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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5화 (75/123)

75화

“그래. 나는 굴을 팔 생각이다. 지하를 뚫어, 신전에 들어갈 생각이야.”

데반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굴을 판다고? 지하를? 그게, 그게 가능한가? 나는 그제야 데반이 자기 입으로 ‘무식한 방법’이라 칭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벽을 뚫겠다니.

“그게…… 말이 돼요?”

“왜 안 되지?”

“그야…….”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신전에서 눈치채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갑자기 근처에서 땅을 파고 있으면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요.”

그러나 데반은 내가 제기한 의문에도 변함없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신전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 뭔지 알고 있나?”

가까운 건물? 그런 것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신전 주위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고.

“갑자기 가까운 건물은 왜…… 당신은 알고 있어요?”

“그럼. 왜냐하면 그 건물이 이제 내 것이거든.”

“……네?”

“근처에서 땅을 파면 당연히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기 소유의 건물 지하를 뚫는다면? 그걸 신전에서 알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설령 안다고 해도 그들이 뭘 할 수 있지?”

한 마디로 데반의 말은, 가까운 건물 지하에서부터 신전까지 굴을 판다는 소리였다.

지하에 연결된 굴이라니. 너무나 독특하고 황당하지만 나름대로 그럴듯한 발상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니,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

“……그래서요? 그 건물에서 신전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데요?”

“글쎄. 이 별궁의 끝에서 끝 정도?”

한마디로 어마어마하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먼 거리를 뚫는다고요?”

도대체 어떻게? 한시가 급한데, 땅굴을 파내기에 특화된 도구라도 있나?

“아, 혹시 마법사라도 고용하시는 건가요? 마법으로, 음…….”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마법으로 땅굴을 팔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데반은 고개를 저었다.

“신전은 마법에 굉장히 예민하다. 마도구를 비롯한 모든 마력이 깃든 물건을 경계하지. 마법사는 신전에 방문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몰랐어요.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죠?”

“걸리는 게 있어서겠지. 실제로 우리가 본 것도 있고.”

“하지만 대신관은 친한 마법사가 있다고 했는데요.”

황궁 도서관에서 흑마법을 조사하다, 펠로스와 함께 봤던 대신관의 저서를 떠올렸다. 거기엔 대신관이 마탑주와의 친분을 과시한 부분도 있었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아주 개인적이야. 마탑이 마법사 전체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볼 순 없지. 그러니 신전은 두려운 거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악의를 품은 마법사가 나타날까 봐 말이야.”

“그렇군요…….”

“애초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굴을 파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이 별궁에서 신전 지하로 가는 포탈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 혹시나 싶어 시도해 봤지만, 불가능하다더군. 네가 말한 그 마탑주가 만들어 준 결계겠지.”

아, 포탈이 있었구나. 이런 종류의 마법을 애초에 생각도 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죠?”

“단순한 이야기지. 힘을 사용하는 거다.”

“……네에? 그럼 그냥 맨손으로 뚫는다고요?”

“물론 마도구 몇 개의 도움은 필요하지. 신전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감지되지 않거든.”

마도구를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손만 가져다 대면 저절로 땅을 팔 수 있는 수준 같아 보이진 않았다.

“도대체 그걸 누가 하죠? 신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용병을 고용할 수도 없을 것 아니에요.”

“그렇지. 이야기가 어디서 새어 나갈지 모르니까.”

“설마, 설마 데반이 직접 하려는 건 아니죠?”

데반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설마. 그런 일에 전문인 사람은 따로 있지.”

전문인 사람? 땅을 파는 일에 전문인 사람이 대체 누가 있지? 거기에 믿을 만한 ……. 나는 몇몇 인물을 떠올렸다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렌? 설마 카렌 경인가요?”

“그래. 스스로의 능력을 아주 잘 활용할 수 있는 자리지.”

나는 입을 약간 벌렸다. 카렌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자신은 그 대단한 위보우 가문의 적자이며, 근위대장 자리를 고사하고 데반의 기사로 들어왔다던 그 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을 고작 흙을 파는 데 이용하려고 하다니.

“그리고 펠로스도.”

“펠로스도요?”

나는 갑옷을 입었을 때도 썩 튼튼해 보이지 않던 펠로스를 떠올렸다. 그런 그가 땅을 파는 모습은 영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당연히 굴을 파는 쪽은 아니고. 펠로스는 건물을 매입하는 데 도움을 줬다. 또다시 신분을 위장해서 말이야.”

