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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8화 (78/123)

78화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쉼터에 도달했다. 펠로스의 말대로, 그곳에는 커다란 식탁과 며칠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양의 식료품, 그리고 몸을 씻을 수 있는 마도구가 있었다.

“레이디!”

물론 카렌도 있었다.

“대공비 전하라고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카렌 위보우.”

카렌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데반이 먼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 이것 참.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

“저는 호칭 따위는 상관없어요. 가짜 카렌 경과 술까지 마셨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중간중간 별궁에 들러놓고, 나에게 언질 한번 해 주지 않은 카렌에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비난하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인상을 구긴 건 데반이었다.

“술을 마셨다고?”

“네?”

“카렌과?”

“……아니요? 가짜 카렌 경이니까, 어떤 기사분이시겠죠.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데반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는 혼자서 곱씹듯 중얼거렸다.

“모르는 기사와 술을 마셨다고…….”

“데반?”

의아하게 바라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펠로스가 끼어들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레이디. 그저 추한 사내의 일면일 뿐이랍니다. 그보다는 조금 쉬시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데반의 혼잣말에는 신경을 끄고 서둘러 펠로스의 뒤를 따랐다.

펠로스가 데려간 곳은 쉼터 구석이었다. 일부러 만들어 둔 곳인지 흙으로 벽이 세워져 있어 시야가 조금 가려졌다. 그러니까 아주 잘 봐주면, 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레이디를 위해 준비해 둔 곳입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묵을 방치고는 너무 소박하지만요.”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레이디 에블린에게는 딱이네요.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과거에 내가 백작 저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게 된 펠로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기 놓인 마도구가 몸을 깨끗하게 해줄 겁니다. 그저 목걸이처럼 목에 걸기만 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느낌은 조금 묘하답니다. 음…….”

“거대한 슬라임에게 핥아지는 기분이죠.”

언제 다가온 건지 카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물론 실제로 만나 본 슬라임은 그보다 훨씬 역겹지만. 제가 오 년 전쯤 남쪽 국경 근처에서―”

“네, 네. 고마워요, 카렌. 이제 가 줘요. 씻어야겠으니까.”

또다시 길어질 것 같은 카렌의 말을 끊고 둘의 등을 떠밀어 내쫓았다.

슬라임을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면서, 나는 겨우 씻었다. 씻는다고 해봐야 펠로스의 말대로 마도구를 목에 거는 것뿐이었고, 옷을 벗을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몸은 순식간에 뽀송뽀송해졌다.

그리곤 방을 나오자, 사내 셋이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아, 레이디. 얼른 앉으십시오.”

웬일로 기사도 정신을 뽐내며 카렌이 내 의자를 빼줬다. 테이블에는 그럴 듯한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여기서 이걸 다 하신 거예요?”

감탄하며 묻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대꾸했다.

“마도구의 힘을 조금 빌렸습니다. 그나마 여기선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아, 그러고 보니 신전에 가까워지면 마도구를 쓸 수 없다고 했었죠.”

뜨거운 김이 나는 스튜를 내 앞에 탁― 내려둔 데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가 마지노선이야. 조금만 더 가도 결계에 가로막히겠지. 일단 먹지, 배고플 텐데.”

“아, 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우리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는다기보다는 거의 밀어 넣는 수준이었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음식에 까다로운 데반은 제외였다. 그는 고기를 몇 점 먹고는 식사를 마쳤다. 덕분에 남은 음식은 카렌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배가 찬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식사를 다 했으면 이제…….”

그 순간, 카렌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 술이 빠질 수 없지!”

데반이 그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앉아, 카렌 위보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렌이 일어났던 모습 그대로 스르륵 앉았다. 덩달아 환한 표정을 지었던 펠로스도 약간 시무룩해졌다. 여기에 술도 있나 싶어서 약간 기대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의 모습을 바라본 데반이 고개를 저었다.

“회의를 할 시간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당장 내일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정하지 않았으니까.”

“크흠. 그래, 그렇지.”

자리에서 일어난 펠로스가 종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곤 종이를 테이블 위에 쫙 펼쳤다. 거기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꼬불꼬불한 선이 이리저리 그려진 걸로 보건데 이 굴 안의 지도인 듯했다.

