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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7화 (77/123)

77화

“결혼식 반지 말입니다. 그거 데반 놈이 직접 고른 거라는 말 들으셨습니까?”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간 펠로스가 속삭였다.

“……네?”

갑자기 반지 이야기라고? 신전으로 향하는 굴에서 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화제였다.

“레이디가 지금도 끼고 있는 그 반지요. 놀랍지 않으십니까? 데반이 그렇게 멀쩡한, 아니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한 반지를 골랐다는 게.”

그야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 상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네, 뭐…….”

“그렇게 심드렁하게 반응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펠로스가 왜요?”

“그야……. 데반의 양가적인 마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양가적인 마음?

“레이디가 낄 반지를 제 힘으로 고르고 싶다는 욕망과 스스로의 취향이 레이디의 취향과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 두 가지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도 웃깁니다. 데반의 미적 감각은 단지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내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슬쩍 바라봤다.

커다란 오팔이 박힌 반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조차 여전히 아름다웠다. 결혼식 이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시선이 가 이따금 살피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명목상의 결혼이었고, 이 반지 역시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함인 줄 알았는데…….

데반이 직접 골랐다니…….

“하여튼 제가 놀란 부분은 어쨌든 데반이 레이디의 취향을 존중했다는 겁니다. 저 녀석이 자기 고집을 꺾고 레이디에게 맞추려고 했다니까요?”

“네에…. 그렇군요….”

나름대로 놀라움을 표현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펠로스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레이디가 몰라서 그렇지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카렌이 저와 덥석 내기를 한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카렌과의 내기? 나는 펠로스를 흘겨봤다.

“제 결혼식 예복을 가지고 했다던 그 내기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펠로스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반지 덕분에 제가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데반 놈이 저에게 반지 디자인을 수십 개나 가져와 물을 때, 직감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아, 함께 고르기로 했다던 예복도 모두 레이디의 뜻대로 흘러가겠구나!”

“남의 결혼식을 내기에 사용하셔 놓고 참 뻔뻔하기도 하시네요.”

“그 내기 덕에 카렌 녀석이 불평 한 마디 못하고 굴을 파고 있는 것 아닙니까. 레이디는 외려 저에게 고마워하셔야 됩니다.”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기 따위 하지 않았어도, 카렌이라면 냉큼 도와줬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레이디. 이 보석상을 매입한 것도 제가 볼 때는 레이디 때문입니다.”

“네?”

그야 물론 보석상을 매입한 건 근본적으로 나 때문이 맞았다. 내가 신전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했고, 그걸 위한 첫 걸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펠로스의 말은 어쩐지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레이디께서 반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고, 데반 놈이 좋아하더군요.”

“그것과 보석상이 무슨 상관이죠?”

“글쎄요. 쓸모도 없는 보석들을 아직도 진열해 둔 걸 보면 눈치채실 수 있을 텐데요.”

“그거야…. 펠로스, 당신이 만든 인물 때문이잖아요. 그 왜, 어떤 여자를 위해 보석상을 통째로 매입했다던….”

펠로스가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레이디. 모두 레이디를 위해서였다고요.”

“네에?”

“데반이 그러더군요. 레이디가 보석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석상을 매입하기 위해 어떤 위장을 할지 고민하는데, 데반이 문득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왕이면 보석들까지 전부 구입해 그대로 놔두면 좋겠다고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데반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여자에게 푹 빠져, 그 여자를 위해 가게 하나를 통째로 매입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인물을 만들어 냈더군. 그런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사람도 놀랍지만.’

말도 안 되는…… 인물이라고 해놓고. 정작 보석상을 통째로 매입하고 싶어 했던 건…….

“그렇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착안해 그런 바보 같은 인물을 만들어낸 겁니다. 제가 연기한 건 다름 아닌 데반 자신이었습니다. 데반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요.”

펠로스는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러다 번뜩이는 눈을 하고선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마주봤다.

“레이디, 이게 뭘 뜻하는지 아십니까?”

“뭘 뜻하다니……. 잠깐만요!”

나는 덥석 펠로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눈에 훤해 덜컥 두려워졌다.

“말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하지 마시라고요.”

카렌이 전해준 말처럼, 또 데반이 나를 좋아한다든가 그런 종류의 말을 할 게 틀림없었다.

