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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4화 (74/123)

74화

데반은 잔뜩 날 선 표정으로 말했다.

“에블린. 저번부터 네가 저 존재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말로 저게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

나는 그의 기세에 움츠러들었지만,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저번에 드래곤에게서 구해줬던 것도 힐다잖아요. 그 전에 제가 대공 저를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준 것도 힐다였고, 또 데반이 눈이 저주로 멀었을 때 조금이나마 사위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 것도 힐다였어요.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힐다를 바라보자,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에블린 쪽이 더 똑똑하네.”

“아니, 설령 그게 정말로 저 존재가 한 일이라고 해도 그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야.”

“아! 그것도 맞아! 재밌어서 하는 거야, 응.”

힐다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의자에 올리더니 제 무릎을 껴안고 흔들거렸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의자는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어차피 정말로 그녀가 전지전능하다면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데반에게 속삭였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러니까 이용해야죠.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힐다가 행동하도록요.”

“우리가 원하는 쪽?”

“당신의 눈을 완전히 고치고, 저도 죽지 않는 쪽이요. 그러려면 힐다가 필요해요. 우리는 아직 이 힘이 무엇인지도 모르잖아요.”

데반이 대놓고 비웃었다.

“저게 순순히 알려준다고 하던가? 그래?”

두 번째 물음은 내가 아닌 힐다를 향한 것이었다. 힐다가 히죽 웃어 보였다. 나는 다시 발끈하려고 하는 데반을 겨우 막았다.

“어쨌든 도와준다고는 했어요!”

멈칫한 데반이 나를 바라봤다.

“자기 입으로 그랬다고?”

“네! 저를 치료해 준다고 했다고요!”

데반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치료라니?”

나에게 묻는 게 아닌 혼자서 곱씹는 듯한 얼굴이었다.

“……치료를 받고 있다고? 저것한테?”

“어……. 네.”

힐다가 치료를 해주고 있다고 말하면, 데반이 진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인 모양이었다.

데반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테이블 아래로, 그가 검을 더욱 세게 쥐는 게 보였다.

“정확히 말해. 도대체 무슨 치료를 받는다는 거지?”

“네? 그게…….”

사실, 나도 힐다가 나에게 정확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힐다가 하는 건 그저 나를 눕히고 손으로 몸 이곳저곳을 건드리는 것뿐이었다. 꼭 내가 신력으로 사람들을 치료했던 것과 비슷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나는 신력을 모으는 준비 시간이 필요한 반면 힐다는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힐다는 차를 마시거나 쿠키를 먹으면서도 나를 치료했다.

솔직히…… 치료를 하긴 하는 건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저 나를 건드리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에블린.”

데반이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냥…… 제가 데반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거예요.”

나는 말을 하면서 힐다의 눈치를 슬쩍 봤다. 힐다는 다행히도 우리 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맛있어 보이는 스튜를 한 손에 들고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네?”

“그 이후로 몸은 어떻지? 차도가 있나? 흑마법, 그러니까 저것의 힘이 줄어든 것 같아?”

나는 데반이 쏟아내는 질문에 몸을 움츠렸다.

“그게 그러니까…….”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 재미없네.”

힐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힐다?”

도대체 언제 다 해치운 건지 그녀의 앞에는 음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힐다가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크게 켰다.

“다 싸우면 알려 줘. 부부싸움에는 흥미가 없어서. 나는 피곤해서 가봐야겠다.”

“간다고?”

“응, 내 방으로. 걱정 마, 아예 떠나는 건 아니니까.”

힐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데반을 노려봤다.

“나는 오직 에블린 때문에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저 오만한 인간은 내 알 바도 아닌데. 어디 평생 눈이 먼 채 살라지.”

“꺼져.”

데반이 으르렁거렸다. 나를 향한 게 아니었음에도 절로 몸이 움찔 떨릴만한 위협이었으나, 힐다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듯했다.

힐다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데반을 노려봤다.

“이봐, 이 모든 건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벌어질 일이었어. 난 그저 조금 앞당겼을 뿐이라고. 괜한 데 화풀이하고 있다는 걸 네가 언젠가 깨달았으면 좋겠네.”

앞당겨? 나는 처음 듣는 말에 힐다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힐다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데 데반이 나를 불렀다.

“에블린.”

그는 힐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몸은 어떻느냐고 물었다.”