“이건 굴의 지도인가요?”

“그렇습니다.”

펠로스가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콕 집었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쉼터입니다.”

그 후엔 기다란 직선을 그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쭉 가면 신전 지하고요. 여기까지 약 삼십 분이 걸립니다.”

카렌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아직 채 파지 않은 흙벽이 있습니다. 내일 저녁, 제가 이십 분 정도 먼저 출발해 굴을 파고 있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군.”

다시 펠로스가 지도를 가리켰다. 그곳엔 애매한 동그라미가 그려진 텅 빈 공간이 있었다.

“여기가 신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전 안의 구조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겁니다. 특히 저와 카렌은요.”

데반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도 상관없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나와 에블린뿐이니까.”

“뭐? 이제 와서 우리를 빼놓겠다는 소리인가?”

펠로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데반이 신전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툭 집으며 말했다.

“내일 이곳에 도착하면 나와 에블린이 신전 지하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이미 말했다시피 사람들이 아주 많아. 그것도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의식을 되찾으려면 에블린의 신력이 필요해.”

데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블린이 신력을 주입하는 동안, 나는 주위를 호위할 거다. 굴이 아닌 제대로 된 출입구를 알고 있는 건 나와 에블린뿐이니까.”

“그럼? 그럼 우린 뭘 해야 합니까?”

카렌의 말에 데반의 시선이 이번엔 그쪽으로 향했다.

“너희들은 굴에서 생존자들을 안내하고, 확실하게 보호해라. 카렌, 네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펠로스 너는 굴 입구를 지키는 거다.”

카렌과 펠로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신전에서 침입자를 눈치채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저, 데반.”

내가 초조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만약…… 만약 들키면 어쩌죠? 그들이 지하로 들어오면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데반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야……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지.”

처리……. 처리라는 건 역시, 죽이겠다는 소리겠지?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이 일의 무게가 체감됐다.

“자아!”

무거워진 공기를 환기하듯, 펠로스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그럼 이제 이 작전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목표요? 목표는 당연히…….”

“아니, 우선순위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어느새 진지한 얼굴이 된 펠로스가 덧붙였다.

“가령 이런 겁니다. 그 안의 사람들을 절반쯤 구했을 때, 신관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사람들을 포기하고 도망칠 것인지, 신관을 죽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아…….”

“우리의 우선순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을 때도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죠.”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구나. 나는 당황한 얼굴로 데반을 바라봤다. 그 역시 복잡한 얼굴이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걸까. 우선순위로 무엇을 둬야…….

잠깐 동안 테이블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알아낸 게 있어요.”

슬쩍 데반을 바라보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그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힐다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신전의 악행을 모두 폭로할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이야기.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건…… 생존자의 확보예요.”

새삼스럽지도 않은 말에 펠로스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세히 말씀해보십시오, 레이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신전은 저를 죽이려고 해요. 그들은 마물을 조종할 수 있고, 그 마물을 저에게 보낸 적이 있어요. 두 번이나요.”

카렌의 표정을 살폈다. 펠로스는 이미 신전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렌은? 카렌은 신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 불안한 시선을 눈치챈 듯 카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 더군다나 저 역시 신전에 호의적이진 않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그 마물과 이번 일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죠?”

펠로스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신전이 마물을 조종하는 방법은, 마석을 이용하는 거예요. 그들은 신력을 주입한 하얀 마석을 만들어서 그걸 마물의 몸에 꽂아 넣어요. 그러면 마물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할 수 있죠. 심지어는 드래곤까지도요.”

펠로스의 표정이 금세 흥미롭게 변했다.

“신력을 넣은 하얀 마석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렇겠죠. 거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그래서요?”

“저는 이 사실을 폭로한다면……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네, 증거가 없죠.”

무언가를 깨달은 듯 펠로스가 미소 지었다.

“아하! 그 증거를,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예요.”

나는 힐다의 말을 떠올렸다.

‘각각의 신력에는 특성이 있어.’

“각각의 신력에는… 지울 수 없는 특성이 있대요. 만약 우리가 신전에서 구출한 생존자의 신력과 하얀 마석에 주입된 것이 동일하다는 걸 밝힐 수 있다면….”

펠로스가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신전이 신력을 강탈해 마물을 조종했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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