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방 안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저 멀리서 데반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에게 향했다.
“행색이 꼭 도둑 같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나오라고 한 건 자신이면서, 데반이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말없이 노려보자, 데반이 손에 들고 있던 새까만 천을 펼쳤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껴안듯 빙 둘렀다.
“뭐, 뭐예요?”
“쉿.”
데반이 나에게 입힌 것은 검은색 로브였다. 훅 거리를 좁혀온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내 목 부근에 달린 단추를 꼼꼼히 잠그기 시작했다.
“……제가 할 수 있는데요.”
“조용히 하래도.”
내 코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져 주는 데반이라니. 영 어색했다.
가까이 있어서일까,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든 생각에 나는 서둘러 얼굴을 최대한 뒤로 뺐다. 냄새라니, 남의 냄새나 맡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 웃기는 모양새에 데반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안 잡아먹는데.”
마침내 단추를 모두 채우고 내 머리 위로 후드까지 씌워준 데반이 말했다.
“……제가 원래 사람이랑 가까이 있는 걸 싫어해서요.”
“그럴 리가.”
불쑥 데반이 내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흡― 나는 빠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팩 내려 시야를 가렸다.
“이럴, 이럴 시간 없잖아요. 얼른 가요.”
당황스러움을 하나도 숨기지 못한 내 말투에, 데반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지.”
반쯤 가려진 시야로 데반의 발이 멀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깜짝이야……. 키스하는 줄 알았네.
난데없이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코앞에서 깜빡거리던 데반의 붉은 눈동자가 망막에 새겨진 듯 잊히질 않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밤중에 어두운 로브까지 걸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한 보석상이었다. 이제는 데반이 구입해 영업을 하지 않는, 지하에 신전으로 향하는 굴이 뚫린 보석상.
마차를 사용했다간 눈에 띌 게 분명했으니, 우리는 워프 마법이 걸려 있는 마도구를 사용했다. 그것마저도 들킬 위험이 있다는 데반의 말에 보석상이 아닌 그 근처 번화가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기서부터 보석상까지는 걸어갈 생각이었다.
“어쩐지 조금…… 이상하네요.”
쌀쌀한 바람이 부는 텅 빈 거리를 보다 나는 데반의 곁으로 슬쩍 붙었다. 분명 사람들이 가득하던 번화가였는데 불빛 하나 없이 어둠에 잠겨 있으니 영 서늘했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반은 나를 한 번 바라본 후 보폭을 맞췄다.
나는 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상기했다. 보이지 않는 게 두렵지 않다니…….
“……그럼요? 그럼 데반이 두려운 건 뭐죠?”
“글쎄. 가끔은 너무 잘 보이는 게 두렵지. 이를테면 악의라든가.”
악의라…….
“악의는 아무리 숨겨도 눈에 보이거든. 뭐,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만.”
나는 그가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도대체 데반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었던 걸까? 어떤 일을 겪었길래, 눈이 머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오는 악의가 더 두려웠던 걸까.
데반을 바라보며 한창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도착했군.”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둠 속의 보석상을 마주하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명 하나 없음에도 진열된 액세서리들이 달빛을 반사시키며 이리저리 빛나고 있었다. 그게 또 유리에 비쳐 꼭 보석상 자체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지.”
“아, 네.”
그런 것들에는 하등 눈길도 주지 않은 데반이 보석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근데 데반, 보석상은 이제 영업 안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근데 보석은 왜 아직 있어요? 눈에 띄기만 할 것 같은데…….”
“뭐?”
앞서가던 데반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다시 홱, 고개를 돌린 데반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네?”
“펠로스가 그런 캐릭터를 만들었으니까.”
하긴, 선물을 하기 위해 보석상을 산다고 해놓고, 보석을 모두 치워버린다면 이상하게 보일 테다.
대충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데반이 가게 구석에 있는 문을 열었다.
“여긴 어디에요?”
“원래는 중앙 귀족, 그러니까 보석상에서 돈을 얼마 이상 쓴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개인 룸이었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작전이 시작될 곳이기도 하고.”
그 말은 이 방 안에 굴이 있다는 소리일 테다. 금세 긴장되는 마음으로 나는 데반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이디!”
