혈안이 돼 있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일 거다.”
어쩐지. 그들은 단순히 신전에 침입한 것만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었다. 신전은 계속해서 나를 잡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를 잡아감으로 인해, 코델리아를 돌려받고 또다시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거짓을 조작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진실을 조작했어. 그 펜던트를 그자가 너에게 줬다는 사실도, 그것에 위치 추적 장치가 달려있다는 것도 모두 진실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신전에 잠입한 것도…….”
“……진실이죠.”
그에 반해 나에겐 혐의를 부정할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데반이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고 말한 이유를 여실히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신전에게 붙잡히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지금까지는 대공비라는 지위가 지켜줬지만, 범죄자의 신분이 된다면…….
안 그래도 신력을 거의 다 소진해 기운이 없었던 나는 점점 머리가 어질거리는 걸 느꼈다.
“……데반.”
어쩔 도리 없이 데반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벌컥― 닫혔던 문이 열렸다.
“이 정도면 시간은 다 드린 것 같군요.”
신관들이 다시 문 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그들의 옆에는 아까까지는 없었던 근위대병들까지 서 있었다.
어쩐지 순순히 자리를 피해준다 했더니, 병사들을 불러올 생각이었던 건가.
근위대병들에게 킬리언이 끌려갔던 일이 떠올랐고, 절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럼 나도… 나도 황궁 감옥에 갇히게 되는 건가? 아니면 곧바로 신전에 가서 예전에 겪었던 그런….
“그럼 대공비 전하를 신전에 무단 침입한―”
“잠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신관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불쑥 데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나를 체포할 기세였던 병사들이 주춤 물러났다.
“아직도 뭐가 불만이십니까? 증거는 보여드릴 만큼 다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만?”
신관이 데반에게 삐딱한 투로 말했다.
“불만이라고 한 적 없네. 다만 잡아갈 사람을 헷갈린 것 같아서 말이야.”
“예?”
뭐? 나는 내 앞을 가리고 선 데반의 너른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잡아가야 할 건 나네. 신전에 침입한 건, 에블린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소리지.”
“그게 무슨!”
“데반!”
그를 저지하려고 한 발 나섰지만, 데반은 오히려 내 앞을 더욱 단단히 버티고 섰다.
“위치 추적은 굉장히 포괄적인 공간만을 보여주지. 그 구슬에 나타난 건 그저 이 별궁의 외관일 뿐이었네. 거기 어디에도, 펜던트가 에블린에게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소리네.”
“아니, 그 펜던트는 분명!”
소리치던 신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위치 추적에 사용한 마도구가 킬리언의 펜던트라는 것을 고백한 셈이었다.
“역시 그 펜던트가 맞았군.”
“……그건 분명 저, 대공비 전하의 것입니다.”
더 이상 부정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신관이 이를 갈며 말했다.
“분명 그랬었지. 그게 언제더라…. 일 년도 더 전의 일인데….”
데반은 여유로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에블린이 그걸 놓고 갔었거든. 그 이후로 내가 간직하고 있었지.”
“그런 말은―”
“믿기 힘들다면, 지금 내 집무실에 가서 직접 찾아보게. 집사가 안내해줄 테니까.”
신관이 주먹을 꼭 쥔 채 데반을 노려봤다. 궁지에 몰린 것은 분명 우리임에도, 꼭 상황이 반전된 것 같았다.
“……데반.”
나는 그의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데반의 말은 펜던트가 정말로 별궁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나를 대신해 희생할 생각이었다. 도대체 왜?
“데반,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요. 이건…….”
“좋습니다.”
그러나 내 부름에 응답한 건 데반이 아닌 신관이었다. 그는 여전히 데반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근위대병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대공 전하를 체포하라.”
“잠, 잠깐만요!”
정말로 이렇게 데반을 데려간다고? 당황한 얼굴을 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데반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체포할 필요 없다. 내 발로 가지.”
“데반!”
나는 황급히 데반의 앞으로 가 그를 가로막았다. 데반이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퍽 태연해 보였다. 설마 모든 걸 체념한 걸까?
“데반……. 안 돼요. 제발요.”
그리고 나는 대체 언제부터 그에게 이렇게 의지하게 된 걸까.
빌 듯이 속삭이자, 데반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오른팔을 들어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저번과는 달리 퍽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처음 신전에 펼쳐진 참극을 본 그날처럼,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펠로스와 카렌에게 지금의 일을 모두 말해. 수는 생길 거다.”
“하지만―”
“지금 네가 잡혀간다면 모든 게 끝이야. 이게 최선이다.”
모든 게 끝이라고? 그 소리는……. 멍하니 데반을 바라보고 있자, 참다못한 신관이 소리쳤다.
“어서!”
근위대병들이 엉거주춤 데반의 팔을 양옆에서 붙잡았다. 데반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데반…….”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데반이 작게 덧붙였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에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