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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82화 (82/123)

82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웬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었다. 푹신한 담요를 덮은 채였다.

여기가 어디지? 방금까지의 기억이 밀려들어 오며, 동시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으으…….”

작게 신음을 내뱉자, 곧바로 목소리가 화답했다.

“에블린! 정신이 든 건가?”

“……데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빠져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신력을 거의 다 소진한 탓이었다.

“지금…… 어떻게 된 거죠? 사람들은요? 모두 무사히 나온 건가요?”

데반이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앉아, 내 머리칼을 천천히 쓸기 시작했다.

“그래. 네 시녀와 대공 저의 병사들 모두 안전하다. 미리 준비해둔 포탈을 이용해 이미 모두 대공 저로 보냈어. 다친 이들이 있긴 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야.”

“대공 저로 보냈다고요?”

“이곳에 있다간 또 다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네 시녀였던 아이는 여기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군.”

“유니스…….”

데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시녀는 펠로스와 함께 보석상을 정리하는 걸 돕고 있다. 굴 입구를 마찬가지로 폭파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마루를 덮어야 하거든.”

“그럼…….”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여기, 보석상인가요?”

“맞아. 정확히는 굴이 있는 방 바로 옆이지.”

“그럼 저도 도와야…….”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데반이 단호한 손길로 나를 저지했다.

“조금 더 쉬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니까.”

하긴, 지금 일어나봐야 도움이 되긴커녕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군소리 없이 다시 몸을 뉘였다.

“저, 데반.”

“또 뭐가 궁금하지?”

“……아이들은,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는 거죠?”

데반이 시선을 떨궜다. 낮은 침묵이 쉬이 할 수 없는 대답을 대신했다.

코델리아도 이미 사라져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아이들을 신전이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신전을 향한 숨길 수 없는 분노와 적대감이 치솟았다.

“그리고…….”

데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코델리아, 그 아이도 무사하다.”

“무사하다고요?”

번뜩 고개를 들었다가, 현기증이 나 다시 누웠다.

“그래, 정신을 차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별궁으로 보내 뒀다. 카렌이 데려갔지.”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코델리아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더라도, 당장 그 끔찍한 지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안심이 됐다.

“고마워요…….”

“……단지, 그자의 신력과 하얀 마석을 비교하면 신전의 악행을 폭로할 수 있다는 말 때문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카렌이라고 해도 그자를 버리고 왔겠지.”

데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요. 카렌에게도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그래. 곧 마루를 모두 복구하면 우리도 별궁으로 갈 테니까. 오랜만에 술이라도 기울이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군.”

데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에 나도 따라 간신히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데반! 레이디!”

옆방에서 마루를 수리하고 있다던 펠로스였다.

“무슨 일이지?”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며 데반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게, 펠로스는 그에게서 쉬이 볼 수 없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 경악, 분노, 그리고…….

“카렌에게서 연락이 왔네. 신전이, 신관들이 별궁에 들이닥쳤어!”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

우리는 포탈을 이용해서 곧바로 별궁으로 이동했다. 보석상의 흔적을 마무리하는 것은 펠로스와 유니스에게 맡긴 채였다.

다행히 포탈은 별궁 내, 데반의 집무실로 연결돼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카렌이 나타났다. 집무실에서 내내 대기하고 있었던 듯했다.

“전하!”

“도대체 무슨 일이지? 신관들이 들이닥치다니?”

질문을 하면서도 데반은 빠르게 움직였다. 설렁줄을 움직여 집사를 부른 뒤, 그에게 내 시녀를 데려오라 일렀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뭔가를 알고 온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시각에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짓을 하진 않을 테니.”

얼마 안 가 내 시녀가 노크를 한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내 모습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에블린.”

데반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하게 행동해야 하니, 일단 시녀와 함께 가 옷을 갈아입고 와.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

“하지만 그럴 시간이…….”