“왜죠? 레이디께선 뭐가 두려우신 겁니까?”

펠로스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얼굴에 걸린 싱글거리는 미소가 유난히 얄미웠다.

“그런 거 없거든요?”

“제가 보기엔 있는데요. 데반이 레이디를 좋아―”

“펠로스!”

나도 모르게 펠로스의 어깨를 찰싹 때렸을 때였다.

“무슨 소란이지?”

데반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굴 이곳저곳을 살피던 데반이 어느새 인상을 찌푸린 채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펠로스의 팔뚝을 한 번 더 내리쳤다. 절대 데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두 대나 얻어맞아 놓고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펠로스를, 데반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만, 그만 가죠?”

나는 그런 둘 사이를 가로 막듯, 데반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곤 어색하게 웃으며 데반의 팔을 잡아 끌었다. 더 캐물을 줄 알았던 데반은 순순히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굴 안은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지하에, 제대로 마감되지 않아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나마 펠로스의 말대로 공기를 정화 시켜주는 마도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펠로스는 종종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는 펠로스가 가장 앞장서고, 그 뒤를 내가, 또 그 뒤를 데반이 따르는 식으로 이동 중이었다.

“네, 괜찮아요.”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쉬지 않고 걷는 것은 꽤나 체력 소모가 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따지고 보면 나였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마지막 쉼터에 도착하면 씻을 수도, 쉴 수도 있어요. 이건 원치 않으시겠지만, 카렌도 있고요.”

펠로스의 말에 슬쩍 웃음을 흘렸다.

“거기서 하룻밤 잘 겁니다. 본격적인 일의 시작은 내일 저녁부터고요. 쉴 시간이 아주 많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레이디. 원하신다면 지금 쉬어도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말은 저렇게 해도, 나는 펠로스가 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 작전을 점검하고 싶을 테고, 또 혼자 있을 카렌도 걱정되는 거겠지.

가쁜 숨을 애써 티 나지 않게 몰아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데반?”

뒤를 돌아보자, 데반이 손으로 가볍게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안아 주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누가 사람과 가까이 있는 걸 싫어한다고 해서.”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데반이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 줬다. 로브를 입혀줄 때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핑계를 가지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서둘러 다시 등을 돌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계속해서 등 뒤에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그 작은 손길 하나로 걸음을 옮기기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편할수록 데반이 힘이 든다는 소리기도 했다.

“데반, 그…… 전 괜찮아요.”

애써 거절의 뜻을 비쳤지만 데반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에블린. 나야 물론이고, 저래 봬도 펠로스는 검을 다룰 줄 안다. 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훈련을 해 왔다는 뜻이야.”

“…….”

“몇 번이고 말했잖아.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필요한 역할을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선 힘을 아껴야지.”

대답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반의 말이 맞았다. 신전에 도착하면 신력을 잔뜩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체력을 아낄 필요가 있으리라.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내 등을 부드럽게 받쳐주며, 데반이 물었다.

“그나저나 신력은 정말로 괜찮은 건가?”

“아, 그게…….”

힐다는 나를 ‘치료’해주면서, 절대로 신력을 사용하거나 감지하는 일을 해선 안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데반이 이렇게까지 진행시켜 놓은 일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어젯밤, 나는 힐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신력을 꼭 사용해야만 한다고.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인 듯, 신전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는 내 말에도 힐다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제 말을 거스른다는 말에도, 힐다는 화나긴커녕 조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올 게 왔다…… 는 표정 같아 보였다고 하면, 내가 너무 비약하는 걸까.

“에블린?”

생각에 빠져 발걸음을 멈춘 나를 데반의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발이 아픈 건가? 역시 안아 줘?”

“네? 아니, 아니에요.”

나는 다시 발길을 서두르며 말했다.

“잠깐 생각 좀 했어요.”

“신력에 대해?”

“네. 신력은…… 문제없어요. 괜찮을 거예요.”

데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의심스러운 눈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시선을 피했다.

결혼식 날, 시녀를 치료했을 때부터 신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젯밤 오랜만에 신력을 감지해 봤을 때…….

나는 데반이 떨리는 손을 보지 못하도록 주먹을 꼭 쥐었다.

어쩌면…… 이번에 신력을 쓰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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