나를 반긴 건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펠로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은 은은하게 빛이 밝혀져 있었다. 창문은 모두 새까만 천으로 꼼꼼하게 막아둔 뒤였다.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 반갑군요!”
그리고 방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뚫려 있었다. 나는 펠로스의 목소리가 그 속에서 들린다는 걸 겨우 알아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펠로스를 내려다봤다. 빛의 출처는 구덩이 안이었다. 그 안만 꼭 대낮인 것처럼 밝았다.
“거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레이디를 기다리고 있었죠! 어서 내려오십시오. 보여드릴 게 아주 많답니다.”
데반이 작게 혀를 차더니, 구덩이 안으로 능숙하게 뛰어 내려갔다. 구덩이는 거의 한 층 높이가 될 것 같이 깊었는데 당연히 계단도, 붙잡을 밧줄조차도 없었다.
“에블린.”
어떻게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며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는데, 데반이 내게 두 손을 내밀었다.
“뛰어 내려.”
“네에?”
옆에서 펠로스가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레이디의 앞이라고 멋진 척을 하는군.”
“닥쳐.”
데반이 펠로스를 노려봤다. 그 사이에 나는 구덩이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자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군. 저만한 위치를 뛰어내리지 못해 아주 울며불며―”
“닥치라고 했다. 펠로스 키베온.”
데반의 거친 말투에도 펠로스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리고 레이디라고 부르는 건 이제 그만하지.”
“왜? 이제 레이디가 아니라 대공비 전하다, 이 말인가?”
“……그래. 카렌 녀석한테도 이미 한 차례 주의를 줬다.”
“이봐, 데반. 호칭을 바꾼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네.”
“뭐?”
“내가 레이디라고 부르든 대공비 전하라고 부르든, 이미 레이디께선 자네의 부인이 된 몸이다 이거지.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펠로스!”
데반이 한 번 더 소리쳤을 때였다. 탁― 구덩이 안으로 착지하며 내가 속삭였다.
“어휴, 시끄러워요. 그러다 다 들키겠어요.”
“무슨, 에블린?”
나는 손에 묻은 흙을 대충 털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하라고 하실 땐 언제고.”
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데반이 나와 구덩이 바깥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데반과 펠로스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다투는 동안, 내가 혼자 가파른 벽을 타서 구덩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왜요? 제가 혼자서 못 내려올 줄 알았어요?”
나는 그런 데반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제가 대공 저 벽을 타서 도망친 사람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데반은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을 했고, 펠로스는 하하하―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것 참, 제가 이래서 레이디를 좋아한다니까요!”
한참이 지나도 웃음을 멈추지 않아,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고 나서야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
구덩이 안은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아래로 깊어지는 구조였는데, 어느 정도 걷다 보니 휴식을 위한 듯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그곳에는 그럴 듯한 식탁과 의자는 물론이고, 꽤 많은 양의 식료품, 갈아입을 옷과 물도 준비돼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설마 여기서 지내셨던 거예요?”
깜짝 몰라 묻는 말에 펠로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보석상은 운영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으니 그곳에서 지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여도 수상하지 않습니까.”
영업을 하지 않는 보석상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면 수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일 테다.
“거기에 굴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바깥으로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중간 중간 이런 곳이 몇 군데 더 있습니다. 말하자면 쉼터 같은 거지요. 카렌과 함께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펠로스…….”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습니다, 레이디. 데반에게 이미 두둑한 보수를 받았으니까요.”
데반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액수를 들으면 하나도 안타깝지 않을 거다.”
펠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에 생각보다 괜찮은 생활이었답니다. 요새 마도구는 공기도 정화시켜 주더군요.”
펠로스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의 생활에 꽤나 만족했으리라. 어쩐지 그게 더 안쓰러웠다.
“지반은 튼튼한 게 맞나?”
굴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데반이 불쑥 물었다. 펠로스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누구 솜씨인데.”
“이대로 가면 바로 신전인 것도 맞고?”
“그래. 물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아직 완벽하게 뚫지는 않았어. 삼십 분 정도면 완전히 뚫을 수 있을 만큼만 남았지. 그 근처, 그러니까 마지막 쉼터에서 카렌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흐음…….”
데반이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를 했다. 펠로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슬쩍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보다 레이디.”
“네?”
나를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 펠로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식 반지 말입니다. 그거 데반 놈이 직접 고른 거라는 말 들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