그저 내 안위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음, 사실은 힐다가 치료 중간에 신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해서요.”

“뭐?”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래서 신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제대로 가늠해볼 수가 없었어요.”

“그게 무슨. 그럼 제대로 치료가 되고 있는 건지 모른다는 건가?”

“저도 알아요, 수상한 건.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는걸요. 데반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렇지. 무턱대고 몸을 맡겼다고?”

나무라는 듯한 눈으로 데반이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너는 저것에 왜 그렇게 무른 거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

“딱히 무른 건 아니에요. 그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내 말에 데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억울해져서 항변했다.

“결혼식 때…… 시녀를 치료해 주느라 신력을 썼었어요. 그때 느꼈다고요. 이미 제 신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걸요.”

“뭐?”

“펠로스가 그랬잖아요. 흑마법이 점점 신력을 먹을 거라고. 그리고 만약 다 먹으면 저는 죽을 거라고요. 제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죠?”

데반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숨기지 못하는 착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되레 그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신전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데반은 제가 구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었다.

그런데 내가 죽는 일은…… 체념한 것 같은 얼굴을 하다니.

나는 무릎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저는 살고 싶어요.”

“……에블린.”

“저도…… 저도 무섭다고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아, 나는 무서웠던 건가. 나조차 알지 못했던 감정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 형체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무서웠던 거구나.

“……에블린.”

데반의 목소리가 당혹스러운 듯 흐려졌다. 검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그가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아무튼 웃기는 사람이었다.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거나 손을 잡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사람을 위로하는 건 이토록 서툴다니.

나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말했다.

“그리고…….”

“응?”

“그리고 저도…… 마냥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실은 알아낸 게 있어요.”

“알아낸 거라면……. 그 존재에게서?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인가?”

“그건 아니지만―”

그 순간이었다. 내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어쩌다 보니 거의 안을 듯 가까이 있었기에 데반에게도 들렸을 게 틀림없었다.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이건 그러니까…….”

“이야기는 식사와 함께 하는 게 좋겠군. 정성껏 차린 음식이 다 식어가고 있으니까.”

“……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지만, 데반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부끄러운 일만 가득 일어날 모양이었다.

*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 식사를 시작했다. 커다란 식탁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조금 웃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맞은편으로 가기도 애매했다. 거기에 맞은편은 이미 힐다가 먹은 음식들로 초토화돼 있었으니까.

스튜를 입에 넣고 고기를 어색하게 썰고 있는데, 데반이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사람들을 빼 오는 거 말인데.”

“……네!”

번뜩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야기였다.

“어제 말했듯, 무식한 방법을 쓸 생각이다.”

나는 입을 오물거리며,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신전은 자신들이 지하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걸 숨기고 싶어 한다.”

“그렇죠.”

“그러니 만약 우리가 그들을 빼 온다고 해도, 현장에서 붙잡지 못한다면 따지지 못할 거야.”

“그거야 그런데…….”

문제는 붙잡히지 않을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결혼식처럼 훌륭한 핑계가 있지 않는 한 신전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내 표정을 보던 데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 같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나는 신전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

“……네?”

“적어도 문으로는 말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들어간다는 소리란 말인가.

창문……? 그렇다고 해도 신전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자 데반이 힌트라도 주듯 말했다.

“그 장소를 다시 한번 떠올려봐.”

그 장소라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끔찍한 광경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장소 말이다, 에블린. 사람들 말고.”

“장소요?”

신전…. 그리고 지하…. 신의 조각상…. 종아리 안…. 서늘한 공기…. 사람, 사람, 그리고 코델리아….

내 머릿속에는 그런 것들만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영 감을 못 잡고 헤매자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장소, 제대로 된 공간이 아니었잖아.”

“네?”

“벽이 없었단 말이다. 굴에 가까웠지.”

“아…….”

그랬던가? 데반이 그렇게 말하니 그랬던 것도 같았다. 채 마감되지 않은 흙벽에 밝은 조명들만 걸려 있었던 것 같은…….

그러나 또렷이 기억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충격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 그런 걸 확인한 데반이 대단한 거였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문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제대로 된 벽이 없다, 거기에 무식한 방법이라는 말까지……. 이 모든 게 뜻하는 건…….

나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소리쳤다.

“잠깐만요! 설마……. 아니죠?”

데반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

“그래. 나는 굴을 팔 생각이다. 지하를 뚫어, 신전에 들어갈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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