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80화 (80/123)

80화

“레이디, 남은 담요들을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아, 네.”

펠로스의 부탁에 나는 허둥지둥 방 안으로 들어가, 나와 데반이 깔고 잤던 담요를 한 아름 챙겨왔다.

펠로스는 그것들을 미리 정리해 둔 담요와 한곳에 모은 뒤 그 위로 작은 구슬을 던졌다. 담요에 불길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것도 마도구인가요?”

신기해서 묻자 펠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불의 마법을 농축한 거라고 할까요. 생명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죠.”

“그렇군요.”

“다른 것들도 처리해야겠습니다. 레이디가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럼요.”

나는 펠로스를 따라 주방 쪽으로 향했다. 굴 안에 있는 주방이라고 해봐야 그저 테이블과 식료품 몇 개가 놓인 게 전부였지만.

오늘 저녁, 우리는 신전으로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을 구하고 다시 이 굴을 이용해 도망칠 계획이었다.

굴의 존재 자체를 들키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설령 들키더라도 우리와 연결 지을 수 없도록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카렌 경과 데반은 어디에 갔어요?”

앞장선 펠로스에게 물었다. 어젯밤 피곤했던 탓인지, 내가 조금 늦게 잠에서 깼더니 두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출구를 미리 살펴본다고 갔습니다.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겠죠. 자, 그럼 레이디.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빼서 저쪽에 옮겨두죠.”

“아, 네.”

펠로스를 따라 식료품들을 옮기면서도, 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말로 몇 시간 후면 신전에 들어간다니. 그곳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 병사들과 유니스, 거기에 코델리아까지. 모두를 만나고 구할 수 있다니.

펠로스나 카렌이 분위기를 풀어주었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굴 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쾌적한 공기 덕분에?

수백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태연하게 먹고 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코델리아……. 그녀는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얇은 신력에 연결된 채 정지해 있던 그녀가 떠올랐다.

죽음을 닮은 그 초췌한 얼굴이.

*

푸욱― 퍽―

카렌이 흙을 파는 소리가 굴 안에 울렸다.

흔적을 모두 지운 우리는 저녁이 되자 어제 계획했던 대로 길을 나섰다. 굴의 끝부분에 도착하자, 미리 출발했던 카렌과 데반을 만날 수 있었다.

카렌은 이미 마지막 흙벽을 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그 너머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벌써 삼십 분째였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굴이 뚫렸어야 했다.

혹시 신전에서 벽을 제대로 마감해 놓지 않았다는 건 데반의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두 손을 꼭 쥐고, 카렌의 뒤에서 마치 기도하듯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후두둑-마침내 흙더미가 무너졌다. 주먹 크기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전하!”

카렌이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데반보다도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무너진 흙더미 너머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익숙한 풍경도 보였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광경이.

혹시나 그 모든 게 내 환상이었으면 어쩌나, 혹은 그 사이에 신전에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레이디, 어떻습니까?”

전과 똑같다는 의미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리를 비켜주자, 카렌이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마음 같아선 맨손으로라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괜히 끼어들어 봐야 방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에블린.”

뒤쪽에서 데반이 나를 불렀다. 초조한 얼굴로 뒤돌아보자, 그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좋으련만. 구멍 사이로 다시 그 광경을 마주하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당장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구하고만 싶었다.

퍼억― 퍽― 카렌이 흙을 파는 소리와 흙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구멍은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커져 있었다.

“카렌 경!”

나는 낮게 소리치며 카렌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멈추고, 제가 먼저 나갈게요.”

“예? 하지만 굴을 더 넓혀야 많은 수의 사람이…….”

“제가 나가서 일단 신력으로 깨우고, 그 후에 파요. 시간이 아까워요.”

신력으로 사람들을 깨우는 데 몇 초가 걸릴지, 몇 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했다.

“알겠습니다.”

카렌의 말에 서둘러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는데, 데반이 가로막았다.

“잠깐, 내가 먼저 가지.”

“네?”

데반이 대답 대신 구멍으로 몸을 뺐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가 싶더니, 가볍게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안전하군. 와도 돼.”

