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3화 (73/123)

73화

데반이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데반? 지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피곤해서.”

“그럼 침실로 가세요!”

황당하게 소리쳤지만, 데반은 고개를 들긴커녕 눈을 감아버렸다.

“데반!”

“침실로 가는 건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무슨, 네?”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어느새 데반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좀 봐주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면 봐주고 싶어질 텐데.”

“…그 무슨 일이 궁금해 죽겠다고요. 피곤해서 말도 하기 싫다던 분이 도대체….”

“말하기 싫은 거지, 듣기 싫은 건 아니라서.”

“네?”

“내가 없는 동안 별궁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알려줘.”

“……그런 건 집사에게 들으셔도 되잖아요.”

눈을 감은 데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자는 건가? 슬쩍 고개를 숙여 데반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삼 이렇게 가까이 그의 얼굴을 마주한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착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단단한 눈썹 뼈와 콧대가 만든 깊은 그림자와, 단정하게 내려앉은 기다란 속눈썹을.

“에블린, 잘생긴 건 아는데 얼굴 감상은 나중에 하고 이야기나 들려줘.”

그러다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어떻게 안 거지?

“……감상 안 했어요.”

부루퉁하게 말하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서, 에블린. 응?”

이야기라니. 말해줄 만한 이야기가 정말 없는데.

데반은 그저 쉬고 싶은 걸까? 신전이니 저주니 그런 것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은 걸까?

나에게 해준 아등바등 극복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일단 정원을 가꾸기 위해 두꺼운 책을 몇 권이나 봐야 했어요. 그 후엔…….”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데반의 숨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얼굴이 작아서인가. 허벅지에는 별다른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슬쩍 손을 들어 데반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그럼에도 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금 더 대담하게 쓸어 넘겼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데반, 자요?”

“…….”

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사실은 정원 한구석에, 당신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 뒀어요. 펠로스가 그랬거든요. 고맙다는 말은 데반을 위해 남겨두라고.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코델리아와 사람들을 구해오고, 신전이 저지른 악행을 밝혀내 무너트린다면?

데반은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허전함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바랐던 대로 다른 제국으로 떠나면 된다. 원작의 인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든 데반의 얼굴이, 이토록 야속해 보인 건 처음이었다.

*

……응?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낯선 풍경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아니, 자세히 보니 낯선 곳이 아니었다. 바로 어젯밤 왔었던 데반의 집무실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 데반이 내 허벅지를 베고 잠들었고, 그 후에……. 그 후의 기억이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일어났군.”

“……데반!”

내가 누워있던 소파 너머로, 데반이 보였다. 그는 멀끔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있었다.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는 듯 주위에 서류가 가득했다.

나는 서둘러 내 모습을 훑어봤다. 어젯밤 입고 있던 잠옷 그대로였다.

“깨우지 그랬어요!”

황당하게 소리치자 데반이 보고 있던 책을 탁-소리가 나게 덮었다.

“깨워도 안 일어나던데?”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 소파가 마음에 드는지 아주 푹 자더군.”

확실히 소파는 굉장히 커다랗고 푹신했다. 거기에 누가 가져다준 건지 두툼한 이불마저 몸 위에 덮여 있었다. 밤새 잠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작게 웃은 데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그만 식사를 하러 갈까? 할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많은 것 같군.”

“……들을 이야기요?”

할 이야기라면 몰라도, 들을 이야기가 뭐지?

소파 옆으로 다가온 데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서둘러 소파 한 켠에 놓인 숄을 집어 두르고 그 손을 맞잡았다.

“별궁에 모르는 손님이 와있더군.”

손님?

“……아!”

힐다!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걸 잊었지?

“친구인 남작 영애? 웃기지도 않더군.”

데반은 내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복도로 향하는 그를 나는 종종 걸음으로 따라갔다.

“모두의 기억을 조작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내 침실 앞에 다다른 데반이 손을 놓아줬다. 나는 그제야 지금껏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침실 문을 벌컥 연 데반이 나를 슬쩍 밀었다.

