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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81화 (81/123)

81화

여전히 아이들은 축 늘어진 채 서로 얽혀 있었다. 나는 유니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쪽을 바라봤다.

“에블린.”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데반이 서둘러 나를 안아 올렸다.

“아이들이…….”

데반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번 보고 싶어요.”

설령 살릴 수 없다고 해도,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않고 떠나버리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데반이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우리는 아이들의 앞에 도착했다. 유니스에게 했던 것처럼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신력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살릴 수 없는 거구나.

사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었다. 아이들은 십수년 전부터 똑같은 상태로 얽혀 있었을 것이다. ……전혀 자라지 못한 모습으로 유추해 보건대.

더군다나 병사들과 유니스와는 달리, 신력을 타고나기도 했고.

그 많은 신력을 빼앗겼으니, 자연히 텅 빈 공간도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텅 빈 몸뚱어리겠지. 억지로 생명력을 강탈당해 성장조차 멈춘 몸뚱어리.

나는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에블린, 괜찮은 건가?”

입을 벙긋거리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반이 착잡한 표정으로 나와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 신관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이밍 좋게 펠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어……! 데반 놈의 말이 정말이었군요!”

굴을 모두 판 모양인지, 어느새 펠로스와 카렌이 주위를 둘러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반이 그에게 명령했다.

“펠로스, 카렌. 생존자들을 안내해라.”

“예, 전하.”

펠로스의 뒤에 있던 카렌이 듬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병사들을 살피고, 붙잡아 일으켜주면서 한 명씩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편, 펠로스는 굴 주변에 무언가를 장치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가 모두 빠져나가면 다시는 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무너트릴 작정인 듯했다.

“저…… 데반.”

그리고 나는 여전히 데반의 품에 안긴 채, 그를 올려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할 말이 무엇인지 눈치챈 듯 데반이 낮게 혀를 찼다.

“……부탁이에요.”

한숨을 한 번 쉰 그가 나를 안아 올린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코델리아의 앞이었다. 여전히 지하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 이제는 그 어떤 신력도 받지 못하고 있는 코델리아.

나는 코델리아를 내려다 봤다. 그녀에게 이어져 있던 새하얀 실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코델리아의 상태는 더더욱 안 좋아 보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초췌했다. 그녀에게 공급되던 신력이 사라진 탓인지, 아니면 그저 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에블린.”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데반이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우선순위는 네 안전이야.”

“……알고 있어요.”

“아니, 모르는 것 같은데. 잘 봐. 지금 네 얼굴이 이 여자보다 더 안 좋단 말이다.”

데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과장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유니스와 병사들을 살렸을 때부터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데반이 나를 껴안고 움직이는 이런 부끄러운 상황에도 군말 없는 거였고.

“이 상태로 대체 뭘 어쩔 생각이지?”

“…코델리아를… 코델리아를 구해야죠….”

“네 신력을 나눠줄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코델리아를 살릴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내 신력을 나눠주는 것.

다행히도 신력은 완전히 소진되지 않고 내 몸 안에서 찰랑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 말은 내가 당장 죽지는 않을 거란 소리였고.

물론…… 신력을 나눠 준다고 해서 코델리아가 정신을 차릴 거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유니스와 병사들은 본래 신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전달한 약간의 신력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코델리아는 나와 맞먹는, 어쩌면 나보다 더 방대한 양의 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든 신력을 소진했다는 건…….

지금 내 안에 남아 있는 신력을 모두 퍼붓는다고 해도 과연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에블린.”

데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 봤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표정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이 자를 구하기 위해 네가 희생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네가 그랬지. 이 자가 아픈 게, 네 탓이라고.”

데반은 오래 전, 제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내가 했던 말을 꺼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자와 네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그때와 입장이 같아.”

입장?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천천히 떠올렸다.

‘하지 말라곤 못하겠고. 그냥 적당히 하라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이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내가 아무리 신력에 무지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지.”

“…….”

“지금 이자에게 신력을 나눠준다면… 너는….”

말을 잇기 힘든 듯 데반이 잠시 숨을 골랐다.

“너는 죽어, 에블린.”

섬찟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죽는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오로지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던가. 신전에서, 백작가에서, 대공 저에서, 엘리운에서…….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살겠다고 코델리아를 외면한 것도 나였다.

이렇게 될 줄 정말로 몰랐나? 내가 살아남으면, 코델리아가 어떻게 될지 정말로 몰랐느냐고.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처음 전생을 기억해냈을 때부터, 코델리아가 백작가에 입양되지 못하도록 신력을 쓰지 않았을 때부터, 그녀 대신 납치당했을 때부터, 그녀가 신전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코델리아를 희생시키더라도 살고 싶었던 게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이젠 코델리아를 살리겠다고…….

정말 그러고 싶긴 한 걸까? 이 모든 게 그저 내 마음 하나 편하자고 하는 위선은 아닌가.

“에블린.”

포기를 종용하듯 데반이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알고 있었다. 포기하는 게 맞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줄 용기 따윈 없는 사람.

그런데도 자꾸만 미련이 생기는 건, 내가 그녀에게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원래대로라면 우리의 입장은 정반대였을 테니까.

죽는 것도, 버려지는 것도 나였을 테니까. 그런데 나마저 그녀를 포기한다면…….

“에블린, 이제 그만―”

그 순간이었다. 쿠웅― 작은 진동이 지하를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데반이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데반의 팔뚝을 세게 쥐었다.

“그들이에요. 그들이, 그들이 오고 있어요!”

“뭐?”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을 움직인 거예요. 우리가 저번에 타고 내려왔던 그 오르간이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할 때는 그걸 움직여서―”

“그만 말해도 돼.”

숨이 차올라 헐떡이자 데반이 말을 끊었다.

파이프 오르간에서 이곳까지는 고작 몇 분이었다. 저절로 시선이 코델리아에게 향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전하!”

그 순간 카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명했다.

“신관이 오고 있다. 어서 준비해.”

카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몇 명 남은 병사들을 향해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전하도, 레이디도 얼른 피하십시오. 거의 다 대피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뒤이어 펠로스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데반! 굴 입구를 폭파해야 해. 서둘러!”

데반이 망설임 없이 굴 쪽으로 향했다. 그에게 안긴 나는, 몸을 버둥거릴 힘조차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데반!”

그러나 데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코델리아가 점점 멀어져 갔다. 모두에게 등 돌려진 채 차가운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여자가 망막에 맺혔다.

그게 꼭…… 내 모습 같았다. 원작에서 죽었던 내 모습. 운명을 빼앗긴 그녀가 이제는 나를 대신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코델리아를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놔두고 싶진 않았다. 하다못해 그녀가 정말 죽더라도, 신전이 아닌 곳에 묻어주고 싶었다.

그 순간, 코델리아와 가까이 있는 카렌의 모습이 보였다.

“……카렌 경!”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카렌이 돌아봤다.

“부탁해요!”

“……예?”

“코델리아를, 저 사람을 데려가 줘요!”

카렌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데반과 나는 굴 바로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모두 대피를 완료한 듯 내부엔 정신을 잃은 아이들과 코델리아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카렌 하나였다.

“카렌! 어서!”

펠로스가 소리쳤다. 나를 한 번, 코델리아를 한 번 번갈아 보던 카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코델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카렌 경!”

코델리아를 둘러맨 채 카렌이 달렸다. 그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펠로스가 미리 설치해둔 장치를 조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조각상 쪽의 문이 열린 것은. 문틈으로 휘날리는 새하얀 옷자락이 보였다. 신관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어서…… 어서 달려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되듯, 데반, 펠로스, 카렌이 차례로 등을 돌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굴 입구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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