“신분 위장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긴 하죠.”

“그래, 웬 할 일 없고 돈 많은 귀족 나부랭이로.”

데반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덧붙였다.

“그 건물이 하필이면 보석 가게였거든.”

“아…….”

“여자에게 푹 빠져, 그 여자를 위해 가게 하나를 통째로 매입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인물을 만들어 냈더군. 그런 말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도 놀랍지만.”

펠로스의 화려한 얼굴과 언변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건물을 매입한 뒤로는 계속해서 건물을 드나들며 여러 가지를 해줬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

“필요한 거요?”

“마도구를 비롯해, 뭐……. 가보면 알 거다. 아무튼 펠로스는 이번엔 그 돈 많은 귀족에게 고용된 행세를 하더군. 주위 상인들에게 날것의 정보를 얻어야 한다면서 말이야.”

때로는 알음알음 전해지는 소문이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펠로스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둔 모양이다.

“평민 행세를 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나. 가령 신관들이 근처의 어떤 가게를 특히 많이 들리는지, 뭐 그런 것들.”

잠깐만, 평민 행세?

나는 펠로스가 창문을 통해 내 방에 들어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그 옷을 입은 게 그럼…….

‘저는 데반의 부탁을 수행하는 중이랍니다. 그것도 레이디와 데반 둘 모두를 위해서요.’

그게 이걸 뜻하는 거였나? 하지만 그날은 결혼식 바로 다음 날이 아니었던가.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데반을 바라봤다.

“데반, 도대체 이 일을 언제부터 계획하셨던 거죠?”

“그 날, 신전에 다녀왔을 때부터였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걱정하지 말라고.”

대수롭지 않은 데반의 말에 나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그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때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나.

“그러니 너는 이제 그 굴을 통해 신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

“……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말은…… 벌써 준비가 끝났다고요? 그 굴을, 다 팠다고요?”

“그럼. 내가 말하지 않았나? 별궁을 떠나 있는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네가 안다면 아주 놀랄 거라고.”

데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왜 너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숨겼는지도 눈치챘겠지.”

“……제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요?”

나는 펠로스처럼 화려한 언변을 가지고 있지도, 카렌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약간 주눅이 들어서 말하자 데반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안전을 위해서였다. 신전은 여전히 너를 노리고 있어. 네가 이 계획을 모르는 채로 별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반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리고 지금부턴 다른 누구보다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내 역할……. 나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알아요. 신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깨우는 것.”

“그래.”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로 결의를 다지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소리쳤다.

“잠깐만요!”

“뭐지?”

“카렌은…… 카렌은 별궁에 있었는데요? 어떻게 그 굴을 다 판 거죠?”

설마 별궁과 건물을 왔다 갔다 했던 걸까? 여기서 신전까지는 꽤 거리가 됐다. 아무리 카렌이 튼튼하다 해도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아, 사실은 별궁에 있던 건 카렌이 아냐.”

“……네에?”

“간단한 위장 마법이지. 별궁에 나도 카렌도 없었다간 네가 불안해했을 테니까. 또 신전에서 별궁을 노린다면 카렌의 존재는 그럴듯한 방패가 되어줄 거고.”

가짜였다고?

어쩐지. 나는 아무리 술을 먹여도 데반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던 카렌을 떠올렸다. 그의 성격에 비밀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그 자는……?”

“다른 기사 중 하나다. 물론 카렌도 실제로 별궁을 들려 너의 안전을 확인했지. 어차피 위장 마법을 위해선 일주일에 한 번은 실제 인물과 접촉해야 하거든.”

그럼 가끔 보이던 말 많은 카렌이야말로 진짜 카렌이었다는 거구나.

‘제가 내기에서 져서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펠로스가 저를 얼마나 이용해 먹는지―’

나는 카렌이 무심코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했던 게 바로 굴을 파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저만 모르는 사이 세 분이서 아주 작당을 꾸미고 계셨군요.”

불만스러운 내 말투에 데반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 너를 위한 일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더 억울한 거예요. 따질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이젠 네 차례야.”

데반이 아예 의자에서 몸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데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나 역시 데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힐다에게서 겨우 얻은 정보를 데반에게 알려줄 차례였다.

“그 존재와 무슨 일이 있었지? 알아냈다는 건 또 뭐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우리, 신전의 악행을 모두 폭로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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