“일단 준비하고 나와.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하지. 벌써 해가 중천에 떴으니.”

“아…. 네….”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중천에 떴다고? 아침이 아니라는 건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로 온 시녀는 얼굴을 붉힌 채 연신 감탄사를 남발했다. 어쩜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침실을 뛰쳐나가 밤새 안 돌아오실 수가 있느냐고.

그러면서 데반이 오늘 아침 식사를 걸렀다는 것과 집무실로 이불 한 채를 부탁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줬다.

“글쎄, 시종에게 이불을 부탁하셔놓고 집무실로는 못 들어오게 하셨대요. 그 말은 그러니까, 전하께서 직접 이불을 덮어주셨다는 소리가 아니겠어요?”

나를 빠르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뒤, 이제 머리를 매만지며 시녀가 말했다.

그녀는 심심하던 별궁에 오랜만에 생긴 스캔들에 신난 것 같았다.

“그리고요. 대공비 전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는 식사하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데반의 말대로, 내가 일어났을 땐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 말은 데반도 나도 아침을 걸렀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신 거예요?”

음흉한 미소를 짓는 시녀에게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이야기 좀 했어.”

“네, 네.”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을 하고선 시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아무리 소파가 편하기로서니 정오까지 잠을 자다니. 피곤했던 것도 아닌데…….

“그럼 전하께서 옆에 계셔서 오래 주무신 걸로 하죠, 뭐.”

“뭐?”

나는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곧바로 부정하는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머, 이번에는 아니라고 안 하시네요?”

정말 그런 건가. 기다리던 데반이 돌아와서 안심이라도 한 건가. 안심이라니. 한때는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내에게.

“……조용히 하고 얼른 준비나 해 줘.”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거울을 통해 흘겨보자 시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준비를 끝마치고 다이닝룸에 가자, 데반은 이미 기다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힐다가 앉아 있었다. 정말로 귀족 영애라도 된 듯한 드레스를 차려입고서.

나는 입구에 서서 그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둘은 사이좋게 식사를 약속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데반이야 늘 그랬듯 식사를 위해 다이닝룸으로 온 걸 테고, 힐다도 마찬가지겠지.

문가에 멀거니 서선 누구의 옆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데반이 눈짓했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아…….”

슬쩍 다가가자, 시종이 움직이기도 전에 데반이 자기 옆의 의자를 홱 빼줬다.

의자에 앉자마자 시종들이 빠르게 음식을 서빙했다. 테이블 가득 식사가 차려지자, 데반이 미리 말해둔 듯 모두가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셋밖에 없는 다이닝룸에는 적막만 가득했다. 데반은 힐다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데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힐다는 우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포크와 나이프로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말해보지.”

여전히 힐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데반이 말했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잠깐 망설이는 사이, 힐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데반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지.”

데반의 말에 힐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앞에 나타난 거라고 누가 그래?”

“그럼 에블린 앞에 나타났다는 건가?”

데반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제야 데반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넌 참 멍청하구나.”

힐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비아냥거리는 태도였다.

“뭐?”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 리도 없는데 그렇게 날을 세워서 어쩌게? 차라리 에블린처럼 납작 엎드리는 게 현명한 거지.”

납작 엎드리다니……. 비위를 맞춘 건 맞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머쓱한 마음에 나에게 꽂히는 데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글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시도해봐야 아는 것 아닌가?”

데반은 금방이라도 검을 빼 들 기세였다.

“데반, 잠시만요!”

서둘러 그를 저지했다. 설령 그가 정말로 힐다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죽여선 안 됐으니까.

내가 뭐 때문에 힐다의 비위를……. 그래, 뭐 때문에 납작 엎드려서 비위를 맞췄는데!

“일단 이야기를 좀 해요. 힐다는 우리를 도와줄 셈이라고요.”

“도와준다고? 저게?”

데반이 코웃음쳤다. 제대로 마주 본 그의 눈동자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0