“애초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저쪽이다.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한대도 할 말은 없을 거야.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맞이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걱정이 가득한 내 얼굴을 바라보던 데반이 작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으니까.”

……그래. 설령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를 추궁할 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흔적을 지웠고, 그들이 내세울 증거라고는 사라진 병사들과 유니스, 코델리아뿐이었다.

설령 이 별궁에서 코델리아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코델리아에 대해 숨기고 있었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데반의 눈짓에 따라 시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간단하게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응접실로 내려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그곳엔 이미 데반과 신관들이 앉아 있었다.

“에블린.”

데반이 제 옆자리를 턱짓했다. 천천히 그 자리에 가 앉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맞은편에 앉은 신관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훑어보고 있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절로 움츠러들만한 흉흉한 기세였다. 그러나 데반은 퍽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기다리게 했군.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이야기하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그가 덧붙였다.

“도대체 이 늦은 시각에 연락도 없이 이토록 무례한 짓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일세.”

신관들 중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자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데반의 태도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대공 전하.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러니 그 사안이 무엇인지 묻고 있지 않은가. 미리 말하건대, 대수롭지 않은 일로는 우리의 발을 오래 묶어둘 수 없을 거야.”

“오늘 저녁, 신관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데반의 경고에도 신관은 머뭇거림 하나 없었다. 그 태도에 외려 내가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설마 굴이 폭파되기 직전, 우리의 얼굴을 보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봤다고 하더라도 명분이…….

떨리는 내 손 위로 데반이 손을 겹쳐왔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것 참 중대한 사안이긴 하군.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왜일 것 같습니까?”

신관이 사나운 눈초리로 물었다. 제 아무리 신전의 힘이 세다고 한들, 이 자는 그저 한낱 신관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데반은 어쨌든 한 나라의 황족이자 대공이었고.

건방진 태도에 데반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신관은 여전히 흉흉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 침입자가 바로 대공 전하, 아니…….”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대공비 전하이기 때문입니다.”

뭐? 당황한 내가 손을 움찔거렸다. 여전히 내 손을 포개고 있던 데반이, 다시 한번 단단히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증거를 내놓으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다시 데반에게로 시선을 돌린 신관이 품 안에서 반짝이는 구슬을 꺼냈다.

저게 뭐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 구슬을 바라봤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땐 마도구의 일종인 것 같았다. 저 마도구에 내가 오늘 신전에 침입했다는 증거가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아마 대공 전하께서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고개를 홱 돌려 데반을 바라봤다. 어느새 여유롭던 데반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길래?

“이건 위치 추적기입니다.”

뭐?

“자…….”

신관이 구슬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구슬이 한 번 반짝거리더니, 이내 어떤 장소를 표면에 띄웠다. 그건…… 다름 아닌 이 별궁이었다.

“제대로 작동하는군요. 현재 위치가 이곳이니 당연한 수순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나는 겨우 신관을 쏘아봤다.

“현재 위치가 이곳이라뇨?”

“맞지 않습니까. 대공비 전하께서 지금 제 앞, 별궁의 응접실에 앉아계시니 말입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정말로…….

“지금, 제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리인가요? 무슨,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한 거죠?”

따지는 듯한 내 말투에도 신관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권리는 필요 없습니다. 이 구슬이 추적하고 있는 건 그저 한 물건일 뿐이니까요.”

물건? 물건이라니…….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추적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하지만 그것 역시 무슨 권리로…….

당황한 내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신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신관이 구슬을 옆으로 스크롤했다. 순식간에 표면에 떴던 별궁의 모습이 지워지고, 다른 장소들이 빠르게 나타났다.

그리고 신관이 손가락을 뗐을 때, 그곳에 나타난 건 신전의 전경이었다.

“자, 바로 두 시간 전의 모습입니다.”

기세등등한 얼굴을 하고선 신관이 구슬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바로 이게 두 시간 전, 대공비 전하께서 신전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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