구멍 너머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이번엔 내가 몸을 뺐다. 조급하게 구멍을 통과하자, 새하얀 조명 탓에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여전한 광경이 보였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사람들과 그 가운데 죽은 듯 누워있는 코델리아. 이미 각오했음에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벅찬 숨을 겨우 가다듬었다. 데반이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가 구멍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자, 뒤에서 다시 카렌이 굴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일단…….”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우리가 예전에 들어왔던 조각상 입구에 시선이 멈췄다. 언제고 신관들이 저 문을 열고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다른 걱정은 말고. 네가 할 일만 생각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붙잡으며 데반이 말했다. 누가 들어오든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는 얼굴을 하고선.

그래, 지금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만 생각하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몸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신력을 느껴보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확연히 적은 양이었다. 미약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깨우지 못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내 직감이 맞다면, 이 수많은 사람들을 깨우는 데에는 많은 양의 신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저들은…… 모두 얽혀 있어요.”

뜬금없는 설명에 데반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사람들의 신력을 조금이라도 많이 모아서 코델리아에게 흘려보내기 위해, 일부러 얽혀놓은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아마, 제가 한 명에게만 신력을 보내도 모두에게 이어질 거예요.”

모두 짐작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틀린 거라면, 이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각자 신력을 주입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제발……. 비는 듯한 심정으로 나는 얽혀 있는 인간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릴 때 함께 신전에서 지냈던, 그 상태 그대로 성장이 멈춘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가장 구석에 있었고, 비교적 최근에 이곳에 들어왔을…… 유니스와 병사들은 나와 가까운 곳에 쓰러져있었다.

“유니스…….”

아무렇게나 눌린 얼굴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가, 나는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유니스의 손을 슬쩍 잡자, 미약하게나마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살릴 수 있어.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서둘러 신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신력이 내 몸을 타고, 유니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두근, 두근. 유니스의 몸이 무리 없이 신력을 흡수했다. 그리고 전달된 신력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타고 이어진 다른 병사에게로 빠르게 이동했다.

내 짐작이 맞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돼 있었다.

두근, 두근. 신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니스에게서 병사에게로, 병사에게서 또 다른 병사에게로,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들의 박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점점 많은 수였다. 그럴수록 내 안의 신력은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꼭 내 몸 전체에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흐으…….”

유니스를 붙잡고 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빠져나가고 있는 게 신력이 아니라 피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블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는데, 데반이 뒤에서 나를 받쳤다.

“나에게 기대.”

나는 온몸의 힘을 빼고 데반에게 몸을 맡겼다. 그리곤 그저, 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신력을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찰나의, 나에게는 억겁 같던 시간이 흘렀다. 데반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에블린. 하얀 실이…… 끊어지고 있다.”

하얀 실?

“저자, 코델리아와 사람들을 연결하던 하얀 실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그 하얀 실은 그들의 몸에서 짜내고 있는 신력이었다. 그게 사라지고 있다는 건, 사람들이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소리였고.

신전은 그들이 정신을 잃도록 만들고 강제적으로 신력을 착취해 코델리아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신력으로 그들을 깨어날 수 있도록만 한다면, 자의를 가지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코델리아에게 신력을 빼앗기는 걸 거부하게 될 것이었다.

“마…… 마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잡고 있는 손이 움찔거렸다. 나는 집중하느라 꽉 눌러감은 눈을 가물가물 떴다.

“……유니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방금까지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유니스가 동그란 눈을 뜨고 있었다.

“대공 전하……?”

“여긴 어디지?”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와 함께 대공 저에서 제도로 왔던 병사들이었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도 곳곳에서 들렸지만 상태가 심각한 자는 없는 듯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방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처지면서, 오히려 유니스는 비틀거리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잡고 있는 손에서 더 이상 신력이 빠져나가는 강렬한 맥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신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힘이 사라졌다는 건 즉 생명력이 있는, 그러니까 내 힘으로 구할 수 있는 자는 모두 구했다는 뜻이었다.

“다행…… 다행이다.”

유니스의 손을 놓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는데,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늘어져 있는 아이들이 보인 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